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CEJ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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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CEJ 칼럼] 참다운 이성으로 과학실증주의를 극복하자





이 글을 쓰는 나의 입장을 먼저 밝혀 두고자 한다. 가치판단을 배제하는 과학실증주의를 참다운 이성(理性)으로 극복하여야 한다는 것이 나의 입장이다. 먼저 과학실증주의를 비판한 다음 참다운 이성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자.

사람의 판단에는 사실판단과 가치판단의 두 가지가 있다. 봄 날에 활짝 핀 매화 꽃을 보고 매화꽃임을 아는 것이 사실판단이고 매화꽃을 보고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것이 가치판단이다. 사실판단의 오류는 객관적으로 판정할 수가 있지만 가치판단은 사람의 취향과 이해관계나 가치관에 따라서 다르므로 오류를 객관적으로 판정하기 어렵다. 이 때문에 가치판단을 과학의 대상에서 배제하자는 과학실증주의가 20세기 이후 현대 세계에서 사회과학자와 자연과학자를 막론하고 대부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막스 베버(Max Weber)의 유명한 몰가치론(沒價値論)이 과학실증주의의 대표이다.

전공학과에 상관없이 대학생들은 대부분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과학실증주의가 올바른 과학자의 태도라고 배우고 평생을 그렇게 생각하면서 살아가게 된다. 이런 생각에서 과학자들은 자신의 할 일은 목표를 정하는 것이 아니고 주어진 목표를 가장 효과적으로 달성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는 것이라고 자신을 변명하면서 주어진 과제를 무비판적으로 수행한다. 2차대전 시에 독일 나치정권이나 일본 군국주의 정권에 봉사한 과학자들만이 아니라 요즘 세상에서도 재벌이나 권력이 시키면 무엇이든 하는 학상(學商)이나 학노(學奴)들이 어느 나라에나 많다.

 

가치판단의 두 가지

 
▲ 막스 베버 ⓒ구글(google.com)
얼핏 생각하면 가치판단을 배제하자는 실증주의는 당연한 것처럼 생각되지만 실은 틀린 주장이다. 나치에 의해 추방되었던 독일의 자유주의 사회경제학자 뢰프케(Wilhelm Röpke, 1889-1966)의 말처럼 “실증주의 자체가 현실 비판을 회피하겠다는 가치판단을 내포하고 있다.” 자연과학이든 사회과학이든 모든 과학은 사람에 의하여 사람을 대상으로 사용되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크고 작은 영향을 미치는 경우가 많으므로 과학자가 가치판단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다.

가치판단의 기준이 되는 가치관에는 윤리와 관련되는 것과 관련되지 않는 것의 두 가지가 있다.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취미, 취향, 인생관과 같은 것에 관련되는 가치관들은 윤리적 문제를 야기하지 않으므로 개인의 자유에 맡기면 된다. 이런 것은 사람마다 다른 것이 당연할 뿐만 아니라 바람직하다. 만일 모든 사람의 취미, 취향, 인생관이 동일하다면 사회는 무미건조해질 뿐만 아니라 분업과 협업도 어려워져서 사회의 운영이 매우 어려워질 것이다. 모든 사람이 동일한 직업을 갖고자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윤리문제가 관련된 경우에는 과학자도 윤리적 판단이란 가치판단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인간은 다른 사람과 더불어 함께 사는 사회적 존재이므로 누구도 윤리문제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과학자도 예외가 아니다. 학자가 비윤리적인(반인륜적인) 연구를 수행하면서 과학실증주의로 자신을 합리화하는 것은 자기 기만이다.

윤리의식을 가진 윤리적 존재라는 것이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가장 큰 특성일 것이다. 머리만 좋고 윤리의식이 없다면 머리 좋은 짐승에 불과할 것이다. 개, 고양이, 새, 도마뱀도 불쌍한 동료에게 먹이를 양보하는 것을 볼 수 있으며, 윤리의식이 없는 사람들도 많지만, 윤리의식이 동물보다 평균적으로 더 많다는 것이 사람이 내세울 수 있는 가장 큰 덕성일 것이다.

윤리의 구체적 내용은 시대와 사회에 따라서 다르지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문명사회의 윤리에는 보편적인 기본내용이 있다. 남에게 부당한 피해를 주지 말라는 소극적 윤리와 이웃을 사랑하고 도와주라는 적극적인 윤리가 그것이다. 우리가 사는 자본주의사회에서도 이 두 가지 윤리는 반드시 필요하다. 전번 글에서 지적한 것처럼 자본주의사회에서는 사람들이 개인중심으로 살기 때문에 윤리가 약화되는 경향이 심하다. 그러나 자본주의사회도 인간사회이므로 윤리 없이는 지속이 곤란하다.

소극적 윤리는 모두의 생존을 위해 필수적이다. 소극적 윤리가 없다면 반칙이 횡행하게 되어 모두의 생존에 필요한 사회적 분업과 협업이 불가능하게 될 것이다. 이 때문에 모든 자유주의자들은 공정한 법질서의 확립을 시장경제와 자유의 전제 조건으로 중시하였다. 소극적 윤리는 또한 사회구성원간의 평화공존을 위해서도 필수적이다. 서로가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는 것을 개의치 않는 사회에서는 사람들의 평화공존과 자유가 불가능할 것이다. 스미스(Adam Smith)는 경주에서 “다른 사람의 다리를 걸어 넘어뜨리지” 말아야 한다고 하였고, 로크(John Locke)는 “법이 없으면 자유도 없다”고 하였다.

다음 적극적 윤리가 없다면 사회는 야만사회로 전락할 것이다. 능력이나 여건에 상관없이 모두가 서로 도우면서 인간다운 생활을 할 수 있는 사회가 좋은 사회일 것이다. 현실에서 이것을 완전히 시행하기란 어렵지만 사람들이 어려운 사람을 보면 가슴 아파하고 국가나 민간조직이나 개인이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 주는 것은 문명사회의 필수조건이다.

어떤 사회든 도둑질, 강도, 사기의 금지와 같은 소극적 윤리의 내용을 법으로 정하여 강제로 시행하므로 강조하여야 할 윤리의 본질은 소극적 윤리보다는 적극적 윤리에 있을 것이다. 적극적 윤리는 서로 특히 강자가 약자를 핍박하지 않고 도와주는 것이다. 인간사회를 보면 과거 오랜 세월 동안 강한 국가나 부족이 약한 국가나 부족을, 왕이나 귀족이 백성을, 노예주가 노예를, 남자가 여자를 핍박하는 일이 예사였다.

현재에도 명분만 있으면 강대국은 약소국을 침탈하고, 명분은 없더라도 처벌만 받지 않을 수 있다면, 재벌기업은 하청기업을 수탈하고, 권력자들은 힘없는 사람들을 핍박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이들은 대개 이를 당연하게 생각한다. 그도 그럴 것이 새가 벌레를 먹이로 삼는 것처럼 약육강식은 자연의 순리이기 때문이다. 윤리의식은 바로 이러한 자연의 순리를 적어도 인간사회에서는 거부하는 것이다. 인간사회에서 약육강식이란 자연의 순리를 거부할 때 비로소 우리는 인간다운 인간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건전한 윤리의식이란 달리 말해서 인종, 종교, 신분, 재산, 성 등 어떤 이유로도 사람을 차별하지 않고 모든 사람의 기본인권을 존중하며 어려운 사람을 돕는 마음이라고 말할 수 있다. 차별이란 강자가 약자를 핍박하는 것을 말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이런 윤리의식을 가질 수 있는 본성을 갖고 있다. 스미스(Adam Smith)가 『도덕감정론』의 첫 머리에서 말한 것처럼 아무리 악한 사람이라도 타인의 고통을 보고 가슴 아파하는 동정심과 자신의 행동을 공정하게 판단할 수 있는 마음 속의 재판관인 양심을 갖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이보다 더 강한 본성인 이기심을 동시에 갖고 있다. 즉, 타인의 고통을 개의치 않고 자신의 이익을 채우려하고, 쾌감을 느끼거나 자신의 힘을 과시하기 위해 타인을 괴롭히려는 본성도 갖고 있다. 상반되는 이 두 가지 본성 중에서 동정심과 양심은 자신의 이해관계라는 폭풍 앞에서는 작은 촛불처럼 맥없이 스러지는 것이 보통이다. 이런 이기심의 발호를 막고 공명정대한 윤리의식을 갖기 위해서는 단순한 연민이나 양심만이 아니라 이기심을 극복하고 양심에 따라 행동하려는 자발적인 의지가 필요하다. 이런 의미에서 도덕심(윤리의식)의 원천은 스미스가 지적한 연민이란 본성적인 감성에 칸트(Immanuel Kant)가 말한 자율의지가 보태져야 한다. 칸트의 말처럼 도덕률은 논리적으로는 도출되지 않기 때문이다. 도덕률을 따르는 참다운 인간이 되는 것은 자신의 자발적 의지로 스스로 선택하는 것이다.

 

판단 오류의 원인

어느 사회든지 사회에는 찬반 양론이 존재하는 많은 논란거리가 있고 찬 반 양론 중 어느 한 쪽은 잘못 판단하고 있을 터이다. 이런 판단의 오류는 가치판단의 오류와 사실판단의 오류의 둘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가치판단의 오류는 자신의 이해관계나 편견에 얽매인 잘못된 가치판단에서 비롯되는 것이 보통이다. 다른 민족을 차별하였던 유대민족의 선민사상, 불평등한 인간관을 가지고 소수에 의한 귀족정치를 칭송하고 민주주의를 비난하였던 플라톤, 독일 나치의 인종주의, 돈밖에 모르는 오늘날의 천민자본주의의 풍조가 모두 이러한 예이다.

가치판단에서만 아니라 사람은 만물의 영장이라는 말이 부끄럽게 사실판단에서도 종종 오류를 범한다. 이는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하나는 정보와 우리 두 뇌의 정보처리능력이 불완전하기 때문에 사실을 잘못 파악하여 발생하는 경우이다. 이는 이해관계나 주관적인 편견과 상관없이 발생하는 사실판단의 오류이며 우리가 의식적으로 노력한다고 크게 줄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불완전한 인간으로서 이는 어느 정도 불가피한 일이다.

이 경우보다 우리가 주의하여야 할 사실판단의 오류는 우리의 이해관계나 편견 때문에 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사실을 왜곡하는 경우이다. 세상만사의 인과관계는 매우 복잡하다. 정보도 부족하고 우리의 인식능력도 부족하다. 이 때문에 우리는 인과관계와 효과들을 정확히 알 수가 없는 경우가 많다. 이렇게도 보이고 저렇게도 설명된다. 이럴 때 사람들은 자기의 이해관계와 편견에 이끌려서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믿고 싶은 것만 믿으려 한다. 이는 무의식적인 사실판단의 오류이다. 뿐만 아니라 의식적으로 사실을 왜곡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의도적으로 통계를 조작하기도 하며 빨간 꽃을 보고도 흰 꽃이라고 낯 뚜꺼운 얼굴로 벅벅 우기기도 한다. 사실을 왜곡하여 잘못 인식하고 잘못된 인식은 다시 잘못된 편견의 철옹성을 쌓는다. 잘못된 사실판단과 가치판단이 서로 상승작용을 하는 악순환이 계속된다.

석유이권 때문에 미군에게 이라크 침공을 명령하고는 하나님에게 축복해달라고 빌었던 부시 대통령처럼 자신의 불의를 정의라고 착각하거나, 영남권 신국제공항 건설의 취소를 성토하는 영남 사람들처럼, 지위나 직업, 교육수준과 상관없이 자신의 이익을 공공의 이익이라고 착각하는 사람들로 세상이 시끄럽다. 역사상 큰 죄악을 저지른 사람 중에서 자신의 행위가 옳다고 확신하지 않았던 사람이 없고 그 이유를 제시하지 못한 사람도 없다.

 

참다운 이성

 
▲ 알프레드 마샬 ⓒ구글(google.com)
현대 과학의 통설인 과학실증주의는 과학에서 가치판단을 배제할 것을 주장한다. 그러나 건전한 윤리의식에 입각한 가치판단은 모든 인간의 의무이므로 학자도 이를 회피할 수 없다. 과학에서 배제할 것은, 취향이나 개인적인 인생관과 같이 윤리문제와 관계 없기 때문에 개인에게 맡겨두어야 할 가치판단이지 윤리문제가 개입되는 가치판단이 아니다. 과학실증주의의 뒤에 숨어서 자신을 변명하면서 권력이나 돈이 시키는 대로 비윤리적인 연구를 행하는 것은 자신을 학상이나 학노로 전락시키는 일이다.

베버(Max Weber)가 과학실증주의인 몰가치론(沒價値論)을 주장하였던 것은,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당시 독일의 대학교수들이 막시스트(Marxists)와 민족주의자의 두 편으로 갈라져서 자신들의 주장만을 학생들에게 일방적으로 주입하려고 서로 싸우던 것을 비판하였던 것이지, 학자들에게 건전한 윤리의식을 갖지 말라고 한 것이 결코 아니었다.

우리 모두가 피해야 할 것은 건전한 윤리의식에 입각한 가치판단이 아니라 편견과 이해관계라는 색안경을 쓰고 사실을 왜곡하는 것이다. 학자는 참다운 이성으로 과학실증주의를 극복하여야 한다. 참다운 이성이란 냉철한 사실판단력과 건전한 가치판단력의 둘을 합한 것이다. 냉철한 사실판단력이란 사실을 왜곡시키지 않고 있는 그대로 인식하는 것이고, 건전한 가치판단력이란 인종, 종교, 신분, 지위, 재산, 성 등 어떤 이유로도 사람을 차별하지 않고 동등하게 대우하며 모든 사람의 기본인권을 존중하며 어려운 사람을 돕는 건강한 윤리의식을 말한다.

영국의 경제학자 마셜(Alfred Marshall, 1842-1924)은 1885년 케임브리지대학교 경제학과 교수 취임연설에서 경제연구자(economists)는 “찬 머리와 더운 가슴”(cool head and warm heart)을 가져야 한다고 말하였다. 찬 머리와 더운 가슴이 바로 참다운 이성일 것이다. 이는 비단 경제학자만이 아니라 모든 과학자, 나아가서 모든 인간에게 해당되는 말일 것이다. 찬 머리와 더운 가슴을 함께 갖춘 참다운 이성이야 말로 인간이 다른 동물과 차별되는 가장 인간다운 장점이다. 또한 이는 사회를 발전시키는 원동력이기도 하다. 이성의 두 요소 중에서 건강한 가치판단력인 윤리의식이 특히 중요하다. 이성이라고 하면 흔히 인간의 영리한 두뇌를 말하지만, 사회발전에 더 중요한 것은 건전한 윤리의식이다. 사회의 문제점을 파악하고 이에 대한 올바른 개선방향을 찾는 것은 찬 머리가 아니라 더운 가슴이기 때문이다.
/이근식 서울시립대학교 교수

* 이글은 프레시안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