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CEJ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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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CEJ 칼럼] 파레토의 잠꼬대





이근식 경실련 공동대표 (서울시립대학교 경제학과 교수)

 

 

자유주의 얘기만 계속하면 재미 없으니까 오늘은 딴 얘기를 해보자. 엉터리 이론임에도 불구하고, 경제학 교과서마다 실려서 자명한 정설인 양 가르쳐지고 있는 이론이 있다. 파레토 개선과 파레토 최적 이론이 그것이다.

이 이론은 이태리의 저명한 경제학자 겸 사회학자였던 파레토(Vilfredo Pareto, 1848-1923)가 주장한 것이다. 이 이론에 따르면 어느 한 사람도 손해 봄이 없이 사람(들)의 처지가 개선되어야만 확실한 사회적 개선이라고 볼 수 있는데, 소득이나 부의 재분배정책은 그로 인해 부자들이 손해를 보기 때문에 재분배정책이 바람직하다고 확실히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즉 이 이론은 재분배정책의 당위성을 부정한다.

이 이론은 벤담(Jeremy Bentham, 1748-1832)의 기수(基數)적 효용이론을 비판하기 위하여 등장한 이론이므로 먼저 벤담의 이론을 보자. 효용이란 사람들이 재화를 소비할 때 얻는 만족을 말한다. 벤담은 사람들이 느끼는 것은 모두 같으므로 모든 사람들의 효용의 절대적 크기를 객관적으로 측정하여 비교할 수 있다고 보았다. 예를 들어서 철수가 사과 한 개를 먹고 얻는 효용의 크기는 8이고 영희가 밥 한 그릇 먹고 얻는 효용의 크기는 25라고 객관적으로 측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벤담은 돈의 한계효용은 점차 감소한다고 보았다. 예를 들어서 내가 돈 백 만원을 만원씩 소비한다고 해보자. 처음 만원으로는 밥을 사먹고, 그 다음 만원으로는 맥주를 사먹고, 그 다음 만원으로는 책을 사보고, 하는 식으로 돈을 만원씩 소비한다고 해보자. 그러면 벤담은 처음 돈 만원으로 밥 사먹고 얻은 효용은 100, 그 다음 만원으로 맥주 사먹고 얻은 효용은 90, 그 다음 만원으로 책 사서 얻은 효용은 80, 이런 식으로 동일한 금액의 돈을 소비해서 새로 얻는 효용은 점차 감소한다고 보았다. 이것이 화폐의 한계효용 감소의 현상이다. 누구나 가장 중요한 것부터, 즉 가장 효용이 큰 것부터 돈을 쓸 것이기 때문에 이는 당연한 주장이다.

모든 사람의 모든 효용의 크기는 측정가능하며, 돈의 한계효용은 감소하므로 동일한 금액의 돈 예컨대 만원은 가난한 사람보다 부자에게 훨씬 작은 효용을 주며 따라서 돈이 많더라도 그로부터 얻을 수 있는 효용의 비율은 돈의 비율보다 훨씬 작을 것이다. 벤담은 가난한 노동자보다 소득이 5만배인 부자가 느끼는 총효용은 가난한 노동자가 느끼는 총효용의 2배 정도밖에 안될 것이라고 보았다.

당연한 논리적 귀결로 벤담은 소득 재분배정책을 지지하였다. 부자에게서 세금을 거두어 가난한 사람에게 주면 부자가 잃는 효용보다 가난한 사람이 얻는 효용이 훨씬 더 크므로 사회의 총효용은 증가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벤담의 생각은 사람들의 일반적인 상식에도 맞으므로 고전학파 경제학자들도 대부분 이를 인정하여 왔다.

그러나 부유한 사람들에게는 재분배를 지지하는 이러한 벤담의 이론은 매우 불편하였다. 이러한 고민을 한 방에 시원하게 해결하여 준 사람이 바로 파레토였다. 효용은 주관적이고 심리적인 현상이므로 그 크기를 객관적으로 측량할 수 없고 따라서 사람간의 비교는 불가능하고, 단지 각 개인들이 자신의 효용의 크기의 대소를 비교할 수 있을 뿐이라고 파레토는 주장하였다. 즉, 어떤 부자가 수 천 만 원짜리 포도주 한 병을 마실 때의 효용과 며칠을 굶은 가난뱅이가 밥 한 그릇을 먹을 때의 효용을 비교할 수 없고, 단지 가난뱅이가 밥과 빵 중에서 어느 것을 사먹는 것 중 자신에게 더 큰 효용을 주는지를 알 수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이를 파레토의 서수(序數)적 효용이론이라고 한다.

이 이론에 따르면 재분배정책이 사회적으로 바람직하다고 볼 근거가 전혀 없다. 왜냐하면 재분배로 손해를 보는 사람들의 감소한 효용과 재분배로 이익을 보는 사람들의 증가한 효용 중 어느 것이 큰지 비교할 수 없으므로 사회 전체적으로 후생이 증가하였는지 감소하였는지를 객관적으로 판단하기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파레토는 사람간의 효용을 객관적으로 비교할 수 없으므로 어떤 사람의 후생도 감소됨이 없이 적어도 한사람 이상의 후생이 증가되는 것만을 사회적 개선이라고 보았다. 이를 파레토 개선(Pareto improvement)이라고 부르며, 파레토개선이 불가능한 상태를 파레토 최적(Pareto optimality) 혹은 파레토 효율(Pareto efficiency)이라고 부른다. 이 이론에 의하면 아무리 편중된 분배일지라도 현실의 모든 분배는 최적의 분배이며, 어떤 재분배도 바람직하지 않다. 어떤 재분배에서도 손해를 보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즉, 현실의 모든 분배는 파레토개선이 불가능한 최적의 분배이다.

이러한 파레토 이론은 현재 주류경제학의 정설로 교과서마다 실려있다. 그러나 잘 생각해 보면 파레토 이론은 공정분배이론으로도 효용이론으로도 중대한 결함을 갖고 있다.

첫째, 파레토이론은 공정분배 이론으로 자격이 없다. 공정분배이론이 되려면 어떤 분배가 공정한 분배인지 판단할 수 있도록 공정한 분배의 조건을 제시하여야 한다. 그러나 파레토 이론은 어떤 분배가 공정분배인지 말하여 주는 바가 전혀 없이 모든 분배를 공정분배라고 본다. 그에 의하면 현실에 존재하는 모든 분배가 공정분배이다. 그에 따르면 한 사람이 모든 부와 소득을 독차지하는 극단적인 편중 분배도 최적상태이다. 롤즈와 애로우(K.J.Arrow)가 지적하는 바와 같이 파레토이론은 분배정의 이론이 될 수 없다.

둘째로 파레토의 서수적 효용이론으로 재분배의 필요성을 부정하는 것은 논리의 착오이다. 소득이나 부의 재분배가 실시되면, 부자들의 사치재 소비가 줄고, 서민들의 기본재(basic needs; 의식주, 의료, 교육, 교통 등)의 소비가 늘 것이다. 파레토의 주장대로라면, 부자들의 사치재 소비와 서민들의 기본재 소비 중에서 어느 것이 더 큰 효용을 주는지 알 수가 없다는 말이다. 그러나 만약 부자들도 사업에 실패하여 가난뱅이가 된다면 사치재가 아니라 기본재의 소비에 돈을 쓸 것이다. 즉, 부자든 서민이든 소득 수준에 상관없이 모든 사람들에게 기본재가 사치재보다 더 필요하다는 것, 즉 더 큰 효용을 준다는 것은 명약관화한 사실이다. 사람 간에 효용을 비교할 수 없다는 이유로 이 자명한 사실을 부인하는 것은 논리의 비약이다. 내가 밥을 먹을 때의 효용과 내 친구가 수백만원짜리 양주를 마실 때의 효용의 크기는 파레토 말대로 객관적으로 측정할 수 없다. 그러나 이 명제로부터 인간생활에 밥이 비싼 양주보다 더 중요하다는 명백한 사실을 부정하고 재분배의 필요성을 부인하는 것은 논리의 비약과 착오이다. 재분배정책은, 사회전체의 효용을 증대시키기 위해서 실시하는 것이 아니라, 사치재보다 더 필요한 기본재를 가난한 사람들에게 제공하기 위해서 실시하는 것이다.

세째로 서수적 효용이론은 불평등한 인간관을 암묵적으로 가정하고 있다. 부자들도 자신들에게 기본재가 사치재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을, 즉 더 큰 효용을 준다는 것을 인정할 것이다. 따라서 가난한 사람이 기본재의 충족에서 얻는 효용이 부자가 사치재의 소비에서 얻는 효용보다 작을 수 있다고 보는 것은, 부자가 기본재의 충족에서 느끼는 효용이 가난한 사람이 기본재의 소비에서 느끼는 효용보다도 더 클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부자가 효용을 느끼는 능력이 가난한 사람보다 더 크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견해는 분명히 사람이 평등하지 않다고 보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것이 모든 사람이 동일한 소비에서 동일한 효용을 얻는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사람마다 취향과 입맛이 서로 다른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이것을 근거로 모든 사람에게 기본재가 사치재보다 더 필요하다는 객관적 사실을 부정하고 재분배정책의 당위성까지도 부인하는 것은 논리의 착오이다. 기본재가 충족되어 생활이 가능해진 다음에야 개인적인 선호가 의미가 있을 것이다.

효용이 심리적 현상이라는 것은 말장난이다. 효용에는 심리적 효용만이 아니라 실제적 효용이 있고, 실제적 효용이 소비의 주 목적이며 심리적 효용보다 더 중요하다. 밥을 먹을 때 맛을 즐기는 것은 심리적 효용이고 영양을 섭취하는 것은 실제적 효용이다. 소비에서 일차적으로 중요한 것은 심리적 효용이 아니라 실제적 효용이다. 우리가 밥을 먹는 주 목적은 영양을 섭취하여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이지 맛을 즐기는 것은 부차적이다. 파레토도 한 끼만 굶어 보았다면 이런 잠꼬대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심리적인 효용은 객관적으로 비교할 수 없다. 그러나 실제적 효용은 그렇지 않다. 모든 사람에게 생존과 기본생활에 필요한 기본재의 효용은 사치재의 효용보다 분명히 더 크다. 파레토의 서수적 효용이론은 경제학에서 말장난으로 사실을 호도한 대표적 예이며, 이론의 발전이란 장막 뒤에 계급적 이해관계가 숨어있는 대표적 예이다. 이런 이론을 제시한 파레토도 문제이지만, 지난 백 년동안 이 이론을 정설로 가르쳐온 경제학자들이 더 한심하다.

 

 

/이근식 서울시립대학교 교수 메일보내기

 

※ 이 글은 프레시안(http://www.pressian.com 2011년 8월 10일)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