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CEJ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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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CEJ 칼럼] 군사작전식 한미 FTA
2006.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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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마디로 ‘민주주의’란 “정당한 절차(due process)”를 말한다. ‘참여’라는 접두사가 붙으면 이해관계 당사자의 참여하에 정당한 논의 과정을 거친 의사 결정 절차라고 할 수 있다.


민주주의의 발원국인 영국 등 구미 사회에서는 3C원칙에 따른 의사 결정 과정을 불문율(不文律)로 삼고 있다. 상식(Common sense)에 비춰 판단해보고, 대화와 토론(Conference)을 거쳐 정제된 의견을 도출하며, 그마저 여의치 않을 경우 타협(Compromise)안을 만들어낸다.


지난 2일, 참여민주주의를 표방하는 우리 정부가 하루 만에 뚝딱 해치운 한ㆍ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상 개시 선언은 민주주의도, 참여정부도 아닌 ‘관료주의 행정’의 표본이다. 하루 만에 공청회를 열고 그것이 무산됐음에도 당일 대외경제장관회의에서 서둘러 협상 개시를 확정한 다음, 그 다음날(날짜로는 같은 2월2일) 아침 미 국회의사당에서 두 나라 통상교섭 대표들이 공식적으로 협상 출범을 선언했다.


참여정부가 그토록 강조해오던 ‘선대책 후협상(先對策 後協商)’은 간데온데없고 협상도 하기 전에 스크린쿼터 50% 감축과 구제역 발생 지역 쇠고기 수입 재개정책을 먼저 발표했다. 백기(白旗)를 들고 협상장에 나선 셈이다. 이로 미뤄보아 내년 3월까지의 협상 종료를 기다리지 않아도 그 결과가 뻔히 보인다. 세계무역기구(WTO) 다자간 협상이 추진되고 있는 와중에 피해만 크고 실익이 적은 한ㆍ미 FTA를 쫓기듯 추진하는 배경은 아무래도 이상하다.


이처럼 민주적 협의 및 통제 절차가 결여된 현재의 통상협상 절차와 기구 및 권한의 집중 현상은 지난 정권의 정부조직 실패 때문이다. 한ㆍ중 마늘 협상 실패, 잘못된 한ㆍ칠레 FTA 협상, 그리고 WTO 쌀 재협상 실패 등 정부가 추진해온 통상협상마다 파장을 불러일으키고 피해자를 양산했다. 사회 양극화를 부추기는 근본 원인이 다름 아닌 통상협상 조직 실패에 내재해 있다.


섣불리 무늬만 미국의 통상대표부(USTR)를 흉내내 통상교섭본부에 전권을 몰아준 결과다. 공세적인 통상외교를 펼쳐야 하는 미국과 같은 나라에서는 대통령 직속의 막강한 무역대표부가 제격이다. 하지만 미국과는 다른 열악한 산업구조와 관세구조를 가지고 있는 대부분의 나라들, 특히 수세적인 통상협상을 할 수밖에 없는 우리나라 같은 경우는 협상 권한을 해당 부서에 할애하고 각 부처로 하여금 이해당사자들과의 충분한 대화를 통해 예상되는 피해 대책까지 미리 협의해 추진하는 체제여야 한다.


지금과 같은 협상체제하에서는 역설적으로 미국ㆍ중국ㆍ유럽연합(EU)과 같은 강대국들과 국내 대기업들만이 재미를 보게 된다. 미 의회 로비스트들과 국제통상계에서는 ‘한국과의 통상협상은 청와대와 메이저 언론만 움직이면 나머지는 일사천리’라는 속삭임이 널리 퍼져 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나라 통상교섭본부에는 이해당사자들의 참여 및 협의체제가 부재하고 상의하달(上意下達) 체제만 있다. 2004년 자문위원회를 구성했으나 중소기업, 노동계, 농업계, 예술계, 시민단체 대표들은 포함되지 않았고 사후 약방문 격인 회의마저 지난 2년 동안 두 차례밖에 열리지 않았다. 미국 등 선진국에서는 협상기간 내내 이해당사자들의 의견을 충분히 반영해 교섭을 한다.


심지어 농산물 수출 다국적기업의 대표가 우루과이라운드협상 때 미 정부 협상대표직을 맡기도 했다. 우리나라에서는 대기업, 또는 경제단체들의 입김만 있고 피해산업 계층의 주장은 집단이기주의로 비하해버린다. 주객이 전도된 협상 체제는 당연히 피해 계층의 반대 시위와 충돌을 불러들인다. 게다가 교섭본부가 외교통상부에 소속돼 있다 보니 조직구성원들은 실속 없고 귀찮은 협상직보다는 해외외교관직을 선호해 교섭본부의 인사 교체가 가장 빈번하다.


진정 국익을 위해 통상협상을 제대로 하려면 근본적으로 미국처럼 통상교섭권을 국민의 대의기관인 국회가 갖고 사안에 따라 일정기간 행정부에 신속협상권한(TPA)을 위임해야 한다. 행정부의 협상 권한도 상당 부분 해당 부처에 분산돼 추진해야 한다.


통상교섭본부는 각 부처의 품목별 협상을 지원ㆍ조정하는 역할에 충실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리고 미국처럼 협상 개시 전과 협상 결과에 서명하기 각 90일 전에 국회에 통보해 자문을 받는 주권재민(主權在民), 국익재민(國益在民)의 협상 절차가 되도록 해야 한다. 최소한 권영길 민주노동당 의원 등 41명의 의원들이 공동제안한 국무총리 산하의 통상위원회 구성과 이해당사자의 참여 보장을 골자로 하는 ‘통상절차법’이라도 하루빨리 입법화돼야 할 것이다.


김성훈 경실련 공동대표 (경실련 공동대표)


* 이 글은 2월13일자 서울경제신문에도 게재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