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CEJ 칼럼

보다 정의롭고 모두가 행복한 미래사회를 위해 달리는 경실련의 최근 이야기를 한자리에 모았습니다.
[CCEJ 칼럼] [칼럼] 한반도를 떠도는 재냉전 유령_김근식 경실련통일협회 운영위원장
2013.06.25
7,262

 

한반도를 떠도는 재냉전 유령

 

 

김근식 경실련통일협회 운영위원장

 

1.JPG

 

한반도에 재냉전이라는 유령이 배회하고 있다. 이른바 ‘격’ 논란으로 남북 대화가 무산되는 현실을 목도하면서 상식과 사실 대신 몰상식과 왜곡이 판을 치는 비정상의 한반도야말로 재냉전이라는 시대착오적 유령 말고는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다.

 

김양건만이 장관급이고 나머지는 결코 장관급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내 멋대로 식 고집, 위원장 공석에 6명의 80대 고령의 명예직 부위원장을 제외하면 조평통의 사실상 책임자인 서기국장을 장관급이 아니라고 우겨대는 억지, 기존 장관급회담 대표가 조평통 제1부국장이었음을 애써 무시하는 이중잣대가 사실인 양 통용되고 옹호되는 작금의 현실은 이성과 상식이 우롱당하는 냉전시대보다 훨씬 더 가혹하고 참담한 재냉전 현상이다.

 

회담의 상대방 수석대표를 특정인으로 못 박고 요구하는 것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는 몰상식과 무례함이다. 한·미 FTA 협상에서 우리가 상대방 수석대표를 아무개 아니면 안 된다고 주장할 수 있는가? 김양건 부장을 명시해 요구하고 그만이 장관급 파트너가 될 수 있다는 입장은 북한의 직급 체계를 우리가 결정할 수 있다는 우월주의이자 오만함에 다름 아니다. 대화의 기본이 상대방에 대한 인정과 존중에서 비롯되는 것임에도 북한이 규정한 직급을 우리가 아니라고 판정하는 것은 대화 자체를 불가능하게 하는 일방주의일 뿐이다.

 

이번 남북 대화 무산의 본질은 상대방을 부인하는 냉전적 현상의 재연이다. 냉전이 끝나고 다시 나타난 ‘재냉전’인 셈이다. 탈냉전 이후 화해협력을 해보고 적대와 불신이 자리 잡은 것이어서 훨씬 고질적이다. 이번 남북 대화 무산을 국민 대다수가 지지하고 있는 여론조사 결과가 바로 재냉전의 고약함을 증명한다.

재냉전 상황은 북도 마찬가지다. 남측을 당장 괴뢰라고 부르고 대화는 시작도 안 해본 채 대표단을 철수시키고 더 이상의 대화엔 조금도 미련이 없다고 돌아서버렸다. 이제 한국은 빼고 미국과 담판에 나섰다. 남북의 재냉전은 서로 조금도 뒤지지 않는다.

그동안 남북 관계와 북핵 문제가 제대로 진전되지 않았다는 대북 피로감이 사실은 재냉전을 키워왔다. 피로감은 짜증으로 연결되고 불신과 적개심으로 이어졌다. 두 차례의 정상회담에도 불구하고 남북 관계는 가다 서다를 반복하고 우여곡절을 겪었다. 이명박정부 이후에는 적대와 대결이 심화되면서 회복 불가능한 감정싸움이 진행되었다. 북과는 어떤 일도 잘해볼 수 없다는 막연한 불신이 자리 잡게 되었다. 북핵 문제 역시 합의와 결렬, 도발과 대화를 반복하면서 상황은 오히려 악화되었고 결국 북은 핵무장 병진노선을 공식화해 버렸다. 대화를 통한 핵 문제 해결이 난망하다는 피로감이 팽배해졌다. 남북 관계와 북핵 문제에 대한 피로감과 불신이 차곡차곡 쌓이면서 이제 북한과는 탈냉전적 화해협력이 아니라 굴복시켜야 한다는 재냉전적 대북압박이 지배적인 입장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그러나 재냉전은 시대착오적일 수밖에 없다. 상호 부인과 적대의 재냉전은 결국 긴장 고조와 위기의 일상화와 만성적인 전쟁위협을 동반할 뿐이다. 더욱이 재냉전의 대북압박은 감정적 대응일 뿐 북을 굴복시키지도 변화시키지도 못한다. 정작 중요한 개성공단 입주업체의 절박함과 이산가족들의 절절함은 해결하지 못한 채 북한 길들이기에만 몰두하는 재냉전이야말로 본말 전도의 오기일 뿐이다. 더디고 어렵지만 그대로 한반도는 탈냉전의 상호 인정과 화해협력의 접근을 포기해선 안 된다. 재냉전은 한반도를 떠도는 유령일 뿐이다. 유령은 때려잡아야 한다.

 

본 칼럼은 2013년 6월 18일 중앙일보에 게재된 칼럼으로 필자의 동의 아래 본 칼럼을 게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