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CEJ 칼럼/지방자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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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CEJ 칼럼/지방자치] [자치분권 시리즈 칼럼1] 주민자치, 아래로부터의 개혁
2017.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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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6월 치러지는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6·13지방선거)는 조기 대선 이후 첫 전국 선거로서 문재인 정부의 중간평가 성격을 갖는 것뿐만 아니라, 차기 대권구도를 형성하기 위한 중간단계로 여겨지면서 중앙정치의 대립의 장으로 변질·왜곡될 가능성이 크다. 내년 지방선거는 중앙정부의 중간평가나 중앙 정치의 이슈논쟁으로 지방선거의 본래 취지를 훼손되는 것을 차단하고, 자치와 분권을 실현하는 선거가 돼야 한다. 무엇보다 지역 일자리 등 민생을 살리고, 지역주민의 생활과 밀접한 정책들이 제시될 있도록 해야 한다.
이에 <경실련>은 지방자치 및 분권전문가와 지역경실련이 함께 자치분권의 현안과 현장의 목소리를 매주 1회 칼럼으로 발표하여 지방자치를 다시 생각하고, 현안과제를 해결하는데 기여하고자 한다.

 

주민자치, 아래로부터의 개혁

– 풀뿌리 민주주의의 의미 –


손희준 경실련 지방자치위원장 / 청주대 행정학과 교수


지방(지역)을 “자치(自治)”해 왔는가?

어느 덧 지방자치를 재도입한 지 26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아직도 지방자치와 주민자치에 대한 부정적 시각이 팽배해 있다. 예를 들어, 지방자치는 ‘돈 먹는 하마’이고, 지나치게 지역갈등과 집단 간 반목을 조장하며, 자치능력과 역량이 부족한 동네에서 자기네들끼리 작은 이권을 나누어먹기 위한 수단이고, 우리나라와 같이 국토가 좁은 나라에서 무슨 자치와 분권이냐 라는 비난을 당연하게 받아드리기도 한다.

최근에는 ‘고령화와 저출산 현상’이 급속하게 진행되어, 지방자치를 하기에 군(郡)지역은 지나치게 인구가 적고, ‘규모의 경제’ 효과를 저해하며, 몇몇 과시적인 단체장들의 치적 쌓기에 병들어 가고 있는 대표적인 지역이기 때문에, 인접 시(市)와 통합해 행정구역을 넓히는 것이 유일한 대안이라고도 한다. 어찌 보면 모두 일리 있는 말이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왜 이렇게 무조건 커야 하고, 큰 것이 좋다는 생각을 가지게 된 것일까? 괜스레 작은 것에 대한 지나친 열등의식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 동안 과연 우리가 지방(지역)을 “자치(自治)”해 왔는지도 궁금하다. 자치라고 하면, 문자 그대로 ‘스스로 다스린다’는 것인데, 스스로 다스리기 위해서는 우리가 원하는 지도자를 우리 손으로 뽑고, 지도자가 우리가 원하는 데로 일을 제대로 잘 하는지를 감시하고, 또한 지도자에게 어려운 일이 있을 때에는 더 잘하라고 열심히 지지하고, 만약 잘못하면 우리 손으로 그만 두게 하며, 또한 많은 돈이 들어가는 사업을 반드시 해야 한다면 주민들이 세금을 더 내거나, 아니면 적절하게 빚을 얻어서라도 사업을 하게하며, 우리 지역과 우리 동네의 발전을 위해 진정한 방향과 목표에 대해 모두가 함께 고민해 왔는지를 자문해 봐야 할 것인데 나 스스로도 솔직히 자신 있게 그러해 왔다고 대답할 수 없다.


‘자치’는 없고 ‘지방선거’만 존재

오히려 지난 시간 우리는 우리의 손으로 지방의원과 단체장을 선출하는 ‘지방선거’만을 치러 온 것이 아니었나 싶다. 게다가 뽑아 놓으면 그 다음에는 다들 알아서 잘 하겠지 하고 방임해 오다가, 언론에서 뭔가 문제가 있다고 하면 그때서야 그러면 그렇지 하고 역성을 내고 비난을 하며 아직 우리나라에서 지방자치는 시기상조라고 하는 의문을 제기하는 중앙집권론자와 중앙언론들의 달콤한 선전에 넘어가곤 해 왔던 것은 아닌지 의문이다.

그런 측면에서 본질적인 지방자치, 주민이 주인이 되고, 스스로 결정하며 그 결정에 책임지는 자치는 아직 해 본 경험이 없다고 할 수 있다. 물론 몇몇 지방자치단체와 지역에서는 동네자치와 주민참여 활동이 왕성한 지역도 있어, 오히려 신기할 따름이다. 이렇게 척박한 환경에서 주민들의 자발적인 참여와 시민정신이 밤하늘의 별 빛처럼 빛나는 곳이 있다고 하니 말이다. 실제로 대부분의 주민들에게 해당 지역의 지방의원이 누구냐고 물어보면, 이름조차 잘 모른다. 그러니 그들이 우리를 대표해서 무슨 일을 어떻게 하는지에 대해서도 잘 모르고, 더군다나 우리 지역의 재정은 어떻게 운영되고 있는지 잘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론은 늘 혈세(血稅)가 새고 있다고 하며, 주민들은 오히려 눈 먼 돈은 우리 지역에 더 많이 써야 하고, 더 많은 각종 시설과 더 많은 행사와 축제가 개최되어야 하며, 능력 있는 단체장과 국회의원들을 뽑아 놓으면 항상 지역구에 더 많은 보조금과 국비를 확보했다고 자랑이다.


지방자치의 뿌리와 근본을 더욱 강화해야

이렇게 혼란스러운 현실과 개념상의 혼돈 속에서 과연 주민자치의 본질은 무엇인가? 몇 가지 상상을 해 본다. 우리 동네어귀의 몇 백 년 된 커다란 느티나무는 우리 조부모와 부모가 늘 함께 해 온 곳이며 부모님은 동네 아이들과 같이 놀던 놀이터였다. 또한 느티나무 앞 횡단보도는 버스 정류장이어서 동네 어른들이 모여서 담소하던 곳이었는데, 갑자기 도로를 확장하기 위해 느티나무를 베어낸다고 한다. 과연 무조건 나무를 베는 것이 능사인가? 오히려 그 곳밖에는 도로를 확장할 수 없는가를 주민들이 직접 모여 토의하고, 결정해서 행정관청에 통보하면 안되는 것일까? 시골의 학령인구가 급감하여 초등학교를 폐교해야 하는데 이를 일률적으로 획일적으로 결정해야 하는가? 이 역시도 주민들과 협의하고 머리를 맞대면 폐교조치보다 더 나은 결정은 할 수 없을까? 우리 동네 골목의 보안등은 왜 꼭 거기에만 있고, 유치원과 학교는 왜 그리 사립이 많은가? 조금만 가물면 수도가 안 나오고, 쓰레기 버리기는 왜 그리 복잡한가? 이런 자질구레한 주민요구와 생활의 불편들을 자치가 해결할 수 없는가? 지금까지 우리는 늘 우리의 삶과 생활방식을 누군가가 결정해서 우리에게 강요해 온 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는지 찬찬이 고민해 보아야 할 것이다. 지난 날 중고등학교 시간에 있었던 HㆍR(Home Rule)시간은 학생자치와 학교자치를 위한 귀중한 시간이었지만, 국영수를 잘해야만 좋은 대학에 갈 수 있다면서, 그 시간에 다른 과목의 수업을 받는 것을 오히려 기뻐하지는 않았는지 되돌아보아야 할 일이다.

우리나라의 학교교육은 나만 잘하면 되고, 또한 나만 아니면 다행이고, 머리 좋고 공부 잘하는 학생은 같은 반 학생들을 친구가 아닌 경쟁상대로 인식하여 수능과 학생부에서의 성적 올리기에 급급하여 출세하는 것이 제일이면, 박근혜 정권 적폐의 중심이었던 머리 좋고 고등고시에 합격하여 자신의 입신양명에만 몰두한 우병우, 김기춘 같은 인간들을 양산하고자 하는 것이고 이는 협력과 협동 및 공생의 길을 저버리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조금 힘들고 귀찮고 번거로운 자율과 자치의 길을 버리고, 지금까지의 관습과 습관을 버리지 못하고, 누군가가 결정해서 시키는 일만 잘 하면 되고, 몇 푼 안 되는 돈을 스스로 벌기보다는 남의 돈으로 살면 “다행이다”라는 의존적이며 의타적인 삶의 방식을 쉽게 버리지 못하고 있다.

지방자치의 본질이 ‘풀뿌리 민주주의’이고 지방자치는 ‘민주주의의 학교’라는 토크빌의 격언을 되새기지 않더라도, 아무리 어려운 역경과 급격한 환경의 변화가 몰아쳐도, 주민 스스로가 결정하고 그 결정에 책임질 수 있는 건전한 시민의 양성이야 말로 ‘제4차 산업혁명’의 물결과 AI시대의 도래와 같은 격랑에도 버티게 해 주는 자양분이 될 것이라는 사실은 자명하다. 뿌리가 튼튼하지 않은 보기에만 그럴듯한 나무들은 한 번의 폭풍에도 뿌리 채 뽑히는 것을 목격할 수 있다. 오히려 잔디나 잡초와 같이 뿌리가 튼튼한 풀들이 폭풍이 불어와도 끄떡없이 제자리를 지키는 모습을 통해 지방자치의 뿌리와 근본을 더욱 강화해야 한다는 점을 명심하게 된다.

더욱 강화해야 한다는 점을 명심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