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동가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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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가이야기] [서평] 폭력과 그 구조의 계보학
2011.0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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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라르(R. Girard)의 『폭력과 성스러움』



박성진 부동산·국책사업팀 간사





『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로 인간의 욕망을 탐구했던 ‘지라르’는 인간 욕망에 의한 폭력의 구조를 사회학적 그리고 인류학적 시각에서 재해석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결과물로 나온 책이 바로『폭력과 성스러움』이다. 이 책은 폭력과 희생물 등을 분석함으로써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폭력 분석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공하고 있다.

폭력과 성스러움, 즉 폭력과 종교적 제의 사이의 관계를 통해 인류사에 내재되어 있던 폭력과 희생에 대해 설명하고 폭력이 성스러움과 결합되면서 인류가 어떻게 질서를 유지했으며 무한한 복수의 반복을 제어했는지를 보여준다. 지라르의 분석에 따르면, 사회에 혼란이 도래했을 때 사회는 희생물 혹은 제물을 찾는다. 그리고 그것은 제의의 과정에서 사회의 구성원들 앞에서 죽는다. 붉은 피를 보이며 구성원들 앞에서 생명은 제거된다.

이 폭력의 장면 앞에서 혼란스러움으로 인해 내재화된 사회적 폭력은 그 욕망을 해소하고 안정을 찾는다. 그리고 제의과정에서의 폭력은 폭력이 아닌 성스러움으로 인식되고 희생물 또한 성스러운 것으로 재창조 된다. 인류는 이러한 과정의 반복 속에서 질서를 유지했으며, 무차별적인 폭력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해왔다.

지라르의 분석은 정밀하고 치밀하다. 다양한 사례와 신화 속에 나타난 모습들을 설명하며 자신의 이론을 정립해 나아간다. 하지만 1972년에 나온 이 이론이 다양하게 그리고 무차별적으로 진화하는 폭력의 모습을 충분히 설명할 수 있을지는 의심스러운 일이다.

속임과 드러냄

우리는 너무나 심한 고통을 느낄 때 흔히 진통제를 복용한다. 진통제를 복용함으로써 우리는 통증의 완화를 경험하거나 통증을 고통으로 인식하지 못한다. 이러한 일종의 마취술은 통증을, 고통을 속이고 있다. 통증의 속임 혹은 고통의 속임이다.

지라르가 폭력 분석 과정에서 제시하는 ‘폭력 속임’도 진통제와 같은 구조를 가지고 있다. 폭력은 희생을 필요로 하고 대체물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통증 혹은 고통의 속임과는 약간은 다른 점이 있기는 하지만 폭력을 폭력으로 인식하지 못하게 하고 심지어 폭력을 성스러운 과정으로 인식하게 하는 것에서 폭력의 속임은 진통제로 고통을 속이는 것과 같은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우리가 진통제 복용으로 인하여 편안함을 느끼면서 진통제의 효용성을 발견하는 것처럼 지라르 역시 사회․인류학적 시각에서 폭력 속임의 긍정성을 발견 한다. 폭력 속임은 종교와 연결된 희생제의를 통하여 이루어진다. 지라르는 바로 이 희생제의의 실제적 기능을 이야기 하면서 폭력 속임을 긍정하고 있으며, 종교와 연결된 희생제의의 긍정을 통해 종교적, 휴머니즘적인 모든 종류의 초월성을 긍정하는 것으로 나아가고 있다.

지라르의 긍정은 정당한 것처럼 보인다. 공동체 내부의 발전과 분쟁의 씨앗을 제거해주고 복수의 악순환과 같은 폭력의 사태로부터 사회 구성원을 보호한다는 측면에서 지라르의 주장은 설득력이 있다. 폭력과 성스러움의 관계를 바라보며 종교와 초월성을 긍정하는 것이 사회에 더 좋게 작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라르는 폭력 속임의 또 다른 한 가지 성질을 놓치고 있다. 폭력을 폭력으로 인식하게 하지 않고 오히려 성스럽게 만드는 속임, 그리고 ‘제의적 불순’이라는 개념을 만들어 폭력의 전염성을 예방하고자 하는 속임과 더불어 폭력 속임은 성직자들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속임 또한 함의하고 있다.

신화와 제의의 기원에 관한 분석은 지라르가 이야기한 폭력 속임만으로도 설명이 가능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종교와 제의적 문화가 발전할수록, 제의를 담당하는 성직자의 기능이 중요시 될수록 희생제의는 폭력의 또 다른 속임을 가지기 시작한다. 성직자들 혹은 종교는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하여 희생제의를 이용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성직자들은 사람들이 성스럽다고 여기는 행위들을 지속적으로 보여줌으로써 지라르가 분석한 희생제의의 순기능을 기대함과 동시에 그러한 성스러운 행위를 하는 자신의 권위와 종교의 권력을 계속해서 유지하려 했다.

지라르는 종교가 폭력 속임 즉 희생제의를 통해서 비폭력의 사회를 꿈꾸고 있다고 말하지만 종교는 비폭력의 사회를 결코 꿈꾸지 않는다. 폭력이 사라진다면 종교 자신도 사라지기 때문에, 종교는 희생제의를 통해 비폭력 사회를 꿈꾸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종교는 그것을 통해 자신 이외의 폭력 사용을 억제(지라르가 말한 희생제의의 순기능)해가며 자신의 권력을 유지함과 동시에 종교 자신의 존재 기반인 폭력 사회를 계속 유지해 가려고 있다. 종교는 폭력사회의 유지에 역기능으로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순기능으로 작용하는 성격도 폭력 속임 안에 동시에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지라르가 말한 종교적, 휴머니즘적인 모든 초월성의 긍정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다시 진통제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우리는 통증 혹은 고통을 속이기 위해 진통제를 복용한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진통제를 복용함으로써 고통을 속이는 것이다. 그러나 진통제는 우리에게 약간의 편안함을 주겠지만 결코 치료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진통제는 아픔을 느끼지 못하게 함으로써 치료에 방해가 되기도 하며 병을 더 악화시키기도 한다. 우리의 몸이 병들었을 때 그 병의 치료를 위해서는 반드시 아픔이 있어야 한다. 아픔은 치료를 위해 필요한 과정이다. 고통이나 통증이 왔을 때 그 고통을 피하지 않고, 속이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여 느끼는 것이 치료의 가장 빠르고 효과적인 방법인 것이다.

희생 제의를 통한 폭력 속임도 위의 경우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폭력 속임이 치료의 차원이 아니라 예방의 차원이라고 하더라도 속임을 통한 예방은 인류에게 결코 폭력의 면역체계를 만들어주지 못할 것이다. 속임은 아픔을 느끼게 하지 못함으로 영구적 면역체계를 생산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제는 속임의 방식이 아니라 확연히 드러냄의 방식을 취하는 것은 어떨까. 종교적이고 초월적인 것을 모두 걷어 버리고, 성스러움이라는 위장막을 걷어버리고 폭력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보는 것은 어떨까. 드러냄의 과정에서 인류에게 큰 공포와 아픔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고통은 결국 인류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까. 아직 한 번도 종교적이고 초월적인 속임에서 벗어난 적이 없는 인류에게 이러한 속임에서 벗어나기 위한 고통은 그것만으로도 도움이 될 것이다. 종교적이고 초월적인 장막을 걷어내고 폭력을 있는 그대로 인식했을 때 우리에게는 고통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고통은 그것이 가진 무게만큼의 긍정적 에너지를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진화하는 폭력, 폭력의 구조화

지라르의 분석은 인류역사 대부분의 기간을 충실히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물리적 폭력에 대한 극단적 거부를 보이며 폭력 그 자체를 절대 악으로 보는 현대 사회의 폭력 구조에 대해서 지라르의 이론이 적용될 수 있는지는 의심스러운 일이다.

인류는 근대를 경험하면서 물리적 폭력에 대해 거부하기 시작했다. 따라서 폭력은 산업화되고 구조화되어 그 모습을 스스로 변화시켜오고 있다. 예를 들어, 현대인들은 자신의 육체적 힘을 이용하여 조우한 적의 심장에 칼을 밀어 넣어 적의 죽음을 근육으로 온전히 느끼고 그의 검붉은 피가 사방에 퍼지는 모습을 싫어한다.
대신 현대인들은 단추하나를 이용하여 수백, 수천의 적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기를 선호한다. 전자는 야만이며 잔인함이고 후자는 산업의 발전이다. 또한 폭력은 자본주의와 만나면서 물리적 무기보다는 구조적 무기를 선호하게 되었다. 법, 제도, 사회구조, 자본 등을 무기로 다양한 희생자들을 생산하고 대량의 죽음을 양산한다. 이 과정에서 사람들은 폭력을 폭력으로 인식하지도 못하고 희생자들은 성스러움은커녕 단순한 죽음으로 치부되어 진다.

폭력이 다양한 모습을 보이며 진화하고, 스스로 그 모습을 드러내기도 하고 숨기기도 하는 상황에서 지라르의 분석이 현대사회의 폭력 구조를 설명하기에 버거운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의 이론이 의미가 없는 것은 결코 아니다. 현대 사회는 아직도 수많은 희생을 원하고 있으며, 인류의 폭력 욕망은 아직도 대체물들을 찾아 헤매고 있기 때문이다. 폭력의 다양함과 복잡함을 인식하며 지라르의 코드를 적용한다면 모두는 아니더라도 현대사회의 수많은 폭력 구조의 의미를 분석할 수 있을 것이다.  

지라르의 폭력과 제의에 대한 분석은 우리에게 현대 사회 속에서 폭력과 희생을 보는 새로운 시각을 제공하고 있다. 그의 분석은 초월성에 의존한다는 점에서 여러 가지 문제점을 보이며 진화된 폭력을 설명하기에 한계점이 있기는 하지만 폭력과 성스러움의 관계는 현대 사회에서 아직도 진행형이다. 시대는 계속해서 폭력과 희생자를 생산하고 있다. 그리고 멈출 것 같지도 않다. 그 한가운데 『폭력과 성스러움』라는 한권의 책이 놓여 있다.     

※이 기사는 월간 경실련 3~4월호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