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보다 정의롭고 모두가 행복한 미래사회를 위해 달리는 경실련의 최근 이야기를 한자리에 모았습니다.
[복지] ‘빈곤과의 전쟁’을 선포하십시오.

가장 먼저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말씀부터 드리겠습니다.


올 여름, 가난 때문에 목숨을 버려야만 했던 사람들이 우리의 마음을 참담하게 했습니다. 우리나라에 굶어 죽는 사람은 더 이상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배고픔보다 더욱 견디기 어려운 것이 바로 희망이 보이지 않는 삶, 빚더미와 가난밖에 물려줄 것이 없는 ‘절망’이었습니다.


우리는 대통령님이 서민들의 고통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실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가난 때문에 자살한 사람들의 영전에 함께 머리를 숙이고 이제 더 이상 가난으로 죽어가는 사람이 없게 하겠다는 의지를 국민들에게 보여줄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대통령님을 비롯한 정부는 가난한 사람들이 죽음으로 항거하고 있는 벼랑끝 상황에 대처함에 있어 사안의 긴급성과 근본적 원인을 인식하지 못한 한계를 보였습니다.



빈곤은 심화되었으나 기초보장 수급자는 감소


자살사건이 끊이질 않자 정부는 두 차례의 대책을 발표했습니다. 「8.4 긴급대책」, 「9.3 빈곤층 사회안전망 강화대책」입니다. 언뜻 보면 많은 내용을 담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 이 두 대책의 핵심은 새로운 것이라기 보다는 이미 시행되고 있는 기초생활보장제도의 대상을 발굴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기초생활보장제도의 수급자 수는 해마다 감소하여 왔습니다. 아마도 이번 일련의 자살사건이 없었다면 그런 추세는 계속되었을 지도 모릅니다. 2000년 10월 제도 시행 초기에 148만8천명이었던 수급자가 2003년 3월에는 134만6천명으로 줄었습니다. 빈부격차가 심화되고, 신용불량자, working poor(근로빈민), 실직자들은 줄지 않고 있는데, 수급자 수는 거꾸로 줄고 있었습니다.


기초생활보장법이 최저생계를 보장받을 자격을 ‘국민의 권리’로 인정한 것이라 해도, 사실 수급자의 규모와 급여수준은 정부의 의지대로 충분히 조정할 수 있습니다. 이를 규정하고 있는 것이 복지부의 지침이기 때문입니다. 수급자 감소 추이도 정부의 의지가 반영된 결과이고, 이는 일련의 자살사건이 사회문제화 된 이후인 8~10월 일제조사를 통해 수급자 수를 5만명 늘인 것을 통해서도 확인됩니다. 그동안 빡빡한 수급자 선정기준을 유지하면서 수급자 수의 감소를 초래하여 놓고, 그 기준은 완화하지 않은 채 수급자 발굴을 하겠다는 것을 빈곤대책이라 내 놓은 것은 ‘조삼모사’식으로 국민을 우롱하는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복지부 지침만 개선해도 많은 문제 해결 가능


정부가 인정하는 공식 빈민, 즉 기초생활보장 수급자가 되는 것은 굉장히 어렵습니다. 기준이 지나치게 까다로워 소득이 최저생계비 이하 수준임에도 수급자가 되지 못하는 가구가 130만명에 이른다고 추정되고 있고 정부도 이를 인정하고 있습니다. 혼자 사는 손자가 86만원 정도 소득이 있으면 홀로 사는 할머니가 소득이 없더라도 수급자가 될 수 없는 것이 부양의무자 기준의 현실이며, 10년 넘지 않은 자동차 한 대만 있으면 차량가격이 월소득으로 100% 고스란히 반영되는 것이 재산소득환산율의 현실입니다.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지 않은 채 현행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를 빈곤대책의 중심에 놓는다는 것은 바늘구멍을 통과하지 못한 사람들을 여전히 사각지대에 방치하겠다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한편으로 수급자와 유사한 생활수준에 있는 차상위 빈곤계층이 최소한 170만명에 달합니다. 이들이 빈곤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을 기다렸다가 수급자가 되면 비로소 각종 급여를 주겠다는 것은 ‘뒷북’식 지원입니다. 이들이 빈곤에서 탈피할 수 있도록 의료나 교육 등의 급여를 지급하는 것이 체계적인 지원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복지부는 안타깝게도 차상위 빈곤계층의 규모와 대상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차상위 빈곤계층 의료지원 예산확보에 있어서도 규모파악이 미비하여 기획예산처를 설득해 내지 못하고, 애초 올린 예산액의 일부분만 예산에 반영되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만2천명 차상위 빈곤계층에 대한 의료급여를 따 낸 것이 대단히 큰 성과라고 자평하며 마치 큰 개가를 올린 것처럼 판단하는 복지부가 기초생활보장제도의 주무부서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다고 판단할 수 있겠습니까?


지침상의 개선도 이루어내지 못하는 복지부가 300만명이 넘는 방치된 빈곤층을 위해 기초생활보장법을 과감히 개정하고 여타 수당제도를 이에 걸맞게 수정?보완함으로써 탈빈곤을 위한 개혁작업에 앞장 설 수 있을까요? 저희가 복지부 장관을 불신임하게 되는 것도 바로 그가 이러한 개혁작업에 대한 필요성을 확고히 인식하고 청사진을 제시하며 복지부 관료들을 독려하고 여타 부처와 관련분야를 설득해 나가야 하는 모습을 전혀 보이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복지부 장관의 빈곤문제에 대한 청사진과 의지 읽을 수 없어


물론 차상위계층 등 빈곤계층에 대한 지원 의지는 복지부뿐만이 아니라 범정부 차원에서 결의되어야 합니다.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가 빈곤계층 지원의 유일한 해답이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들의 다수가 ‘일하는’ 빈곤층이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들도 놀고먹는 빈곤층이 아니었습니다. 고용불안에 시달리는 비정규노동자 가구였습니다. 비정규노동자와 정규직 노동자의 임금격차가 크게 벌어지고 있고, 최저임금이 곧 자신의 임금이 되는 경우가 늘고 있습니다. 그러나 최저임금 수준을 현실화하여야 한다는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못했고, 최저임금위원회의 파행을 낳았습니다. 우리 사회의 문제는 ‘놀고 먹는 빈곤층’을 어떻게 막을 것인가가 아니라 ‘일하는데도 빈곤한 사람들’을 어떻게 지원할 것인가입니다.


대통령님. 우리 사회는 지난 40년 간 고속의 경제성장을 해 왔습니다. 국민들도, 정부도 모두 거기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그러기에 아직도 국민은 빈곤이 빈곤층 자신의 문제이며 책임이라고 냉랭하게 바라보고 있으며, 정부 역시 경제정책을 통한 성장률의 제고만이 빈곤을 해결하는 길이라고 전제하는 경향이 농후합니다. 그러나 이제는 좀 더 멀리 내다보고 지속가능한 성장과 발전을 위해 지금 우리가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 짚어봐야 할 때입니다. 대통령님 재임 기간에 경제지표가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에 너무 연연해 하지 마십시오. 사회안전망을 보다 공고히 하고 분배구조를 개혁하는 것이 미래의 성장을 담보하는 유일한 길이 아니겠습니까? 현재의 빈곤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사회안전망에 대한 대대적 개혁을 꾀하는 일에 중심을 두었다고 경제가 곧바로 무너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빈곤문제로 평생을 고통받거나 그 자식에게 까지 빈곤이 대물림되고 심지어 가족 모두가 비관 자살하는 등 각종 사회 갈등이 유발됨으로써 미래에 일어날 사회적 비용을 고려해 볼 때 장기적으로는 경제를 굳건히 하는 지름길일 수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인식하에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와 기타 저소득층 지원정책, 국민연금 등 기존의 소득보장시스템을 과감히 개혁하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그러나 물론 이것만으로 해결될 수는 없습니다. 신빈곤 문제를 해결하는 과제는 보건복지 분야를 넘어선 것입니다. 현재의 상황을 IMF 경제위기때와 같은 국가위기의 상황으로 인식하고 정부의 사회정책의 목표를 분명히 세우고, 소득보장제도와 사회정책 전반의 새로운 틀을 짜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더 늦기 전에 ‘빈곤과의 전쟁’을 선포하십시오. 복지 뿐 아니라 경제와 노동, 교육 등 정부부처 모두가 함께 빈곤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부 정책이 어떤 변화를 도모해야 하는지 고민해 주십시오.


이것이 국민들이 대통령에게 건 처음의 기대였습니다.


새롭게 출발하는 마음으로 국민들의 요구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2003년 11월 20일


건강권실현을위한보건의료단체연합 건강세상네트워크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민주노총 참여연대 한국노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