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CEJ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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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CEJ 칼럼] 다보스 바람과 시애틀 바람을 넘어서

김영호 (국제연대이사장, 전 산자부장관)

 

 

1. <다보스 바람> 과 <시애틀 바람> 을 넘어서

 

  지금의 세계화는 스티글리츠(Stiglitz)의 지적처럼 워싱턴 컨센서스에 입각한 美國化(Americanization)라고 할 수 있다. 냉전이 끝난 후 美國의 일방주의(unilateralism)는 정치·군사·경제·금융· 문화· 환경의 모든 부문에 걸쳐 광범위하고 철저하게 관철되고 있다. 특히 경제적으로는 신자유주의의 기치하에 무역의 자유화에 이은 자본의 자유화로 나타나고 세계경제는 자본의 자유화를 탄 투기자본의 바람에 초토화되고 있다. 이러한 바람을 폴 크루그만(P. Krugman)교수는 <다보스 바람> 이라고 불렀다,

이러한 세계화의 바람에 대응하여 反세계화의 맞바람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하다. IMF와WTO에 대항하여 세계 각처에 일어나고 있는 反세계화의 바람을 크루그만 교수는 <시애틀바람> 이라고 불렀다. 反세계화 운동가들이 시애틀에 집결하여 1999년 IMF·WB 의 총회를 박살낸 시애틀 행동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크루그만 교수는 오늘날 시애틀 바람이 다보스 바람을 압도하고 있다고 평가한다.

사실 작년 스위스의 다보스에서 열린 세계경제포럼회의는 삼엄한 경찰의 호위속에 별다른 울림없이 끝나고 말았지만, 같은 날 브라질에서 열린 세계사회포럼회의는 수만명의 反세계화 운동가들의 열광속에 큰 울림을 남기면서 끝났다. 그리고 아이러니 하게도 작년과 금년에 걸쳐 미국 신경제의 주역들의 , 대부분들이 회계부정사건의 주역으로 지탄을 받으면서 신자유주의의 깃발은 투자가들의 不信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反세계화바람, 혹은 시애틀바람의 승리로 끝날 것인가 하는 것은 별개 문제이다. 스티글리츠의 지적처럼 세계화의 방법과 과정에 문제가 있는 것이지, 세계화 그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이미 인터넷은 시민사회의 기본적인 인프라로 활용되고 있으며, 인터넷을 이용한 시민운동과 기업활동은 불회귀점(point of return)을 통과한지 오래다.
<국경없는 의사> 나 <국경없는 구호활동>을 넘어 <국경없는 시민사회>가 현실화되고 있다.

 

2. <서울바람>
이제는<다보스바람> 과 <시애틀바람>을 넘어선 제3의 새로운 바람이 일어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우리는 그것이 <서울바람> 이기를 바란다. 사실 본인을 그것을 국채보상운동에 기반을 둔 <대구바람> 이라고 불러본 적이 있지만, 그러나 국채보상운동 역시 서울에서 본격적으로 꽃피워졌던 것을 생각하면 오히려 <서울바람> 이라고 해도 좋다고 생각한다.

서울 바람은 한마디로 <세계화의 세계화 바람> 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세계화가 미국화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각국-각지역의 주체적 참여에 의한 다양성이 조화를 이루는 세계화를 의미한다. 이창동감독의 말을 인용하면 “헐리우드적인 큰 音聲의 스피커에 의한 지배가 아니라 세계의 작은 목소리에 서로 귀를 기울이는” 상태를 말한다.
<역사의 종말> 을 섰던 후쿠야마(F. Hukuyama)교수는 최근 미-유럽의 정치적·문화적 갈등을 <역사의 시작> 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脫美國化 혹은 미국 일방주의에 대한 저항은 서유럽에서만 일어나고 있는 것이 아니다. 中東에서도 일어나고있고, 아프리카에서도 일어나고 있으며, 동아시아에서도 일어나고 있다.
그리고 지금 동북아에서는 北의 핵개발문제를 중심으로 한 미국의 일방주의와 南北韓·北日·韓中·北中 間의 동북아의 역내의 포용정책이 수면하에서 불꽃 튀기는 마찰을 빚고 있는 것 같다.

<세계화 = 미국화> 의 등식은 이미 수면하에서는 께지고 잇다. 그러나 아직도 수면위에 제도적으로 나타나지 못하고 있다. <역사의 시작> 은 이러한 수면하의 거대한 움직임이 수면위에 시스템으로 나타나면서 일어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수면하의 거대한 물살은 결국 세계시민사회의 다양한 움직임이다. 그것은 김춘수 詩人의 詩語를 빌린다면 <이름을 불러주기까지에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는다> 라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세계시민사회의 여러 <작은> 목소리들은 어떻게 북돋우고 모아글로벌 시빌 컨센서스 (Global Civil Consensus)로 집약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워싱턴 컨센서스를 글로벌 시빌 컨센서스로 바꿀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글로벌 시빌 컨센서스에 기초한 세계화야말로 워싱턴 컨센서스에 기초한 세계화를 극복할 <세계화의 세계화> 이며, 진정한 <역사의 시작> 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그러한 제3의 바람에 참여하는 것을 <서울바람> 이라고 생각하며, 함께 가면서 새로운 가능성을 키우고 새로운 비전을 던지면서 이니시어티브(initiative)를 살리는 것을 <서울바람> 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3. 동아시아 시민 컨센서스
유럽시민혁명은, 신산업혁명을 거치면서 제국주의로 이어졌던 것은 주지하는 바와 같다. 그러나 서구시민사회는 제2차세계대전 후 국외 노동자·농민을 중산층화 함으로써 해외 식민지 시장 없이 국내시장확대로 실업 없는 성자의 길을 걸어갔고, EU규모로 그것을 실현시켜 나갔다.

동아시아는 시민혁명 없이 산업화를 촉진하고 일정한 산업화의 결과 중산층이 형성되고 중산층이 정치적·사회적으로 성숙하면서 시민사회가 성장하고 있다. 사실 동아시아라고 할지라도 지리적·인종적으로만 존재할 뿐이고, 고대문화유산 즉 유고·불교문화나 한자문화를 공유할 뿐이었다.
중세 동아시아는 중국의 거대한 中華主義 무대였고, 근대 동아시아는 日本帝國主義 의 수렵장이었으면, 전후에는 美蘇냉전의 주무대였다.
중국의 아시아, 일본의 아시아, 그리고 美蘇냉전의 아시아라는 그늘 속에 동아시아의 동아시아는 없었던 것이다.

냉전이 끝나면서 동아시아 역내무역이 증가하여 이제 역내 무역결합도가 50%를 훨씬 넘어가고 있으면 투자와 시장의 결합도가 더욱 높아져 가고 있다. 그리고 중산층을 중심으로 역내 교류협역이 크게 확대되면서 동아시아 FTA도 모색되고 있다. 역사상 처음으로 사회적 아시아(social Asia)혹은 시민적 아시아(civil Asia)가 형성되어 가고 있다. 사회적 의미의 아시아는 이제 겨우 형성되려 하고 있는 것이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세계시장은 각지역 경제통합체를 통하여 형성되어 가고 있다. 지금은 지역경제통합을 통한 세계경제형성기라고 해도 좋다. 그런 점에서 세계 컨센서스의 형성 역시 각 지역 시민 컨센서스의 형성을 통하여 형성될지도 모른다. 사실 지역시민의 공통의 목소리가 아니고서는 위싱턴 컨센서스의 소리에 묻혀 버릴지도 모른다.
우리는 동아시아에 있어서 한국의 민주주의 , 한국의 시민사회가 선두에서 있다고 느끼고 있다. 그런 점에서는 동아시아 시빌 컨센서스의 형성에도 한국의 시민사회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다. 우리가 <서울바람> 이라고 한 것도 그와 무관하지 않다.

 

4. 윤리의 전환
우리는 동아시아 시민 컨센서스의 형성에 앞장서면서 세계 각지의 중요NGO와 유대 협력을 통하여 세계 시민 컨센서스를 집약하는 기술적 시스템적 틀을 개발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기초로 타깃을 구체화하면서 발언권을 높여야 할 것이다.
세계는 이제 정치·군사 주도의 세계화에서 자본 금융 주도의 세계화를 거쳐, 시민주도의 세계화의 출발점에 서 있다. 그것은 인터넷을 비롯한 IT기술의 혁신에 의하여 가속화된 것이지만 기본적으로는 각국의 시민사회의 성숙과 그 속의 세계의식의 성숙에 의한 것이며, 근대주의 국가주의의 쇠퇴와 졸업에 따른 것이기도 하다.

 

시장과 자본주도의 세계화는 무한경쟁의 원칙이 강조되었으나. 시민주도의 세계화는 무한협력의 원칙이 강조되고 있다. <修身 후에 濟家하고. 濟家후에 治國하고 治國후에 平天下> 할 것이 아니라 <平天下 한후 治國하고 濟家> 하는 새로운 순서가 필요하며, <平天下> 하는 시민윤리 속에 <修身> 하는 윤리의 전환이 필요하다. 경실련의 국제연대는 이러한 역사의 시작 문턱에 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