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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CEJ 칼럼] [칼럼] 분단 2세대를 위한 편지_전영선 경실련통일협회 이사

분단 2세대를 위한 편지

 

 

  전영선(경실련통일협회 이사, 건국대 HK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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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2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사망으로 한반도 북쪽에는 김정은 체제가 수립되었다. 김정은 제1부위원장체제의 등장은 문화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온전한 분단세대의 등장, 한반도 분단 2세대의 시작을 의미한다. 한반도 분단 문제는 이제 포스트 분단세대의 몫이 되었다.

 

분단 1세대와 2세대를 가르는 기준은 경험의 차이다. 분단1세대란 광복과 분단의 과정을 직접 경험한 세대, 왜곡된 분단구조로 인해 발생한 정치사회적 모순을 직접적으로 체험한 세대까지 포함한다. 분단 2기는 간접적으로 분단을 경험한 세대를 의미한다. 새로운 세대의 등장은 새로운 방식의 접근을 필요로 한다. 이제 한반도 분단은 새로운 세대를 위한 통일 담론을 준비해야 할 때가 되었다. 분단의 경험을 체험하게 하고, 분단의식을 물려주기보다는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 주어야 한다.

 

한반도 분단을 경험한 분단 1세대들은 참으로 치열하게 살아왔다. 광복의 기쁨도 잠시 남북 분단의 엄혹한 현실 속에서 생존을 위한 삶을 치열하게 살아왔다. 살기위해서 밤낮없이 일했다. 먹고 살 수 있다면 몸 뚱아리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누군가의 희생이 칭송받던 시절이었다. 아버지는 국가를 위해 희생했다. 먹고 살기 위해서 먼 나라 전쟁터로 나갔고, 열사의 땅에서 흘린 피와 땀으로 달러를 벌었다. 먹고 살기 힘들어진 가족을 보면서 누이는 공장으로 흘러갔다. 밥 먹는 입 하나 줄이고자 공장에 간 누이들은 배고픈 동생을 위해, 공부해서 집안을 살려야 할 남동생과 오빠를 위해서 자신의 삶을 희생했다.

 

세계 최악의 빈곤국가 대한민국은 피와 땀으로 삶을 이어갔다. 이념의 색을 따지기 전에 살아남는 것이 최선이었다. 민주주의는 배부른 나라 이야기였다. 삶의 터전을 빼앗기지 않는 것이 최고였고, 배부르게 해주는 지도자가 최고였다. 삼시 세끼 걱정 없이 살아갈 수 있다면 자유를 구속당한들 크게 문제될 건 없었다. 나라를 지킬 울타리가 튼튼하고 곳간에 양식이 쌓여있는 나라가 최고였다. 민주국가의 국민이기보다는 성군이 사는 나라의 백성으로서의 소망이었다.

 

분단이나 전쟁을 경험하지 못하였지만 아버지 세대의 경험을 간직한 486세대에게도 분단의 그늘은 컸다. 분단 구조로 인한 사회적 모순을 직접적으로 경험하였다. 분단 구조는 어느 사이 우리의 인식을 분단으로 사물을 보는데 익숙하게 만들었다. 다와 다른 생각, 나와 다른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니라 나와 틀린 생각, 나와는 틀린 사람이 있었다. 다르다는 것을 배우지 못하였다.‘틀리다’는 것만 배웠다. 저건 틀린 것이고, 틀린 것은 바로 잡아야 했다. 이념은 그렇게 다양한 생각의 싹을 잘라냈다.

 

정당한 주장이나 논리도 이념의 시각으로 보아주기를 강요당했다. 어떤 주장이 논리적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어느 편인지가 중요했다. 우리 편이라고 생각하면 논리가 어떻게 되었던 문제되지 않았다. 질서, 국민통합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졌던 국가 폭력은 위압적이고, 폭력적이었지만 문제될 것이 없었다. 국가의 통치는 어떤 행위든 정당성을 명분으로 가해졌기 때문이다. 무자비한 국가폭력에 무기력한 시민들이 쓰러져도 국가는 냉담했거나 돈으로 해결하려 하였다. 짧은 민주주의의 역사와 고도 경제성장이 이룬 사회적 풍요에 어울리지 않는 패션이었다. 성숙된 시민의식은 경제발전의 신화 속에 주변으로 밀려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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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1980년 이후에 태어난 세대, 88서울올림픽 세대들의 경험은 앞의 세대와는 결이 다른 문제이다. 단군 이래 최초의 국제행사라는 올림픽을 개최하면서 해외여행자유화가 시작되었다. 해외여행이 자유화되면서 외국에서 한국을 바라보는 시각을 배우게 되었다. 한반도 문제를 상대적으로 객관적으로 보게 된 것이다. 이후 세대들에게 한반도 분단은 온전히 교과서의 이야기가 되었다.

 

세대의 체험은 다른 세대의 체험과 공유되지 않는다. 분단의 기억 또한 마찬가지다. 분단 세대의 체험은 공유되지 않는다. 세대차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다. 같은 공간과 같은 시간 속에 살고 있지만 인식은 공유되지 않는다. 현대사회를 살아도 봉건적인 사유를 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봉건시대에 살고 있다. 아직도 저런 사람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도 이런 이유이다.

 

분단세대의 경험은 공유하고 싶어도 공유할 수 없고, 나누고 싶어도 나누어 가질 수 없다. 30대 이하에게 분단, 이념갈등, 전쟁은 오롯이 간접적인 체험의 몫이다. 전쟁세대는 갖은 방식으로 ‘6․25’의 경험을 나누고 싶어 하지만 그렇게 할 수 없다. 아버지 세대들이 할아버지 세대의 태평양전쟁에 대한 경험을 공유하지 못하고, 할아버지 세대들이 그 할아버지 세대들의 임진왜란의 경험을 공유하지 못하는 것처럼…

 

거리에서 사진전시회를 하고, 반공영화를 만들어 보여준다고 해서 체험이 공유되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기억된 기억은 오래 가지 못한다. 몸으로 체화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역사 속에서 기억은 체감되지 않으면 휘발된다. TV에서 바로 직전에 날씨뉴스를 보고 나서도 내일 날씨가 어떤지 기억하지 못한다. 경험이나 관심이 직접적이지 않기 때문이다.‘6·25’를 소재로 한 영화 <포화속에서>가 몇 백 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였다고 해서 그 만큼의 전쟁 경험이 공유되지 않는다. 단언하건대 청소년들에게 <포화속에서>에 대한 기억은 주인공이자 아이돌인 탑(TOP)이나, 인민군이자 전쟁광으로 그려진 차승원의 멋진 모습으로 기억될 것이다. 영화가 끝나고 영화에 대한 기억이 얼마나 오래갈 지를 궁금해 한다면 영화를 본 청소년들에게 물어보아도 좋다. 청소년들에게 있어 <포화속에서>는 민족의 분단, 전쟁의 아픔과는 상관없다. 한 편의 전쟁영화, 액션영화로 기억될 뿐이다. 영화에 대한 기억이 오래가지 않은 것은 현실체험이 아니기 때문이다.

 

반면 <도가니>나 <돈 크라이 마미>는 현실체험으로 다가온다. 훨씬 더 자신과 가까운 현실문제이기 때문이다. 현실이라는 문제만큼 가슴 깊이 남는 것은 없다. 분단세대에게는 분단과 전쟁이 현실이라면, 지금 청소년들에게는 학교폭력과 성폭력이 현실인 것이다. 경험은 그렇게 각자의 방식, 각자의 기억으로 저장된다.

 

손을 뻗혀 냉장고 문만 열면 먹을 것이 가득하고, 과체중과 비만이 현대병이 된 세대들에게 굶주림과 고통은 먼 나라 이야기일 뿐이다. 엄마 아빠가 굶주렸던 이야기보다는 아프리카나 아시아 빈국을 여행하면서 겪었던 경험이 훨씬 더 현실적이다. 분단을 경험한 세대들이 애써 분단의 경험을 나누고, 전쟁의 체험을 나누고자 하지만 경험을 공유할 수는 없고, 의식 차원을 넘어설 수는 없다. 경험의 힘이 다르기 때문이다. ‘뮤직뱅크’ 관객과 ‘가요무대’ 관객의 감성이 같을 수는 없다. 같은 공간에 살고 있다고 해서 같은 경험을 갖는 것도 아니고, 같은 사건을 겪었다고 해서 인식이 나누어지는 것도 아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통일에 대한 즐거운 경험을 만들어야 한다. 통일에 대한 감성의 회복은 지난 경험의 공유와 체험의 반목을 통해 이룰 수 없다. 통일에 대한 구체적인 경험을 체험할 때 통일에 대한 욕망이 생겨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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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정원을 바라보면서 조용하게 명상을 즐기던 신사가 있었다. 어느 날 동네 개구쟁이들이 신사의 정원으로 찾아들었다. 아이들은 정원에서 노래도 부르고 말놀이도 하면서 신나게 뛰어다녔다. 아름다운 정원을 바라보며 조용하게 명상을 즐기던 신사의 즐거움은 하루아침에 깨어졌다.

 

‘어떻게 하면 조용하게 아이들을 물러나게 할 수 있을까?’

‘화를 내고 소리쳐서 쫓아낼까?’

‘아니면 담장을 더 높게 올려 들어오지 못하게 할까?’

 

고민하던 신사는 정원에서 신나게 뛰어놀고 있는 아이들을 불렀다.

 

“예들아 너희들이 내 정원에서 뛰어 놀고 있는 것을 보니 나도 너무 즐겁구나. 그래서 내가 너희들에게 1달러를 주겠다.”

 

신사의 말에 아이들은 깜짝 놀랐다. 정원을 어지럽힌다고 혼이 나기는커녕 신나게 논다고 돈까지 준다니 이게 왠 횡재일까 싶었다. 아이들은 더욱 신나게 놀기 시작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다. 신사는 다시 아이들에게 말했다.

 

“예들아 미안하구나 내가 돈이 부족해서 너희들에게 줄 돈이 모자라는 구나. 그래서 50센트밖에 줄 수 없구나”

 

아이들은 여전히 신사의 정원에서 뛰어 놀 수 있고, 50센트도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아이들은 신사에 대해 불만을 털어 놓았다.

 

“갈래요. 하루 종일 뛰어 놀고 50센트라니, 너무 한 거 아니예요.”

 

아이들은 하나둘씩 정원을 떠나갔다. 신사는 다시 조용하게 명상을 즐기는 기쁨을 맛보게 되었다.

 

 

아이들은 여전히 신사의 정원에서 놀 수도 있고, 50센트를 받을 수 있었지만 신사의 정원에서 왜 떠나갔을까? 신이 나지 않기 때문이다. 신사의 정원에서 노는 것이 예전처럼 즐겁지 않기 때문이다. 이전에 신사의 정원은 이제 아무나 가서 놀 수 없는 곳이지만 이제는 일터가 된 것이다.

 

즐겁게 하던 일도 과제가 되면 싫증이 난다. 낚시를 무지하게 좋아하던 의사가 있었다. 낚시를 너무나 좋아해서 틈만 나면 낚싯대를 매만지면서 낚시하는 꿈을 꾸었다. 생각 같아서는 몇날며칠이고 낚시만 하고 싶었다. 의사라는 직업을 버리고 낚시로 세월을 보내고 싶은 생각도 여러 번 했었다.

의사가 낚시를 직업으로 삼는다면 지금만큼 행복할 수 있을까. 그렇지는 않다. 직업과 즐기는 것은 큰 차이가 있다. 우리 속담에 ‘잘하는 일도 멍석깔면 안 한다’는 말이 있다. 당연한 말이다. 멍석은 공식성을 의미한다. 취지로 즐기는 것과 그것을 직업으로 삼는다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아무리 즐거운 일도 과제가 되고, 의무가 되면 싫어진다. 자발적인 내적 동기가 사라지고 의무와 과제로서 외적 동기만 부여되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통일문제가 바로 이 지점에 서 있다. 통일에 대한 내적 동기, 자발적 동기가 약해졌다. 분단이란 통합되었던 것이 갈라질 때가 가능하다. 분단을 체험한 세대에게 통일은 필연적인 문제이겠지만 태어날 때부터 분단된 국가에서 태어난 세대에게 분단은 개념화되지 않은 단어일 뿐이다.

이런 포스트 분단세대에게 통일은 분단세대로부터 받은 과제일 뿐이다. 통일은 주어진 외적 동기만이 있을 뿐, 통일을 이루어야 할 내적 동력이 없다. 특별하게 통일을 열망해야 할 이유가 없다. 통일이 되면 주어질 보상, 통일한국으로부터 받을 혜택이 무엇일까를 고민할 뿐이다. 통일 비용이니 통일편익이니 하는 말이 통일의 필요성을 대신하는 것은 보다 구체적이고, 분명한 결과(대가)가 없다면 통일에 몰두해야 할 이유를 찾기 힘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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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단 2세대를 위한 통일 논의는 한반도 현실에 대한 성찰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한반도 문제로 인해 발생한 왜곡된 의식이 우리 삶을 얼마나 오염시키고 있는 지를 성찰해야 한다. 한반도 남북을 가로지른 분단의 장벽은 물리적인 장벽만이 아니다. 인식의 장벽을 쌓아 광활한 한반도 북쪽, 대륙으로 향하는 마음의 문을 닫아 버렸다.

 

지구의 온난화로 인해 북극의 얼음이 녹으면서 새로운 항로가 열렸다. 북극을 가로질러 유럽으로 이어지는 뱃길이 열린 것이다. 길이 열리면 생각이 열린다. 새로운 길을 가게 되면 새로운 것을 보게 된다. 길은 곧 생각이기 때문이다. 길을 열고, 생각을 열고, 그렇게 통일에 대한 즐거운 경험, 새로운 경험을 나누어야 한다. 그래서 통일에 대한 생각을 열어야 한다. 한반도의 미래 구상을 열어가야 할 때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