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CEJ 칼럼

보다 정의롭고 모두가 행복한 미래사회를 위해 달리는 경실련의 최근 이야기를 한자리에 모았습니다.
[CCEJ 칼럼] [함께 걷다] 카구구의 린다와 오딜라

[함께 걷다] 카구구의 린다와 오딜라



르완다 마을의 끔찍한 역사, 그곳에 공존하는 평화

 

정의정 국제팀 간사

ejeong@ccej.or.kr

 

린다와 아이들.jpg

▲ 린다와 아이들

 

처음 그녀를 만난 것은 이제 막 적응하기 시작한 르완다 생활에서 무엇인가 활력이 필요하다고 느낄 때였다. KOICA 봉사단원으로 있는 친구와 함께 봉사활동에 따라갔다가 린다를 만나게 되었다. 숱 많은 붉은 곱슬머리에 우렁찬 목소리의 린다는 중년의 나이로 보이는 미국인 사진작가였다. 그녀는 르완다 수도인 키갈리의 한 마을인 카구구에서 형편이 어려운 아이들을 돕는 1인 활동가였다.

 

린다는 일주일에 한 번 카구구 학교에서 주변사람들에게 기증받은 디지털 카메라를 아이들에게 나누어 준다. 카메라를 받은 아이들은 2~3시간 정도 무리를 지어 마을을 돌아다니며 마을 사람들의 사진을 찍어준다. 보통은 하얀 벽을 배경으로 한 신분증 사진, 혹은 갓 태어난 아기의 모습을 남기고자 하는 사진들이다. 이렇게 아이들이 찍어온 사진을 휴대용 사진 현상기로 인화하고 아이들은 현상료를 받아 생계에 보탠다. 전문가의 솜씨는 아니지만, 시내 중심의 사진관에 가서 사진 찍는 것이 부담스러운 마을 사람들에게는 가격도 저렴하고 나쁘지 않은 딜이다. 아이들은 사진을 현상하는 동안, 간식을 먹고 노래를 부르며 수다를 떤다. 어떤 날은 ‘추상’을 주제로 카구구 학교를 구석구석 돌아다니며 아름다운 작품을 만들어낸다.

 

아이들이 카메라를 가지고 돌아다닐 때만큼은 평소 형편이 어려워 무시해 온 주변 동네아이들 앞에서 의기양양한 모습이다. 게다가 백인 린다와 백인 비스무리한(?) 나까지 함께 어울려 다니니 카메라를 맨 어깨가 더 으쓱해진다. 이 아이들 중 르완다어를 인사수준밖에 구사하지 못하는 나와 자유로운 의사소통이 가능한 아이는 오딜라 뿐이었다.

 

오딜라의 부모님은 1994년 르완다 제노사이드(대량학살) 때 돌아가셨다고 한다. 오랜 벨기에 식민통치기간을 거치는 동안, 함께 어울려 살던 르완다 사람들은 외모에 의해 다수족인 후투족과 소수족인 투치족으로 구분되었고, 벨기에 식민정부는 르완다를 지배하기 위해 투치족은 상위 계급으로, 후투족은 하위 계급으로 규정했다. 독립 이후에도 이 계급화는 지속되었고 그 갈등은 점점 커져 1994년, 후투족 출신의 르완다 대통령이 타고 있던 비행기가 격추당한 것을 시발점으로 제노사이드가 발생했다. 물론 비행기 사고는 후투족의 계략이었다. UN병력은 270여명을 남겨두고 철수했고, UN을 비롯한 국제사회가 주저하는 동안 몇 주 만에 80만 명 이상의 투치족이 살해당하고 약 25만 명이 강간당했다. 투치족 르완다애국전선(RPF)은 제노사이드를 일으킨 후투족을 르완다 밖, 콩고민주공화국(DR Congo)으로 쫓아내고 공격하였다. 이는 아프리카 세계대전으로 불리는 제 2차 콩고내전으로 확대되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카구구 아이들.jpg

▲ 키구구 아이들의 사진전에서

 

카구구아이들의 사진전에서.jpg

▲ 키구구 아이들의 사진전에서

 

 

린다는 여전히 카구구 아이들과 사진을 찍는다. 린다를 통해 아이들은 자신의 꿈을 펼쳐 나가고 있다. 과학선생님이 꿈인 오딜라는 린다가 모금하는 후원으로 기숙학교에서 공부를 하고 있으며 린다의 보조선생 역할을 하던 테오는 사진학과를 졸업한 후 카구구 학교 앞에 사진관을 열었다. 짧은 시간을 보내고 떠나온 나와는 달리, 아이들을 계속해서 지켜봐주고 그 성장을 함께 해오는 린다라는 활동가가 있다는 것이 너무나 다행이라 생각된다. 국제개발이론을 배운 것도 아니지만, 아이들의 자립을 돕고, 역량을 강화하여 성장시키는 활동을 하고 있는 린다야말로 카구구에 꼭 필요한 활동가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