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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CEJ 칼럼] 세월호참사 200일, 시민으로서의 삶_김범 대학생
2014.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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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참사 200일, 시민으로서의 삶
-구조적 부정의와 시민의 책임에 관하여-

                                                

김 범 
대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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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회적 전환기에 최대 비극은 악한 사람들의 거친 아우성이 아니라 선한 사람들의 소름끼치는 침묵이다.

 -마틴 루터 킹-

「세상은 변한 게 없고, 시간은 흐르고 있고..나만 혼자 이렇게 달라져 있다.」 어딘가에서 들었던 슬픈 유행가 가사가 나의 심정을 이렇게 잘 나타낼 줄 몰랐다. 나뿐만 아니라 4월, 지옥 같았던 대 참사의 아픔을 공유하는 사람들이라면 한번쯤 느낄 법한 감정이다. 이 감정은 연인과 이별의 슬픔을 얘기한 특정인에게 해당되는 사안은 아니다. 사랑하는 이를 잃었지만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던, 그래서 힘들었던 모든 사람들의 아픔이다.
 
세상은 변한 게 없었다. 3달 뒤 열렸던 보궐 선거에는 ‘심판’, ‘변화’, ‘인간’과 같은 프레임이 등장했다. 신자유주의의 맹목적 이윤추구 논리를 벗어나 ‘인간’ 삶의 질을 높이자는 것이었다. 그럴 듯 했다. 이 논리는 자연스레 복지 대신 성장을, 형평 대신 효율을 주장하는 정치 집단에 대한 ‘심판’론으로 이어 졌다. 수십 명의 학생들이 희생당했고, 지금도 바다 어딘가에 있는 ‘이 상황’이 비정상적이라면, 우리 삶에 대한 근본적인 ‘변화’를 주장하는 것은 당연했다. 그리고 대의 민주주의의 정치 의사 표현인 ‘선거’에서 반드시 변화에 대한 열망을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세상은 변한 게 없었다.’


서울에는 ‘강남 4구’ 전략이 통했고, 부동산 개발이 다른 정책을 압도했으며, 분배는 낙수효과를 이길 수 없었다. 조금 더 시간이 흘렀다. 세월호 특별법 제정이 관심사로 떠올랐다. 하지만 합의는 번번이 실패했고, 유가족은 최후의 수단을 선택했다. 단식이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자의 고통을 그 어떤 고통도 대신할 수 없었기에 유가족의 선택은 더욱 고통스러웠다. 대부분의 매체에선 온통 세월호 선장을 메인으로 도배했다. 이 구조적인 참사의 원인을 개인에게 몰아가는 사회의 폭력적이고 야만적인 행위에서부터 그것에 열광하고 화풀이하는 일반 시민들까지. 언론은 유가족, 언딘과 해경의 복잡한 관계, 성장 제일 사회에 대한 비판을 삼갔다. 그곳에는 공동체 모두가 마땅히 느껴야할 아픔과 슬픔이 없었다. 뉴스의 중립과 중심이라는 미명아래 배제되는 희생자, 가족의 아픔은 어디에서도 위로받지 못했다. 슬퍼할 시기에 정작 제대로 슬퍼하지 못하는 슬픔이 우리를 더욱 슬프게 했다.


더욱 난감한건 ‘우리’들의 자세이다. 민주 시민을 자처하는 ‘우리’들이 세월호를 바라보는 시선은 여전히 미성숙하다. 유가족의 특별법을 특혜라고 폄하하거나 ‘이제 그만’ 이라고 못 받는 태도로 일관한다. ‘죄’를 짖지 않았기 때문에 ‘책임’질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사실 맞는 말이다. 법적 관점에서 책임은 자신이 저지른 죄에 대한 응당한 처벌로 나타난다. 죄를 저지르지 않았다는 것은 책임 의무로부터 자유를 의미한다. 하지만 민주사회에선 법적 책임을 넘어선 정치적 책임, 즉 시민의 책임이 요구된다.


「한나 아렌트」는 ‘악의 평범성’을 말했다. 히틀러는 민주적 절차를 담보한 선거에서 당선되었다. 그의 휘하 조직인 나치는 유태인 대학살이라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러한 상황에서 대다수의 독일 시민들은 명백한 위험과 악에 대해 무관심으로 일조했으며, 결국 ‘문명의 구토’라 불리는 2차 대전의 반-인류적 행위를 방조했다. 깨어있지 않은 시민의 존재가 결국 인류의 재앙을 낳은 것이다. 이에 「아이리스.M.영」은 사회적 연결 모델을 제시한다. 아렌트가 주장한 정치적 책임을 인지하고 사회의 ‘구조적 부정의’에 함께 책임을 지며, 그 구조를 바꾸는 집단행동을 조직하기 위해 다른 이들과 협력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정치적’이라는 말은 관계를 조직하고 행동을 더 정당하게 조율하기 위해 다른 이들과 공적인 소통에 참여하는 것을 뜻한다. 

아렌트와 아이리스의 ‘시민의 책임성’은 우리에게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알려준다. 성숙한 시민으로서의 삶은 ‘정치적 책임’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개인이 저지른 실수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죄’만이 책임의 발생 동기임을 인식하자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우리가 인지 못하는 사회의 관성이 어떻게 불합리한 구조를 양산하고 확대하는지 감시하며, 그 불합리가 정도를 넘었을 때 함께 아파하고 분노하는 것, 그리고 연대하며 책임을 나누는 것. 그것이 바로 시민의 삶이다. 세월호 이후 변화가 없는 지금, 우리에게 요구되는 자세는 시민으로서의‘책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