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CEJ 칼럼

보다 정의롭고 모두가 행복한 미래사회를 위해 달리는 경실련의 최근 이야기를 한자리에 모았습니다.
[CCEJ 칼럼] 천민자본주의의 극복을 위하여





이 시리즈를 쓰는 목적은 현재 세계와 우리나라를 휩쓸고 있는 천박한 자본주의, 천민자보주의를 극복하는 데에 힘을 보태기 위해서다. 이를 위해 나는 상생적 자유주의를 제안한다. 현재 진행 중에 있는 일본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 폭발사고는 당장 눈 앞의 돈만 생각하는 천민자본주의가 초래한 대재앙이다.

사고 발생 즉시 바닷물로 냉각시켰더라면 수습되었을 것을 비싼 원자력 발전소가 바닷물로 못 쓰게 되는 것이 아까워서 주저하다가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른 것이라 한다. 이번의 끔찍한 사고를 보고도 이명박대통령과 오바마대통령은 원자력발전소 건설을 계속하겠다고 한다.

천민자본주의의 눈으로 만사를 결정하는 대통령들이 국가와 인류의 중대사를 결정하는 세상에 지금 우리들이 살고 있다. 우리 인간들은 단지 돈벌이를 목적으로 강산을 파괴하고 수많은 동물들을 마구 살륙하고 통제도 못하는 원자력 발전소를 지어 방사능을 대량 누출시키고 있다. 천민자본주의는 인간의 윤리만이 아니라 인간의 목숨, 나아가서 우리가 사는 지구라는 작은 별을 무서운 속도로 파괴하여 가고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나는 우리 인간사회가 계속 진보하여 우리 자식들은 더 좋은 세상에서 살게 될 것이라고 믿었다. 과학기술의 발전 덕분에 더 풍요롭고 편리한 세상에서 더 많은 자유와 평등을 누리면서 살게 되리라고 믿었다.

많은 집들이 매일 끼니를 걱정하여야 하고, 딸들은 중학교만 겨우 졸업한 뒤 공장에서 영양실조의 핏기 없는 얼굴로 밤늦도록 일하여야만 하였으며, 대통령이 마음대로 법을 만들고 멋대로 사람을 체포하고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군대가 무고한 국민들을 총검으로 살륙하던 불과 30년 전의 군사독재시절의 일들을 생생하게 기억하는 나는 세계도 우리나라도 비틀거리긴 하지만 장기적으로 발전한다고 생각하였다.

이런 낙관적 생각이 최근 크게 흔들려서 우리 자손들이 지금보다 훨씬 더 나쁜 사회에서 살게 될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들고 있다. 사람들이 현재와 같이 천민자본주의에 미쳐서 윤리 파괴, 자연 파괴, 원전 건설을 계속한다면 우리 후손들은 과연 어떤 세상에 살게 될까?

 

지난 2,3백년간 전쟁과 비극이 끊이지 않았으나 장기적으로 세계는 진보의 발걸음을 멈추지 않아 왔다고 생각된다. 자본주의의 보급 덕분에 세계 경제는 크게 발전하여 왔으며, 이를 토대로 민주주의와 법치주의라는 근대사회제도와, 학문과 문화가 그 이전과 비교가 안 되게 놀라운 발전을 거듭하여 왔다. 무엇보다도 수 천 년 간 민중들을 억압하여 오던 각종 사회적 차별이 점차 철폐되고 자유와 평등이 확대되어 기본적으로 인권이 보장되는 근대 문명사회가 건설되었다. 이 덕분에 수 천 년 간 사람대접을 받지 못하던 대다수 사람들이 이제 모두 평등한 사람으로서의 가치와 존엄성을 인정 받게 되었다.

 

이런 놀라운 사회발전을 이끌어 온 생각이 근대 서양의 자유주의이다. 경제발전이 모든 사회발전의 기초이긴 하지만 사회발전을 궁극적으로 결정하는 것은 사람들의 생각이다. 전근대사회에 비교하여 근대 사회가 발전하였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는 경제발전보다도 대부분 사람들이 근대사회에서 자유와 평등과 인권을 누리고 있다는 것이고, 이는 자유와 평등과 인권을 양보할 수 없는 사회적 가치라고 생각하는 자유주의가 보급된 덕분이다. 돈만 많다고 행복한 가정이 되는 게 아니라, 가족들의 몸과 마음이 모두 건강하여야 행복한 가정이 되는 것처럼 사회도 마찬가지이다. 좋은 사회란 궁핍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구성원들의 생각이 건강한 사회일 것이다.

 

지난 2,3백년간 근대사회의 발전을 이끌어 오던 건강한 사회가치관이던 자유주의가 어느 덧 힘이 빠지고 천박한 천민자본주의 윤리가 세상을 뒤덮고 있다. 특히 신자유주의가 득세하기 시작한 1980년대 이후 그러하다. 원래 천민자본주의란 말은 독일의 막스 베버(Max Weber. 1864-1920)가 생산이 아니라 투기로 돈을 벌었던 유대인 금융업자들의 행태를 지칭한 말이지만 이 글에서는 윤리의식 없이 돈만 추구하는 행태를 지칭하는 말로 쓰고자 한다.

내가 천민자본주의라는 말을 처음 들었던 것은 40여년 전 대학시절이었다. 그 때 나는 '선진국 자본주의는 양반자본주의인데 우리나라는 천민자본주의인 모양이구나'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요즘 생각해 보니 원래 자본주의가 천민자본주의적 성향이 강한 것 같다. 자본주의는 기본적으로 윤리를 망가뜨리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윤리란 나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마음 혹은 염치를 아는 마음이라고 볼 수 있다. 자본주의가 윤리에 미치는 영향은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의 두 가지가 있다. 긍정적인 것은 빈곤을 벗어나게 하여 염치를 알게 하는 것이다. “곳간이 차야 예절을 알며, 의식주가 족해야 영욕(榮辱)을 안다”는 관자(管子, 牧民編)의 말처럼 자본주의의 발전은 많은 사람들을 빈곤에서 해방시켜서 염치를 알게 만들었다. 이것이 긍정적 영향이다.

 

반면에 자본주의는 윤리에 더 큰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데 이는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하나는 개인주의의 확대 탓이다. 자본주의의 발달로 인하여 그전까지 비난받아 오던 개인주의가 인정 받고 칭송 받게 되었다. 근대 계몽주의자들은 대부분 개인주의가 사회 발전의 동력이라고 칭송하였다. 근대 경제학의 시조인 스미스(Adam Smith, 1723-90)가, 자기사랑 덕분에 모든 생명체는 '개체보존과 종족의 번성이라는 자연의 위대한 두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고 말한 것이 대표적이다. 자유주의는 이러한 개인주의에 입각하여 있다.

 

이처럼 개인주의를 긍정적으로 본 것은 인류 윤리의 역사에서 코페르니쿠스적인 대전환이다. 자본주의 이전의 전근대 사회에서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개인주의는 비난받아 왔다. 사람들은 공동체를 중심으로 생활하여 왔는데 개인 중심의 개인주의는 공동체를 위협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가는 부르조아(상공인)들은 자기 혼자의 책임으로 사업을 경영하고 그 결과를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자기 혼자 감당한다. 개인주의 윤리란 바로 이러한 부르조아들의 생활윤리를 반영한 자본주의의 윤리이다. 자본주의의 발달로 인하여 개인주의가 비난의 대상에서 긍정의 대상으로 변한 것은 경제가 변하면 사회의 다른 부분들도 거기 맞추어 변한다는 것을 보여 주는 한 예이다.

 

이런 개인주의의 발달은 상공인들의 근면과 성실을 장려하여 경제발전을 촉진하였다는 점에서 역사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러나 개인주의는 타인을 배려하는 마음을 사라지게 함으로써 윤리를 크게 후퇴시켰다. 자본주의가 지배하게 된 18-19세기 서양에서 부르조아들만이 아니라 학자들도 빈민구제는 필요 없다고 보았던 것 같다. 칸트(Immanuel Kant)도 “불평등은 효율성을 위한 필요악”이라고 말했으며, 빈곤구제는 적자생존이라는 자연의 선택을 방해한다고 비난하였던 스펜서(Herbert Spencer, 1820-1903)의 사회진화론이 19세기 후반과 20세기초 영미에서 크게 유행하였다.

 

자본주의가 윤리에 미치는 두 번째 부정적인 영향은 돈만 밝히는 배금주의(mammonism)의 만연이다. 자신이 갖고 있는 것은 중요하고 자기가 갖고 있지 못한 것은 우습게 보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학벌 없는 부자와 학벌 좋은 가난뱅이는 서로를 우습게 본다. 자본주의의 주도층인 부르조아들은 자신들이 가진 것이 재산이므로 재산을 절대시하였다. “나의 적이 나의 목숨은 뺐을 수 있을지언정 나의 재산을 뺐을 수는 없다”고 로크(John Locke, 1632-1704)는 말하였다.

이 때문에 명예혁명(1688)으로 부르조아들이 집권하였던 18세기 영국에서는 주인집을 방화한 11살의 소년, 1실링을 훔친 남자, 손수건을 훔친 소녀가 사형 당하는 일도 있었다. 돈 없으면 생존이 불가능하고 돈만 많으면 원하는 것을 대부분 얻을 수 있는 자본주의사회에서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 배금주의에 빠지게 된다.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세상이 뒤집어져서 상공사농의 세상이 되었다. 교수도, 장관도, 판검사도, 기자도 모두 재벌 앞에서 고개 숙인 남자가 되었다. 이런 세상에서 윤리가 자리 잡을 여지는 별로 없다.

 

이런 두 가지 이유 때문에 자본주의에서는 일반적으로 윤리가 무너지고 자신과 돈 밖에 모르는 천민자본주의가 만연하게 되는 경향이 강하다. 근대 서양에서 이런 경향을 어느 정도 억제하여 온 것이 기독교 윤리와 민주주의라고 볼 수 있다. 서양에는 이웃 사랑을 강조하는 기독교의 오랜 전통이 19세기까지 어느 정도 천민자본주의 성향을 견제하여 온 것 같다. 그러나 과학 발달로 인하여 기독교 신앙이 쇠퇴하면서 교회의 힘이 크게 약화되었다.

이를 대신하여 20세기에 등장한 것이 민주복지국가라고 생각된다. 돈에 비례하여 투표권을 가지는 시장에서와 달리 민주국가에서는 일인일표의 동등한 투표권이 행사되므로 진정한 민주국가는 많은 사람들이 원하는 정책을 시행하게 된다. 그 덕분에 2차대전 이후 선진 민주국가에서 정부는 공공복지제도를 시행하고, 대기업들의 횡포를 법으로 금지하고 노동조합을 보호하여 천민자본주의의 폐해를 상당히 방지하여 살기 좋은 사회를 만들 수 있었다.

 

이런 추세를 바꾼 것이 1980년경부터 영미에서 시작된 신자유주의이다. 그간 비대해진 국가와 노동조합의 횡포와 비리, 무능에 대한 중산층들의 불만을 등에 업고 집권한 신자유주의는 정부를 줄이고 시장을 확대시켰다. 신자유주의가 그간의 비대해진 복지국가의 실패를 지적한 것은 타당하지만 동시에 천민자본주의가 세상을 휩쓸도록 만들어 버렸다.

자유화란 이름으로 대기업의 횡포를 억제하여 오던 정부규제들을 대폭 축소시킴으로써 재벌들의 세상을 만들어 버렸을 뿐만 아니라 더 중요하게는 천민자본주의적 사고방식이 당연한 것인 양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어 놓았다.

종업원의 대량해고나 경영자들의 초고액연봉이 과거에는 부끄럽게 생각되었으나 이제는 자랑거리로 칭송의 대상이 되었다. 종업원을 대량 해고시켜서 자신의 연봉과 회사이윤을 턱 없이 높인 경영자의 거만하고 천박한 얼굴들이 잡지의 표지를 장식하는 세상이 되었다.

대학을 인수한 상인이 대학을 개인회사처럼 운영하는 것을 자랑하여도 교수들은 유구무언이다. 돈은 엄청 많으나 몰상식한 상인이 예수님 대접을 받는 세상이다. 그가 한 마디 하면 모두가 귀를 기울인다. 신자유주의가 득세한 이후 직업과 직위에 상관없이 모두가 돈 밖에 모르는 경제 동물이 되었다. 신자유주의자들이 찬양하는 글로벌 스탠다드는 천박한 천민자본주의에 다름 아니다. 공익정신(public spirits)은 간 곳 없고 배금주의가 판을 치는 세상이다.

 

돈벌이를 위해 지난 2백년간 우리 인간은 개발이란 이름으로 지구를 끊임없이 파괴하고 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도 4대강 살리기란 이름으로 이 짓이 벌어지고 있다. 지구라는 작고 아름다운 이 별이 부서지면 도망가서 살 다른 별이라도 있는가? 사람답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천민자본주의를 벗어나야 한다. 천민자본주의 세상에서 사람들은 돈을 유일한 목적인 양 추구하지만 원래 돈은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다. 자유를 추구하여 온 서양의 브루주아들은 만인평등을 지향하고 인권을 존중하는 찬란한 근현대 서양 문명을 낳았으나 이제는 자유만으로 문제를 풀 수 없다. 이제는 자유와 상생을 동시에 추구하여야 할 것 같다.

 

이 글에서는 자유, 평등, 정의, 상생, 인간의 본성, 과학실증주의, 자유주의, 자본주의, 사회주의 등 인간과 사회에 관한 여러 문제에 관한 나의 생각들을 정리한 다음 상생적 자유주의와 그 실현 방법을 제시하려고 한다. 원자력발전 지지자들은 인간이 실수하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내가 좋아하는 자유주의는 모든 인간은 불완전하므로 그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나도 나의 생각이 모두 맞다고 고집 부릴 생각이 없다. 나이 먹으면 사람은 고집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 내 지론이다. 독자들의 사심 없고 기탄 없는 지적을 환영한다.

 

* 이 글은 프레시안에 기고한 내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