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CEJ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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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CEJ 칼럼] [연극으로 읽는 고전] 오이디푸스보다 더 강렬하고 거대한… 연극 & 영화

 
오이디푸스보다 더 강렬하고 거대한…
연극 & 영화 <그을린 사랑>

 

김상혁 정치입법팀 간사

 noeul@ccej.or.kr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자신의 아버지를 살해하고 어머니와 근친상간을 할 저주받은 운명의 오이디푸스. 운명을 피해가는 노력들은 결국 신의 저주대로 이행된다. 자신의 아버지를 죽이고 자신의 어머니와 결혼하여 두 아들, 두 딸을 낳아 행복해 보이지만, 이 모든 사실을 알게 된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눈을 없앤다.
고대 그리스 시대에 신이 내린 저주가 있다면 현 시대에는 인간 스스로 만들어낸 저주가 있다. 연극 의 극적 상황이 이 저주를 관통하고 있다. 이 작품은 레바논 내전 당시의 실화에 작가가 경험한 레바논 사람들의 현실을 더해 희곡으로 쓴 것이다.
이번 작품은 고전은 아니지만, 오이디푸스를 생각하며 글을 읽는 것이 관전 포인트다. 필자가 이 작품을 오이디푸스보다 더 강렬하다고 말하는 이유는 조금은 먼나라 레바논이지만 아직도 우리에게 도사리고 있는 전쟁이라는 현실에서 나올 수 있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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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작의 힘이 너무나 강해 영화로 제작될 당시 많은 관심을 모았다.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영화는 원작이 가진 상징성과 그 안의 메시지를 충분히 담아내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서사적인 내용만 가져왔을 뿐 영화의 강렬함은 턱없이 부족해 아쉬운 점이 많았다. 대략적인 내용을 조금 공개하자면 이렇다. ‘나왈’이라는 한 여인이 죽음으로 시작된다. 나왈은 죽기 전인 5년 전부터 유서를 쓰고 그 때부터 침묵한다. 유서는 쌍둥이 남매인 ‘잔느’와 ‘시몽’에게 전해지는데, 잔느에게는 죽은 줄 알고 있었던 아버지를 찾으라 하고 시몽에게는 존재자체도 몰랐던 형을 찾으라고 쓰여있었다. 그런 다음 자신의 묘비에 이름을 남기라는 것이다. 공증인을 통해 반드시 지켜져야 하는 이유서를 시몽은 받아들이지 못하지만 잔느는 어머니의 삶 속으로 들어가려 한다. 그렇게 나왈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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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은 언제 하는가?

 

  소녀 나왈은 말론파 그리스도교도이다. 팔레스타인 난민 남자아이를 사랑하게 되고 임신을 하게 된다. 결국 둘의 사랑은 종교·문화적인 이유로 끝나게 되고, 출산한 순간 자신의 아이를 빼앗기고 멀리 보내게 된다. 이후 그녀 삶의 유일한 목적은 잃어버린 아이를 되찾는 것이었다.

  집을 떠나 부족의 금기를 깨고 글자를 깨우치고 고등교육을 받은 나왈은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잔혹한 전쟁을 겪으면서 나왈은 이 비극을 끝내리라 결심하고 기독교 민병대 우두머리를 암살한다. 체포된 그녀는 감옥으로 끌려가 ‘아부 타렉’이라는 악랄한 고문관에게 모진 고문과 강간을 당한다. 그 가운데 나왈은 임신을 하고 감옥에서 낳은 아이들은 버려져야 하지만 기구한 운명의 아이는 기적적으로 살아나 나왈이 감옥에서 나올 때 한 농부에 의해 어미품으로 돌아온다. 쌍둥이를 낳은 것이다. 그 후 나왈은 캐나다로 이민을 가 쌍둥이 남매 잔느와 시몽을 키운다.

  몇 십년 후 과거 전쟁의 책임을 묻는 청문회 자리에서 고문관 아부타렉이 법정에 섰다. 이 때 나왈은 아부타렉이 그토록 찾던 아들임을 알게 된다. 그녀에게 거대한 고통이 밀려오며 결국 침묵하게 된다. 쌍둥이의 아버지는 고문관 아부타렉이었으며 형제 또한 아부타렉이었던 것이다.

 

 

영화가 연극보다 좋다?

  연극와 영화<그을린 사랑>은 살짝 다른 점이 몇 가지 있다. 첫째로 공간에 대한 의미부여이다. 연극은 소녀 나왈의 사랑을 환상적이면서도 치유의 의미를 담고 있는 연극적 요소(무대공간)인 하얀 숲을 통해 보여준다. 영화에서는 그런 환상적인 요소가 없고 둘의 사랑하는 장면이 생략
된 채, 도망치다가 붙잡혀버리는 어색함이 연출된다. 극이 주는 사랑의 치유공간이 없어진 것이다.
  두 번째로 작품의 흐름에서 관중의 몰입도이다. 연극은 중간중간 공증인 ‘르벨’이라는 캐릭터를 통해 유머를 보여주지만 영화의 르벨은 시종일관 진지하다. 작품 자체가 워낙 시공간을 많이 뛰어넘지만 연극은 무대 안에서 과거와 현재가 겹쳐지고 등장인물의 대사들이 시공간을 자연스럽게 넘나든다. 또한 소녀인 나왈, 전쟁 당시의 나왈, 늙은 나왈로 세 명의 배우가 연기하며 그 나이 때의 나왈에 대한 이해를 더 높였다. 반면 영화는 한 배우가 나왈을 소화하며 일치성을 보여주려 했지만 오히려 소녀인 나왈의 앳된 모습이 없어지면서 흐름을 방해했다. 또한 시공간을 넘나드는 장면의 차이를 주지 못하여 집중도를 흩뜨려 놨다.
  마지막으로 쌍둥이 남매가 아부타렉이 자신의 아버지이자 형제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아부 타렉 또한 자신의 존재에 대해, 그리고 자신이 강간한 여인의 실체를 알게 되는 중요한 장면을 살펴보자. 연극은 그 괴로움과 고통으로 인한 비극성이 배우를 통해 강렬히 와 닿도록, 등장 인물들의 고통과 신음, 침묵을 끌어낸다. 하지만 영화는 나왈이 아부타렉을 알아보는 장면을 수정하여 그 강렬함을 버렸다. 영화에서는 나왈의 아이가 버려질 때 발 뒤꿈치에 세 개의 점을 문신으로 남긴다. 시간이 한참 지난 어느 날, 나왈이 수영장에서 수영을 하던 중 그 문신을 발견하고 그 사람이 자신을 강간한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된다. 극적인 요소를 많이 포기한 영화이지만, 레바논 전쟁의 비극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며 연극에서 대화로 처리한 장면들을 잘 그려냈다.

 

 

1 더하기 1은 2이다?

 

  모든 사실을 알게 되는 과정 중 작가는 수학적 요소를 집어넣었다. 시몽이 자신의 형과 아버지가 누구인지 잔느보다 먼저 알게 되는데, 잔느가 찾아와 시몽에게 무엇을 알았기에 침묵하느냐 묻는다. 시몽은 답을 알려주지 않고 수학자인 잔느에게 이렇게 질문한다. 1 더하기 1이 2가 아니라 1이 될 수 있느냐고. 영화에서는 시몽의 이 질문을 잔느가 바로 파악하며 극적 긴장감을 떨어뜨리지만, 연극에서는 잔느가 콜라츠 추측을 말해준다. 임의의 2이상 자연수 중 어떤 수라도 짝수라면 2로 나누고 홀수라면 3을 곱하고 1을 더하는 작업을 반복하면 어떤 수라도 결국 1에 도달한다는 추측으로 처음 제기한 콜라츠의 이름을 딴 것이다. 이런 설명을 한 후 잔느는 각자가 찾은 1명의 사람이 동일한 사람임을 깨닫는다. 그 때의 전율을 이 글을 읽는 독자도 느낀다면 좋으련만…. 이 대사와 침묵으로 인해 ‘오이디푸스’의 인상은 날아가고 ‘Incendies’가 자리잡았다.
  칼럼을 맡아 연극과 영화를 비교하면서 쓴 건 처음인데, 영화의 아쉬움만 얘기하며 연극에 우호적인 글을 쓴 것 같다. 하지만 그만큼 이 희곡의 텍스트는 설명적이면서도 시적이고 한줄 한줄의 강렬함이 있다. 그것을 영화로 만들어내는 데는 한계가 있었던 듯하다. 독자들도 이 외에 연극을 원작으로 한 영화나 혹은 소설, 웹툰을 보며 두 매체에서 오는 느낌이나 방법 등을 비교해보는 것도 재미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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