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CEJ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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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CEJ 칼럼] [문화산책]닉 드레이크의 생애와 음악
정택수 사회정책팀 수습간사
wildwylde@ccej.or.kr
가을이 언제 왔었는지도 모르게 어느덧 완연한 겨울이 되었습니다. 갑작스레 불어 닥친 호된 추위에 ‘겨울은 죽음의 계절’이란 말을 절로 떠올리게 되는 것 같습니다. 11월은 짧은 가을이 끝나고 겨울로 들어가는 문턱이자 많은 젊은 뮤지션들이 세상을 떠난 달이기도 합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이름인 김현식, 유재하를 비롯해 록밴드 퀸의 보컬 프레디 머큐리와 원맨밴드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 이진원도 11월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가을단풍처럼 아름다운 흔적을 세상에 남기고는 스치듯 세상을 떠난 이들 가운데 오늘은 요즘과 가장 잘 어울릴 것 같은 음악의 주인공, ‘닉 드레이크’를 소개해드릴까 합니다. 
그의 이름은 불과 수년 전만 하더라도 소위 아는 사람만 아는 이름이었는데 요즘은 인터넷을 잠시만 검색해보아도 그에 대한 정보를 쉽게 얻을 수 있게 되었더군요. 이 글로나마 미처 그에 대해 모르셨던 분들도 그의 음악을 찾아듣게 되는 계기가 되길 바라며 글을 시작해볼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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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의 작품이 금세 찬탄을 받기가 어려운 것은, 그것을 쓴 천재 자신이 상규에 벗어나고 거의 모든 사람이 그와 비슷하지 않기 때문이다. 작품을 이해할 줄 아는 뛰어난 정신의 소유자를 만들어내며, 그것을 길러내고 증식시키는 것은 그 작품 자체이다. 베토벤의 사중주곡(제12·13·14·15번)은, 그것을 이해하는 대중을 낳아 기르는 데에 50년이 걸렸다.’
-마르셸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中
닉 드레이크는 영국 중부지역에 위치한 워릭셔라는 시골마을 출신입니다. 닉은 어릴 적부터 혼자 놀기 좋아하는 몹시 내성적이고 우울한 성격의 아이였습니다. 하지만 예술에 대한 관심이 높은 집안 분위기 덕에 여러 가지 악기들을 배우며 음악가로서의 꿈을 키울 수가 있었습니다. 어린 닉은 클래식을 너무나 좋아하여 가족들은 그가 훗날 명지휘자가 되리라고 생각했다는군요. 공부뿐만 아니라 운동에도 두각을 나타냈던 닉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영국 최고의 명문인 케임브리지 대학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나 대학 진학 후 기타에 빠져, 연주에 몰두하다가 수업을 빠지기 일쑤였다고 합니다. 그러던 닉에게 뜻하지 않게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친구와 자신의 자작곡을 다듬어 가며 연습하던 중 마침내 자신의 곡을 대중 앞에서 연주할 수 있는 기회를 잡게 된 것입니다. 닉의 음악은 많은 관중을 매료시켰는데 마침 그 속에는 밴드 ‘페어포트 컨벤션’의 베이시스트 애슐리 허칭스도 섞여있었습니다. 닉의 음악에 감동을 받은 애슐리는 그 길로 닉을 자신들의 프로듀서인 조 보이드에게 소개해 줍니다. 조는 프로덕션 사장일 뿐 아니라 프로듀서로서 제법 명망 있는 인물로서 닉이 가수로 데뷔할 수 있도록 전폭적인 지지를 해주었습니다. 
시대를 잘못 만난 천재성, 거듭되는 좌절 
1969년, 기대 속에 탄생한 닉 드레이크의 데뷔작 는 포크음악과 클래식의 조화를 시도한 앨범이었습니다. 총 10곡으로 이루어진 이 앨범은 여리고 섬세한 감수성으로 점철되어있습니다. 그의 음악을 들을 때면 꾸밈없이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에 놀라게 되는데, 음악이 만든 이의 내면의 반영물임을 감안하면 닉 드레이크만큼 순수한 영혼을 지닌 사람도 없을 거란 생각이 들게 합니다. 이토록 섬세한 감수성은 닉의 모든 작품에서 공통된 특징으로서 이 첫 번째 앨범에서는 극도의 우울함의 형태로 표출됩니다. 하지만 그 우울함은 결코 절망적인 우울함이 아니라 눈물을 흘리고 난 후와 같은 정화감을 듣는 이에게 선사합니다. 이토록 훌륭한 음반임에도 불구하고 닉의 첫 번째 음반은 대중으로부터 철저하게 외면을 받습니다. 음악적으로 비틀즈와 롤링 스톤즈 류의 록 사운드가 득세하고, 히피문화로 대표되는 자유와 저항의 정신이 젊은이들 사이에 들끓던 시대에 유려한 포크음악이 비집고 들어갈 틈새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일부 평론가들은 그의 음악에 호의적인 평을 보내기도 하였지만 그들조차 이 음반을 어떻게 알려야 할지 당혹스러워했습니다. 필연적이었던 첫 음반의 상업적 실패에 닉은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고 맙니다. 흥행실패 가수가 된 닉은 선술집을 전전하며 공연을 하지만, 그의 음악을 이해할리 없는 취객들의 틈바구니에서 그는 더욱 큰 상심에 빠지고 맙니다. 그의 정신상태는 점점 불안해져 공연도중 무대를 뛰쳐 내려오기도 하였으며, 신장결석까지 생기면서 그의 정신과 육체는 점차 최악의 상태를 향해 가기 시작합니다.
이토록 어려운 상황 속에서 닉의 두 번째 앨범 가 탄생합니다. 지난 앨범의 실패를 이겨내고자 절치부심 끝에 탄생한 새 음반은 전작보다 한층 밝으면서도 여전한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첫 번째 음반보다 두 번째 음반을 더 높게 평가하는데, 전작의 우울한 정서를 극복하면서도 작품성에서는 여전히 최고수준의 음악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대중음악을 비롯한 모든 예술을 하는 사람에게 스타일을 바꾼다는 것은 도박과도 같은 일입니다. 자칫 변화에 실패할 경우 ‘대중을 위해’라는 명목은 퇴색되어 버리고 조롱만이 뒤를 따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청자는 때론 변화 자체만으로도 성과를 인정해야 할 때가 생기는데, 닉드레이크의 경우 변화와 작품성이라는 두 과제를 너무나도 훌륭히 수행해낸 것입니다. 음악적으로도 재즈적인 리듬을 도입하는 등 다양성을 높이는 한편 벨벳언더그라운드의 존 케일, 페어포트 컨벤션 등 동료들의 지원도 앨범의 완성도를 높이는데 큰 공헌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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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적인 삶에도 음악만은 영원히 남아
하지만 두 번째 작품은 흥행에 참패할 뿐 아니라 비평에서도 거의 조롱에 가까운 모욕을 당하고 맙니다. 이에 완전히 낙심한 닉은 하루 종일 두문불출하며 마리화나만 피워댔으며, 밤이면 잠을 이루기 위해 항우울제에 의존하기 시작합니다. 설상가상으로 프로듀서인 조 보이드마저 프로덕션을 정리하고 미국으로 떠나버리면서 그의 주변엔 아무런 지원도 남지 않은 상태가 되고 맙니다. 닉은 이를 인간적인 배신이라 여기며 더욱 깊은 좌절에 빠지게 됩니다. 약물에 의존하여 하루하루를 겨우 버티던 닉은 마지막으로 음반 엔지니어링을 맡아주었던 존 우드를 찾아가 녹음을 부탁합니다. 존과 닉 두 사람의 힘만으로 불과 이틀 만에 만들어진 앨범 은 오직 닉의 목소리와 기타 한 대의 연주로만 채워져 있습니다.(타이틀곡에서 피아노연주가 아주 잠깐 등장하지만 큰 의미를 두기엔 어렵습니다)
물리적으로 봤을 때도 은 한 곡의 길이가 거의 3분을 넘지 않으며 전체 길이도 불과 30분이 채 되지 않는 매우 짧은 앨범입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부족함이라곤 전혀 느껴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여백이 아름다운 앨범이 되었습니다. 이 앨범 속에는 닉이 그동안 겪었을 세상에 대한 상심이, 절망이나 염세가 아닌 깊이 있는 아름다움으로 승화되어 담겨졌습니다. 혹자에 의해선 닉 드레이크 최고의 앨범으로 꼽힐 만큼 새로운 걸작이 탄생한 것이었습니다. 
닉은 어렵게 탄생한 이 결과물을 아일랜드 레코드사의 프런트에 던져놓고 나오는데, 이 마스터 테잎이 몇 주 동안 방치되면서 하마터면 소실될 뻔 했다고 합니다. 마지막 녹음을 마치고 난 닉은 피폐해진 몸을 이끌고 발길을 부모님이 계신 시골마을로 돌립니다. 어머니의 보살핌에도 여전히 회복에 실패한 닉은 결국 정신병원을 오가는 지경에 이릅니다. 그리고 악몽 같은 시간이 몇 년 흐른 뒤에야 닉은 새로운 음반에 대한 의지를 조금씩 보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미처 그 의지를 제대로 실현해보기도 전인 1974년 어느 날 아침, 닉은 침대 위에서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됩니다. 사인은 항우울제의 일종인 트립티졸 과다복용. 그의 침대 맡에는 전 여자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와 까뮈의 <시지프 신화> 한 권이 놓여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가 진정 자살한 것인지, 아니면 약물로 인한 사고사 인지는 영원한 미제로 남고 말게 되었습니다. 
그의 죽음은 후대에 의해 닉 드레이크라는 이름이 재발견되기 전까지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 뉴스였습니다. 훗날 그의 팬들은 닉이 첫 번째 음반가 발매된 지 5년 만에 사망한 점에 주목하여, 이 앨범 이름이 오 헨리의 단편 <마지막 잎새>에서 가져온 것이며 일종의 유언장으로 쓰여진 앨범이라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가 앨범의 제목을 실제 이런 예언적인 의미로 사용했는지의 여부를 떠나 그의 삶과 음악은 무명 천재음악가에 대한 경외감을 느끼게 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어쩌면 그는 후대에 많은 이들이 자신을 칭송하는 것을 보고 저승에서 프루스트의 이 글귀를 곱씹고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천재는 대중이 인정해주지 않아도 초연히 이렇게 혼잣말을 할 것입니다.
‘동시대의 인간에게는 필요한 감상 거리가 결여되어 있다. 어떤 그림은 너무 가까이 가면 감상을 그르치듯이 후세를 위하여 쓴 작품은 후세에 의하여서만 읽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