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CEJ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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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CEJ 칼럼] 한반도 평화, 결국 모두가 변해야 한다

결국 모두가 변해야한다


-2010년의 한반도 정세를 바라보며-


전현준(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사)경실련통일협회 운영위원장)


2010년은 참으로 다사다난했던 한해였다. 3월 26일 천안함 사태 이후 11월 23일 북한의 연평도 포격에 이르기까지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다. 지금도 진행 중인 남북한 및 미·중간 긴장은 언제 또다시 전면전으로 치달을지 모르는 상황이다. 언제나 우리는 항구적인 평화 속에서 편안히 살 수 있을 것인가?


역사적으로 분단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1945년 8월 15일 우리는 그토록 염원하던 일제로부터 해방을 맞이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완전한 의미의 해방이 아니었다. 한반도는 당시 전승국이었던 미국과 소련에 의해 ‘3·8선’을 기준으로 양분됨으로써 ‘불완전한’ 통일을 맞았다. 그러나 해방직후 남북한 양측 지도자들은 이념과 사상을 초월한 민족국가로 만들기 위한 노력을 하기보다는 모두 ‘자기식대로’ 통일을 이룩하기 위하여 투쟁하였다. 이로 인해 남북한에서는 ‘적 아니면 아군’이라는 2분법적 논리에 의해 각종 테러가 난무하였다. 그 결과 권모술수에 능하지 못한 수많은 ‘순진한’ 애국지사들이 진정한 통일을 보지 못하고 숨져갔다.


‘자기식대로’의 통일주장은 극단적인 형태로도 나타났는 바, 그것은 북한의 무력에 의한 통일시도였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통일만 되면 된다는 식의 ‘결과지상주의’는 우리 민족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겨주었다. 한국전쟁으로 인해 500만 명 이상의 인명 피해가 났고, 거의 모든 산업시설이 파괴되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비극적인 일은 한국전쟁으로 인해 상대방에 대한 극도의 증오심이 배태되었다는 점이다.


한국전쟁은 외세를 불러들여 왔고, 외세에 의해서 정전체제가 수립되었다. 정전체제는 말 그대로 전쟁을 잠시 멈추게 한 것일 뿐이다. 이것은 한반도에서는 언제든지 또 다시 전쟁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한반도의 항구적인 평화를 위해서는 하루속히 정전체제가 평화체제로 전환되어야 한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것은 우리의 뜻대로 되지 않도록 되어 있다. 우리는 정전체제 서명당사 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정전협정이 체결될 당시와 현재와는 다르기 때문에 우리도 평화협정 체결의 당사자가 될 수 있다는 ‘상황논리’가 있다. 그러나 북한이나 강대국들은 이러한 우리의 주장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특히 북한은 북·미간 평화협정에 의해서만 정전체제를 평화체제로 바꿀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따라서 기본적으로 남한을 대화의 독립된 상대로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북한은 남한을 ‘북한의 일부’로 상정하고, ‘미제의 괴뢰’로 인식하고 있다. 이러한 인식 때문에 우리가 북한을 ‘주적’으로 보는 것과는 달리 북한은 미국을 ‘주적’으로 상정하고 있다. 북한이 미국과만 평화협정을 체결하려 하고, 진정한 의미의 남북대화를 기피하려는 소이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북한이 추구하는 국가목표는 논자에 따라 다르겠지만 미국으로부터의 체제안전 보장과 연방제통일국가 수립으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따라 북한은 그동안 미국과의 관계 개선과 함께 ‘주한미군 철수’를 지속적으로 추진하는 한편, 남한에 대해서는 연방제통일 방안의 수용을 줄기차게 주장해 왔다. 그러나 미국의 국가목표는 ‘미국식 민주주의’의 ‘세계화’에 있기 때문에 미국의 국가목표에 반하는 어떤 국가에 대해서도 관용을 보이지 않는다. 미국은 이러한 목표달성을 위해서는 수많은 비용은 물론 자국 젊은이들의 고귀한 피까지 바친다. 이러한 전략적 목표를 가진 미국은 ‘타도대상’인 북한을 대화의 상대로 인정하지 않았다. 역대 미국 정부는 ‘先남북대화, 後미북대화’를 대한반도 정책기조로 삼았다. 미국이 북한과 직접 대화하는 것 자체가 북한의 실체를 인정해 주는 것이 되기 때문이었다. 이에 대해 북한은 어떻게든 미국과의 직접대화의 빌미를 만들려고 노력했다. 이를 관철하기 위해 핵무기, 미사일, 생화학 무기 등 대량살상무기 개발을 직접 대화의 수단으로 삼았다. 이것은 미국을 비롯한 서방세계를 자극하였고, 어떤 경우에라도 북한의 핵무기 개발을 저지하고 나아가 김정일 정권을 교체(regime change)해야 된다는 논리를 갖도록 하였다. 북한은 강력히 저항하면서 2회에 걸친 핵실험을 강행하였다. 6자회담은 파탄이 났고, 어떤 접점도 찾기 힘든 상황이 도래하였다.


현재 교착상태에 빠져있는 북미관계가 개선되기 위해서는 북한이 미국을 무력으로 제압할 수 없는 한, 먼저 최소한의 개방을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그 형태는 ‘중국식’일 수도 있고, ‘베트남식’일 수도 있다. 비록 북한이 IT산업을 육성하고 ‘모기장식’ 개방을 하고는 있지만 현재로서는 미국이 만족할만한 수준은 아니다. 미국은 현재 ‘대테러 전쟁’을 통해 진정한 의미의 유일패권국가가 되었다. 중국이 ‘G2 ’가 되었지만 아직까지는 세계 어떤 국가도 미국과 대적할 만한 힘을 갖고 있지 못하다. 따라서 북한은 오바마 정부와의 대화를 적극 추진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물론 미국도 대화를 원하고 있다. 그러나 북한이 개방하지 않는 한 북미관계가 본질적으로 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한편, 솔직히 표현하자면 남북관계는 북미관계의 부차적 문제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 이유는 한반도 문제가 강대국 논리에 의해 좌우되어 왔고 북한이 겉으로는 ‘자주’를 외치면서도 실제로는 남한을 대화 상대자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특히, 미국은 한반도 문제에 절대적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물론, 미국은 남한을 공산화로부터 보호해주었고, 근대화에 필요한 자금과 자원을 제공해 주었기 때문에 남한에 대한 영향력이 클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제 남한도 ‘정치적’ 연령이 65세가 넘었다. 모든 것을 스스로 판단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남한을 유아처럼 보호하려하고 있다.


아울러 남북관계가 독자적으로 움직이지 못한 데에는 북한 책임도 크다. 주지하듯이 남한을 ‘자주국가’로 인정하지 않은 북한은 남한을 자신들 멋대로 요리하였다. 북한은 남한과 대화를 하고 싶으면 하고 그렇지 않으면 언제든지 중지하였다. 그리고 ‘7·4 남북공동 성명’을 비롯한 모든 합의를 자신들이 유리한대로 해석하여 적용하였다. 이러한 북한의 태도는 그들이 늘 주장하는 ‘민족공조’와는 거리가 먼 것이다. 비록 남북 정상회담이 이루어졌지만 기본적인 대남인식과 전략은 변하지 않고 있는 이유도 그들의 대남인식이 변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남북관계가 근본적인 전환을 이루려면 북한의 대남인식이 근본적으로 변화되지 않으면 안된다.


그렇다고 한반도 문제와 관련하여 남한의 책임이 전혀 없다는 것은 아니다. 남한은 그 동안 미국의 ‘핵우산’ 아래서 안보에 대한 큰 부담없이 경제발전을 이룩해 왔다. 남한 경제발전은 미국의 원조, 정치적 통합력, 양심적 사업주 및 관료들의 헌신적 봉사, 근로자들의 피와 땀 등의 합작품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유의해야 할 점은 남한이 건국을 위해 친일파의 경험을 활용하였고, 경제발전을 위해 36년간 우리를 괴롭힌 일본과 수교하였으며, 통일환경 조성을 위해 한국전쟁의 책임자들인 소련 및 중국과 조건없이 수교하였다는 점이다. 이것은 결국 국가이익 내지는 민족이익을 위해서는 어떤 벽도 초월할 수 있다는 것을 웅변해 보이는 것이다. 어떤 면에서 그 만큼 남한이 수용의 폭 이 크고, 선택의 폭이 넓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 민족을 괴롭힌 일본이나 중국은 용서가 되어도 북한은 용서가 되지 않은 것일까? 왜 우리는 수백만 명의 북한동포가 죽어 가는데도 남의 일처럼 생각하고 국력에 비하면 시쳇말로 ‘새발의 피’ 밖에 되지 않는 대북지원에 대해 ‘퍼주기론’으로 이전 정부를 맹공할까? 이러한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지 않고서는 북미관계와 남북관계에 대한 해법을 찾을 수 없다. 필자는 북한에 대해서만은 아직도 ‘레드 콤프렉스’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과 일부 인사들의 남북문제의 ‘정치적 이용’때문일 것으로 생각한다. 한반도 문제는 남한, 북한, 미국이 변수가 된 ‘3차방정식’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수학적 3차방정식이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3차방정식이다. 즉, 한반도 문제는 ‘1+1+1=3’이라는 수학적 계산이 아니라 ‘1+1+1=?’라는 ‘인간적 계산’이다. 이러한 ‘ 인간적 계산’은 어떤 사회과학자도 풀 수 없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물론 알렉산더 대왕이 복잡하게 꼬인 ‘고르디아 매듭(Gordian Knot) ’을 단칼에 잘라버리고 아시아의 맹주가 되었듯이 미국과 남한이 힘을 합쳐 북한을 붕괴시켜버리면 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바람직하지도 않다. 그처럼 ‘처절한 대가를 치르고 획득한 승리(Pyrrhic victory)’가 참 승리일 것인가? 그리고 무슨 의미가 있을 것인가? 그렇다면 해법은 무엇인가?


첫째, 미국의 태도변화이다. 우리가 인정하든 안하든 미국은 한반도 문제의 제1 변수다. 아니 변수가 아닌 상수일지도 모른다. 미국은 ‘로마에 의한 세계평화(Pax Romana)’시대보다 훨씬 강력한 국제정치적 권력을 소유하고 있다. 특히, 사회주의권 붕괴이후 ‘주적’은 소멸된 상태이고 중국이라는 ‘잠재적 적’이 존재할 뿐이다. 북한은 분명 ‘이상한’ 나라이다. 그러나 이를 힘으로 제압하려 한다면 엄청난 피해가 발생할 것이다. 물론 그 피해당사자는 남북한 주민들이 될 것이다. 따라서 미국은 북한이 명백한 도발행위를 하지 않는 한 대화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지를 가져야 한다. 그 동안 미국은 세계도처에 흩어져 있는 독재국가를 ‘근대화 전략’을 통해 변화시켜 왔다. 경제적 근대화는 정치적 민주화를 갈구하게 되어 있다. 우리는 한국전쟁이라는 쓰라린 과거를 가지고 있고 이것은 아직까지도 우리민족에게 업보로 남아있다. 한반도에서 더 이상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된다. 미국은 1994년 6월 북한을 공격하려 했었다. 만일 그 당시 미국이 북한을 공격 했다면 어떤 결과가 발생했을 것인가?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둘째, 북한의 태도변화다. 북한은 수정주의자들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한국전쟁의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다. 민족통일은 무력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역사적으로 수없이 많은 전쟁이 있어 왔다. 거기에는 민족간의 전쟁도 있었고 이민족간의 전쟁도 있었다. 그러나 어떤 민족이 승리했다고 해서 민족문제가 영원히 해결된 적은 별로 없다. 고대로 올라갈 것도 없이 제1, 2차 세계대전과 이스라엘·팔레스타인의 경우가 대표적인 사례다. 어떤 면에서는 북한의 처지가 이해는 된다. 전통적인 우방이었던 중국과 러시아가 자국의 안보를 지켜주지 못할 것이고 특히, 미국이라는 전혀 다른 이념을 가진 강대국의 위협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군사력과 철통같은 통합력을 지녀야 살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북한이 아무리 군사력을 증강한다고 해도 약소국임에는 틀림없다는 사실이다. 약소국이 사는 길은 주변에 우호세력을 만들어 적대국을 견제하는 방법(balancing)과 적대국과 적당히 타협하면서 살아가는 방 법(band wagoning)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현재 북한의 처지는 옛날처럼 도와줄 나라가 없다. 그렇다면 적대국과 타협할 수밖에 없다. 즉 미국과 대화하는 방법 외에는 대안이 없다. 다만 ‘당당하게’ 타협하느냐 그렇지 않느냐는 문제는 전적으로 양국간의 문제이다.


셋째, 남한의 태도변화이다. 남한은 현재 선진사회로 가기 위한 과도기적 단계를 거치고 있다. 정치적으로는 ‘인치 사회’로부터 ‘제도화된 사회’로 가기 위한 진통을 겪고 있다. 경제적으로는 각종 비리와 불평등구조로부터 맑고 평등한 사회로 가기 위한 노력이 진행 되고 있다. 여기에서 발생하는 각종 진통은 ‘해산의 고통’보다 더 클지도 모른다. 이것은 어쩔 수 없이 거쳐야 할 단계이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이념갈등이나 지역갈등을 해결하려는 노력은 약한 상태이다. 오히려 이것을 이용하여 정치적 이득을 보려는 세력이 아직까지 잔재해 있다. ‘무조건 반대’와 ‘내가하면 로맨스, 상대방이 하면 불륜’이라는 관행을 깨려는 노력도 미미한 상태이다.


기본적으로 분단구조에서 파생 된 ‘색깔론’과 정권투쟁과정에서 배태된 ‘지역감정’이 그대로 존속되는 한 남북관계의 획기적 개선은 불가능하다. 더욱 비극적인 것은 이러한 감정이나 정서들이 후대에게로 전수되고 있다는 점이다. 결국은 모두가 변해야 한다는 것으로 귀결된다. 새해 2011년은 그야말로 진정한 변화가 가슴으로 느낄 수 있는 한 해가 되길 기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