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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CEJ 칼럼] [칼럼] 통일을 두려워 말라_롤프 마파엘 주한독일 대사

통일을 두려워 말라

“독일, 정권교체 불구 20년간 일관된 긴장완화 정책으로 통일“

 

롤프 마파엘 주한독일 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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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한반도 상황의 흐름을 보면 통일문제가 다시 한 번 주목을 받는 듯하다. 지난 3~4월 북한의 미사일, 핵 실험을 시작으로 남북관계가 최저점을 찍었다고 생각하고 다시 남북 간의 화해와 접근을 통해서 심각한 위기는 벗어나고 희망적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최근에 박근혜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하고 정상회담 이후에 공동성명을 발표 할 때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 희망한다는 것을 담은 것에 대해 놀랍고 긍정 생각한다. 최근에 북한의 핵 프로그램으로 인해서 한 번 더 한반도 상황이 주목을 받으면서 국제사회에서 한반도 통일에 대한 관심이 더 커졌다고 생각 한다. 이런 배경 하에서 한국의 한반도 상황 고려할 때 독일 통일 시사점을 말씀드리겠다.

 

남북한과 동서독의 공통점은 냉전의 산물로 분단이 되었다는 것, 외부에 의해 분단되었다는 것이 있다. 가장 큰 차이는 동서독 간에는 전쟁이 없었지만 남북 간에는 전쟁이 있었다는 것이다. 또 가장 중요한 점 하나는 구동독에는 소련군이 주둔해있었기 때문에 북한이 가지고 있던 협상의 자유로운 분위기가 동독에는 없었다는 것이다. 또 역으로 생각해보면 동독은 소련의 지배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통일이 소련군의 철수와 맞물려 있어서 동독 주민의 통일에 대한 염원이 컸다. 북한 상황과는 다른 측면이 있는 것이다.

 

두 번째 차이는 동독 주민들은 동유럽 국가를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었고, 서독에 대한 정보를 많이 가지고 있었지만 북한은 폐쇄된 사회에 살고 있다. 사실 동독 주민들이 외부세계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있는 사실이 긍정적인 통일 모멘텀을 만들어 내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동독 주민들은 서독의 상황이나 경제력이 어떤지, 만약 통일이 되면 어떤 운명이 닥칠지 예상하고 있었기 때문에 통일 됐을 때 충격을 받지 않을 정보를 가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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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통일에 대해서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기 전 시기, 1989~90년 통일 상황, 통일이후부터 지금까지 상황 이렇게 3단계로 나눠 설명 드리겠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기 전까지인 1단계 상황에서 중요한 관점은 왜 서방국가들이 평화로운 독일의 통일을 허용했는가 하는 점이다. 사실 독일, 서독 같은 경우는 주변국가에 항상 위험요소로 인식됐다. 그렇기 때문에 통일이 되었을 때 ‘통일이 된 독일이 서방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 평화로운 국가로 남아있을 것이다’는 신뢰를 주는 정책이 필요했다. 마찬가지로 한반도에서도 한반도가 비핵화 될 것인가 하는 논란이 있기 때문에 평화를 위한 주변국가에 대한 신뢰정책이 중요한 것 같다.

 

통일의 시점이 왔을 때 서방 파트너 국가가 통일에 동의했던 이유는 아데나워 총리부터 분명하게 친서방 정책을 꾸준히 펼쳤기 때문이다. 독일이 제3의 길을 걸어야 한다는 논의도 있었지만 이를 거부하고 확실하게 NATO, EU에 편입하면서 서방세계의 지지를 얻을 수 있었다.

 

사실 1980년도에 어려운 시기가 있었다. 새로운 핵미사일을 중부유럽에 배치하는 논란이 있었다. 서독의 포지션에 따라 오히려 동서분열이 악화될 수 있었는데 서독이 확실하게 나토, 서방 동맹국과 우호관계를 맺는 정책을 펼침으로써 어려움을 극복했다. 이와 관련해 독일이 미국과의 관계에서 중요한 경험을 했다. 1970~80년대 독일 젊은층을 중심으로 ‘미국은 독일 통일에 관심이 없고, 통일하지 않아야 미국의 군수산업이 발전할 것이다’는 비판적인 시각이 있었다.

 

그런데 아시다시피 동독 주민이 자유와 통일을 외쳤기 때문에 통일이 가능했는데, 이렇게 통일을 외칠 때 가장 먼저 독일 통일을 지지한 것이 바로 미국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당시 미국에 대한 불신은 정당하지 못한 것이었다.

 

두 번째 독일이 친서방 정책을 추진했더라도 그것 하나만으로는 통일을 하기 부족했다는 점이다. 친서방 정책 외에 가장 중요한 것은 빌리 브란트와 발터 쉘이 독일이 이니셔티브 쥐고 통일을 적극적으로 추진해야 한다는 신념에서 동방정책을 추진하게 됐고, 동방정책을 실시한 지 20년 만에 독일이 통일 되게 됐다.

 

빌리 브란트의 신동방정책 성공 이유는 일관되게 정권교체 이후에도 지속되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서독 정부는 20년간 일관되게 긴장완화 정책, 접근을 통한 변화정책을 추진함으로써 통일의 빛을 보게 되었다. 사실 독일 같은 경우에도 20년이란 긴 시간동안 일관된 정책을 추진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동방정책 자체에 대해 독일의 양대 국민정당, 다른 정치 세력들 간에 찬반 논란이 뜨거웠다. 특히 1972년에 서독이 폴란드, 소련 등 동구권 국가와 기본전략을 체결했는데 기본전략 체결이 국회를 통과할지 야당의 반대로 모르는 상황이었다. 당시 이 기본전략 체결에 대해 독일 국회에서 50:50의 찬반 결과가 나오기도 했다.

 

동구권 국가와 맺는 조약, 이 조약을 맺음으로써 신동방정책이 실현될 수 있었는데 국회의원들의 찬반이 정확히 반으로 나뉜 상황에서 동방정책이 실현되도록 결정한 것은 결국 서독 국민이었다. 동구권 국가와 기본전략 체결에 대한 결선투표를 하기 직전 국회가 해산되고, 새로운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시 유권자는 빌리브란트가 이끄는 사민당에 표를 몰아줘서 압승을 했다. 사민당이 그렇게 압승한 적은 그 이후에도 없었다.

 

사실 1972년 기본조약 체결 당시 연방 하원선거가 독일에게는 행운이었다. 선거 이후 사민당이 집권하면서 동구권 조약이 비준되었고 한바탕 홍역을 치르고 나니깐 이후에 보수당이 집권하더라도 국민들이 일관되게 베를린 장벽이 무너질 때까지 동방정책을 지지하게 됐다.

 

1969년부터 1989년까지 20년간 꾸준히 추진된 동방정책은 동서독 양자 간의 성격과 유럽안보협력회의의 틀에서 동서독 화해를 위한 다자간 협력의 성격을 갖는다. 양자간, 다자간 전략을 취했던 것이 독일에는 성공적이었다. 유럽안보협력회의 틀에서 동서 간 대화를 하면서 동구권 국가에 자유를 요구할 수 있었고 이후에 폴란드, 체코, 헝가리에서 민주화 운동이 일어난 것이 이후 독일 통일에 결정적인 영향을 줬다.

 

성공적인 동방정책도 처음 7년만 놓고 보면 동서 간 갈등을 유발하고, 분단을 고착 시키는 정책이라는 인상을 줬다. 동서독이 유엔에 가입하는 등 동독을 한국가로 인정했고, 유련안보협력회의 진행을 보면 독일이 영구히 분단된다는 인상을 갖게 만들었다. 실제로도 동방정책의 내용을 보면 가장 최고로 추구하는 목표는 통일이 아니었다. 동방정책의 최고 목표는 동구권 국가의 자유와 물질적 부였다. 동서진영의 냉전 완화가 가장 큰 목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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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장벽 붕괴이후 콜 총리가 발표한 10개항 프로그램에도 ‘국가연합’이라는 표현이 있을 뿐 통일이라는 표현은 없었다. 동방정책이 구현되는 동안 키워드는 ‘접근을 통한 변화’였다. 이 시기에 모든 분야에서 접촉, 교류가 생겨나고 발전됐다.

 

접근을 통한 변화정책을 추구하면서 서독은 상당한 금액을 동독에 줬다. 대신 동독으로부터 구체적 대가를 받고 줬다. 구체적인 대가에 대해서는 정치적 계산에 의해 가격이 결정됐다. 일례로 ‘프라이카우프(자유를 산다는 뜻으로 서독의 동독 반체제 인사 석방사업)’는 정치범 한 명당 얼마를 줄 것인가에 대해 정치적으로 계산 됐다. 서독에서 동베를린 도로이용비용을 지불하는 것도 정치적 결정으로 가격이 높게 책정됐다. 동독은 그 대가로 서독 주민이 자유롭게 여행하게 해주고 동독 주민이 서독에 갈 수 있게 해주었다. 또 스윙이라고 해서 서독이 동독에 무이자 차관을 주는 것이 있었는데 나중에 최고 8억유로까지 액수가 올라갔는데 동서독 간 교류를 활성화하기위한 정책이었다.

 

물론 서독의 재정 지원에 대해 많은 논란이 있었다. 오히려 이러한 지원이 동독 정권을 고착화하는데 영향을 준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이 전략이 성공적이었다고 평가된다. 당시 동서독 인적 교류가 굉장히 늘어났다. 1970년에 동서독 간 전화건수는 70만 건에 그쳤는데, 1998년에 2500만 건으로 늘었다. 또한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기 직전인 1988년 한해만 보더라도 5천명의 동독 사람들이 서독에 갔다. 20년간 동방정책 결과로 동서독이 서로에 대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을 때도 큰 혼란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 통일은 하룻밤에 급작스럽게 다가왔다. 가장 포인트라고 하면 독일 통일에 대한 결정이 국민에 의해 이뤄졌다는 것이다. 동독 시민들이 ‘우리는 한민족’이라는 구호를 외치며 거리로 나오지 않았다면 독일 통일은 이뤄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한민족이라는 구호만큼이나 유명한 구호가 ‘독일 마르크가 우리에게 오지 않으면 우리가 서독에 가버리겠다’였다.

 

이런 상황이 서독 정부 입장에서는 두 가지 측면에서 압박이 됐다. 동독 주민의 요구를 들어서 단시일 내 통일을 하지 않으면 대량 난민사태가 우려됐고, 소련이 국경을 폐쇄할지도 모른다는 압박감이 있었다. 대부분 동독민이 서독으로 떠나오지 않고 동독에 머물게 하기 위해 몇 주, 몇 달의 시간밖에 없었다.

 

현재 시각에서 보면 그 당시 결정 중에서 쓸데없이 많은 비용을 발생시킨 결정도 있었고, 동독의 경제 살릴 수 있었는데 그것을 완전히 파괴하는 결정도 있었다. 예를 들면 서독 마르크로 동서독 간의 화폐를 즉시 통합하는 결정이라든가, 배상보다는 반환을 우선한다는 소유권 문제 이런 것들이 통일과정에서 상당히 어려웠지만 그 당시에 어쩔 수 없는 결정이었다.

 

흡수통일이라고 하는 서독의 사법제도를 비롯해 서독의 제도가 그대로 동독에 적용됐는데 특히 사회복지 제도가 그대로 통합된 것이 이후에 많은 통일 비용을 초래하게 됐다. 독일 전체의 통일 비용이 1조 6천억 유로라는 말을 하는데 1조 유로 정도가 사회복지에 들어갔을 정도로 사회복지 부담이 컸다.

 

만약에 한국이 독일보다 시간적으로 여유가 있다면 비용을 훨씬 줄이는 통일을 할 수 있다. 독일 같은 통일을 한다면 한국에는 엄청 큰 부담이 될 것이다. 인구도 서독은 6천2백만 명, 동독은 1천2백만이었던 반면 남북은 각각 5천만, 2천4백만 정도 된다. 소득 격차도 동서독 간 격차는 4배 정도였는데 남북은 20배 차이가 나는 것으로 알고 있다. 한반도 통일의 경우 소유권, 사회보장, 화폐통합 등 비용은 줄이면서 대량 탈북사태를 막는 방식으로 결정을 내려야 할 것이다.

 

통일 이후의 과정에 대해 말씀드리겠다. 독일 통일이후 1992년부터 2003년까지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기였다. 하지만 2003년에 ‘아젠다 2010’이 만들어지면서 통일된 독일에서 대대적 개혁을 이루게 된다. 이 개혁 덕택에 통일된 지 25년 된 현재 경제적 번영의 계기가 됐다. 경제적으로 통일되고 20년 지나니깐 그동안 쏟아 부은 비용보다 받은 이익이 더 크다는 결론이 나왔다. 국민들 사이의 마음속의 내적 통일은 경제적 통일보다 오래 걸리고, 40년간 분단됐으면 그 만큼의 내적 통일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을 한다.

 

※본 칼럼은 자치분권연구소 동의 아래 <혁신과 정의의 나라 7차 포럼> 발제문을 칼럼으로 게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