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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강좌] [경제정의] 관우 흉내내는 정치인들의 착각
1999.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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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우 흉내내는 정치인들의 착각


 


신기남 변호사


 


 


매스컴에 보면 심심찮게 소위 ‘골프장 회동’이란 것이 등장한다. 사회 유력자들이 골프장에 모여 체력단련도 하고 동시에 무슨 중요한 얘기들도 나누곤 하는 것이다. 그런데 대개 체력단련보다는 밀담을 나누는 것이 더 중요한 목적인 것 같다. 단순한 체력단련이라면 굳이 매스컴에서 다루지를 않을 터이다. 어떤 중요 ‘이슈’가 있으니까 매스컴이 따라 붙는 것이겠지.


 


거기 모이는 유력자들이란 기업가, 예술인, 학자, 법조인, 상급 공무원 등 여러 부류가 있을 수 있겠으나 역시 매스컴에서 가장 좋아하는 메뉴는 정치인들일 것이다. 국사를 논하는 정치인들의 골프회동이야말로 이야기 거리가 된다. 나머지는 자기들끼리 좋아서 골프 치는 것이니 그야말로 사생활이란 차원에서 매스컴이 유독 따라 붙을 필요가 없다.


 


요즘 이따금씩 얼굴 팔리기가 인기 ‘연예인’ 못지 않은 낯 익은 정치스타들이 화사한 얼굴을 하고 호기 있게 골프채를 휘두르는 모습은 TV화면이나 신문지상에서 본 기억이 난다. 무슨 중요한 일이 있긴 있는 모양이다. 골프를 한 차례 ‘라운딩’하려면 반나절은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그런 곳을 회동장소로 택한다고 하는데…  글쎄, 그 모습을 지켜 보는 내 눈에 까닭 모를 불만, 울분 가은 것이 밀려 오는 것은 왜일까?


 


 


마음의 평정깨는 TV 골프회동 방영


여기서 나는 ‘골프’라는 운동 자체에 대한 논쟁을 펴려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해두고자 한다. 나는 요즘의 무분별한 골프장 건설을 강력히 비판하는 입장이지만 ‘골프’자체를 공격하고 싶지는 않다. ‘골프’는 분명 고급운동인데, 고급이라고 해서 모두 배척당해서는 안될 것이다. 단지 ‘골프’를 치더라도 야단스럽게 활개치며 치지말고 가능하면 자제하는 태도로 겸손하게 쳐달라는 주문을 할 뿐이다.


 


주위에서 하도 많이들 치니 그들의 시선이 무서워서라도 감히 골프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평가를 내릴 용기가 나지 않는다는 것이 솔직한 내 심정이고, 그저 우리나라가 아직은 나 같은 사람까지 골프에 탐닉할 시기는 되지 못한다는 수줍은 소신을 혼자서 지켜 나가기로 마음먹고 있을 뿐일 것이다.


 


그런 정도의 생각을 가지고 있는 나에게 엄습해 오는 TV 9시 뉴스 시간에 정치인의 ‘골프회동’ 화면은 애써 유지하고 있는 골프에 대한 심적 평정상태를 깨뜨리고 기어코 불만과 울분을 토로하게끔 만든다. 그 모습은 체형이 엉망인 사람이 노출 심한 화사스런 드레스를 입고 단상에서 패션쇼를 벌이는 것 같이 심히 민망스러운 꼴이다.


 


왜 하필 정치한다는 사람들이 그런 곳에서 그 중요하다는 일을 처리해야 하느냔 말이다. 얼마나 중요했으면 TV 9시 뉴스에서까지 그곳을 비출까? 그렇게 중요한 일이 그곳에서 그런 식으로 진행되어도 괜찮을까? 그들은 뭔가 생각을 잘못해도 단단히 잘못하고 이TSms 것이 아닐까? 안 그래도 요즘 정치인들의 신뢰도는 땅에 떨어져서 시민들이 그들을 보는 눈매가 결코 곱지 못하거늘 이러한 눈총에는 아랑곳없이 그린 필드 위에서 태평천국의 구상에 빠져 있다니, 원 참…


 


 


영웅호걸형 정치인의 강심장은 그만 거두어야 할 때


먼저 주위의 따가운 시선에도 불구하고 수시로 골프장에 출입하는 사람들의 심사는, 첫째는 세태에 둔감하여 무감각한 경우일 것이고, 아니면 그러한 일종의 특권을 오히려 자기 신분의 과시용으로 이용하는 경우일 것이다. 산전 수전 다 겪은 노회한 정치인들이 설마 세태에 무감각할 리는 없을 터이니 그들이 골프장 회동을 감행하는 것은 후자의 경우라고 생각된다.


 


확 트인 그린필드 위에서 야망을 달구는 영웅호걸의 이미지를 타자에게 과시하고 싶었던 것일게다. “정치란 d이렇게 호쾌하게 하는 것이야.”라고 말하고 싶겠지. 정치란 정말 그렇게 호쾌하게 해야 하는 것일까? 그 정치인들이 정말 그렇게 호쾌한 영웅호걸들일까?


 


우리나라 사라들은 어려서부터 삼국지를 많이 읽고 들어와서 그런지 매사를 삼국지 스타일로 생각하는 버릇이 있는 것 같다. 특히 정치에 대해서는 더욱 그러하다. 정치인들은 자신이 과우나 장비쯤 된 덕으로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이다. 삼국지는 1500년 전, 말 달리던 중국 중원의 흘러간 옛 이야기일 뿐이다. 이 좁고 위태로운 나라에서 삼국지라니. 21세기를 코 앞에 둔 첨단 전자 시대에 삼국지라니…


 


요새 세상에 관우나 장비가 양산되다 보면 이 나라를 금방 말아먹게 될 것이 틀림없다. 그리고 TV 9시 뉴스에 나와 골프회동을 하는 후안무치가 관우, 장비의 용기와 비견될 수는 없다. 진정 관우나 장비가 현세에 출현하다면 골프장을 쟁기로 갈아 엎고 곡물을 심었으리라.


 


도대체가 어울리지가 않는다. 어울리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래서는 안되는 일이다. 아마 미국의 부시 대통령이 여름휴가를 보내는 장면을 미국방송으로 보아서 그 흉내를 냈는지는 모르겠지만, 여기는 미국이 아니다. 현하의 여러 가지 여건이 미국과는 비교할 수도 없이 열악한 우리의 입장이다. 무엇이 그리도 좋고 여유만만하다고 만면에 웃음을 띠우고 골프채를 어깨에 맨 채 잔디밭 위를 배회하는가? 우리나라 정치인들이 지금 그렇게 할 자격이 있는가? 그럴 여유가 있는가? 자문해보기를 바란다.


 


다시 한 번 얘기하거니와 나는 골프 자체를 문제 삼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정치인들이라고 해서 골프를 하지 말라는 것도 아니다. 치려면 사적으로 치라는 것이다. 국가대사를 논하는 장소로 그런 곳을 택하지 말라는 것이다. TV 9시 뉴스 화면에 그런 모습을 비쳐서 시민들에게 좌절감을 주지 말라는 것이다.


 


시민들은 겸손하게 탁자에 마주 앉아 엽차 한 잔씩을 놓고 성심을 다해 토론을 벌이는 정치인의 모습을 매스컴을 통해 접하기를 원한다. 비록 안 보이는 데서는 골프도 즐기고 양주도 마실지 모르지만 일단 시민 앞에 나설 때만은 두손 공손히 모으고 주권자 앞에 충성심을 표출하는 그런 인물을 정치지도자로 갖기를 원한다. 자기가 영웅호걸인 것처럼 착각하지 말기 바란다.


 


현대의 정치가로는 전통적 색깔의 영웅호걸형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산림훼손으로 인해 산사태가 일어나 난리인데 그 곳을 배경으로 라운딩을 하며 민생을 논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넌센스라 하겠다. 이제 영웅호걸형 정치인들의 강심장은 그만 거둘 때가 되었다고 본다. 그리고 매스컴의 기자들도 영웅주의의 노예가 되어 골프장 회동의 꽁무니를 따라 나니는 해프닝은 지양해야할 때가 되었다. 정치란 그런 것이 아니다. 과연 정치란 무엇이며 정치인이란 또 무엇인가. 시각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 필요한 시점이다.


 


(이 글은 경제정의 1991년 11, 12월 호에 실린 내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