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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CEJ 칼럼] 쌀 시장 전면개방, 박근혜 대통령이 시켰나?_김성훈 소비자정의센터 대표

쌀 시장 전면개방, 박근혜 대통령이 시켰나?

[김성훈 칼럼] 협상도 안 해 보고 미리 옷 벗겠다는 통상 당국자들

“농업을 시장논리에만 맡길 수 없습니다. … 농업 문제만큼은, 제가 직접 챙기겠습니다.” 

이는 박근혜 대통령 후보자가 대선운동 막바지였던 2012년 11월 19일 한국농업경영인 중앙연합회 대선후보 초청토론회에서 밝힌 ‘농정 의지’의 한 대목이다. 

1년 7개월이 지난 6월 28일 주말, 서울 도심에서는 정부의 ‘쌀 수입관세화 전면개방’ 방침에 반대하는 수많은 농민들이 3보 1배를 진행했다. 이에 호응한 시민, 대학생, 여성, 노동단체 회원 등 1만여 명은 “쌀 시장 전면개방 저지! 식량 주권과 먹거리 안전 지키기!”를 목청껏 외쳤다. 그리고 “의료, 철도 민영화 반대, 노동기본권 쟁취,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도 굳세게 요구했다. 정부의 신자유주의 친기업 자본 정책을 만천하에 성토하는 범국민적인 시국대회였다. 경찰은 물대포를 쏘며 진압을 시도했고 청와대 쪽으로 향하는 20여 명을 연행까지 했다. 

‘세월호 참사’ 파동이 사그라지는 듯하자, 박근혜 정부가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정부 당국자들이 다투어 그동안 숨겨 놨던 국가적 통상현안인 ‘쌀 수입 관세화 전면개방 불가피론’을 언론에 흘리기 시작했다. 박근혜 정부 특유의 국민과 소통 없는 일방적인 행사를 이곳저곳에서 개최해 농번기임에도, 반대 농민 일부를 시위에 불러내는데 성공한 듯싶다. 부쩍 잦아진 정부의 일방적인 홍보성 행사와 언론을 통해 흘러나온 반(反) 농업적인 통상개방 정책이 마침내 농민, 시민, 노동자를 자극해 아스팔트 위의 반정부 저항운동으로 뭉치게 한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쌀 시장 전면개방을 지시했을까’라고 궁금해하는 시위자도 있었지만, 이미 무리 속에 ‘박근혜 퇴진’ 피켓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최초의 쌀 수입 부분개방을 운명 지은 우루과이 라운드 협상

이날 행사를 지켜본 필자는 언젠가 어디선가 봤던 ‘데자뷰'(dejavu, 旣視感)에 한없이 빠져들었다. 

지금으로부터 20여 년 전인 1993년 12월 15일 우루과이 라운드(UR) 협상 타결을 전후로, 1992년 단군 이래 최초로 187개의 시민단체·여성 소비자·환경/보건·종교·노동·학생·사회 운동·학계·농민 단체 등이 연합해 ‘우리 쌀 지키기 (UR 반대) 범국민 비상대책회의(이하 비대위)’를 꾸렸고, 경실련 농업개혁위원회를 책임 지고 있던 필자를 상임 집행위원장에 위임했다. 대한민국 유사 이래, 최초의 대안적 시민운동을 주도하던 시절이 겹쳐 떠오른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UR 협상이란 1986년 9월 우루과이의 세계적 휴양지 푼타 델 에스테에서 세계 각국의 통상무역 정부대표들이 모여 무역을 통한 세계 평화증진이라는 미명하에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 규범을 전면적으로 개정할 것을 시도하는 모임이었다. 물론 미국이 주도했다. 2차 대전 후 유럽․일본․아시아 개도국들의 급속한 경제발전으로 제조공산품 분야에서 미국의 비교우위성이 크게 위협받자, 미국은 그때까진 주로 공산품 분야의 무역자유화에 한정되어 있던 GATT 협정을 자국의 경쟁력이 우월해진 농산물과 서비스(금융 등) 분야 그리고 지적 재산권 분야로 넓혀 관세 감축과 시장 자유화를 새 규범으로 포함하려 한 대(大)변혁이었다. 

특히 미국의 카길사 등 다국적 기업들이 정부에 앞장서 UR 협상을 통해 ‘예외 없는 관세화(시장개방)’와 ‘농업 등 취약산업에 대한 정부 지원의 중단(de-coupling)’ 등 새로운 규범 만들기에 광분했다. 당시 우리나라는 박정희 군사 정권 이래, 꾸준히 농업부문의 희생을 기반으로 한 수출 주도의 급속한 공업발전 전략을 추진, 농업 부문의 국제 경쟁력이 지극히 낙후되었다. UR 협상이 타결되면, 그 피해가 막심할 것이 자명했다. 그 결과 식량주권과 농업부문 몰락을 우려하는 범국민적인 공감대가 전국적으로 확산돼 쌀과 14개 기초농산물만은 어떻게 해서라도 지켜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됐으며, 당시 활동하던 187개 시민단체 대부분이 자진해 하나로 똘똘 뭉친 것이다.

필자는 유엔 FAO(국제식량농업기구) 식품유통·금융·협동조합 담당관으로 재직할 당시 푼타 델 에스테의 UR 협상 개시에 옵서버 자격으로 잠시 참관했었다. 그 후 임기를 마치고 중앙대학교에 복귀했으나 노태우 정부에서 우리나라가 맺은 조약, 즉 UR 협상이 장차 우리 농업 농촌과 전반적인 민생경제에 얼마나 어떻게 파괴적인 영향을 미칠지 그 의미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 이후 우루과이 라운드 협상이 무르익어 갈 무렵 우리나라에는 정치의 계절이 왔다. 김영삼 대통령 후보는 1992년 12월 대선 캠페인 중 “쌀 개방만은 대통령직을 걸고 절대 막아 내겠다”고 연설했다. ‘떠나가는 농어촌에서 돌아오는 농어촌으로 만들겠다’는 슬로건 하에 10대 공약과 200여 항목의 정책 약속을 담은 ‘나의 신농정 구상’을 발표하며 농어민의 적극적인 지지를 모았다. 그리고 대통령에 당선됐다. 

앞서 말한 ‘데자뷰’가 바로 이것이다.

김영삼 “대통령직 걸고 한 톨의 쌀도 개방하지 않겠다” 

김 대통령의 의지를 반영하려는 듯 협상을 마무리 짓기 위해 제네바로 떠나는 김포 비행장에서 우리나라 농업협상 대표 허신행 농림부 장관은 ‘목을 걸고 쌀 개방만은 막아내겠노라’는 비장한 인터뷰까지 했다. 그때만 해도 ‘우리 쌀 지키기 비대위’는 특이하게 학계 및 정관계 엘리트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예컨대 청와대의 최양부 박사와 농림부의 조일호 차관보와도 수시로 대화했다. 그리고 비대위에는 미국 정부 및 상하원, 제네바 가트 등의 협상 동향과 전략을 거의 며칠 안에 파악할 수 있는 국제적 네트워크와 인적·물적 연락망을 갖추고 있었다. 

언제나 비대위의 성명서가 정부의 정책 발표보다 앞섰다. 정부는 사실이 아니라고 처음엔 부정하기에 급급했다. 나중에 정보를 입수하고 난 다음에야 수긍하는 주객이 전도된 사태가 비일비재했다. 당시 우리 정부 UR 관련 해외 통상정보시스템이 얼마나 비효율적이었던지 매번 비대위의 발표에 뒷북을 치기 일쑤였다. 오죽했으면 최인기 농림수산부 장관은 취임하자마자 비대위에 직접 전화를 걸어 ‘새로운 사실을 성명서나 언론에 발표한 다음에라도 제발 관련자료를 자기에게 보내달라’고 부탁했을 정도였다. 최 장관에 앞서 두 명의 농림부 장관이 협상 중도에 하차하게 된 것 역시 해외 동향과 정보 파악을 제대로 하지 않은 상태에서 상황 판단을 그르쳤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비대위는 일본이 UR 협상 최종 타결 전에 미국과 암묵적으로 UR 농업협정에서 쌀 시장을 먼저 부분개방(MMA, 즉 최소시장 의무개방)한 뒤, 5~6년 후 고율관세로 개방을 할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했다. 그리고 프랑스가 문화 예술(영화) 분야의 시장자유화는 UR 협상을 깨는 한이 있더라도 사활을 걸고 반대할 것이라는 정보도 입수했다. 아니나 다를까, 발라뒤르 프랑스 총리는 “고립을 피하기 위해 나쁜 협상인 줄 뻔히 알면서도 대세라고 해 받아들이려는 것은 거짓 용기이다”(1993년 12월 1일)라고 UR 협상 중단 불사 대국민 연설까지 했다. 그래서 비대위는 정부 당국에 UR 협상에서 ‘예외없는 개방’ 원칙은 항목, 품목, 국가에 따라 지켜지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을 주지시키려 발버둥쳤다.

우리나라는 5000년 역사상 “쌀이야말로 겨레의 피요 살이요 혼이며 문화이니, 결단코 개방할 수 없다”고 버틸 것을 정부 당국에 주문하기도 했다. 그래야 일본, 필리핀, EU 등 다른 나라도 동조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아울러 미국과 프랑스, 노르웨이도 꼭 지켜야 할 농업 품목이 있다는 사실을 구체적으로 적시했다. 그러나 우리 정부는 미국 정부의 집요한 통상압력에 굴복해 마침내 MMA로 쌀시장 부분개방(관세화개방은 10년 유예, 그 후 재협상)을 조건으로 나머지 14개 기초농산물(한우, 마늘, 양파, 과일 등)과 모든 농산물의 예외없는 관세화 개방을 받아들였다. 이렇게 사실상 빈털터리로 UR 협상이 타결되자, 국민 여론은 최악으로 악화됐다. 황인성 국무총리를 비롯한 김영삼 정부 초대 농림·상공 두 장관이 모두 사퇴하는 ‘문민정부’ 최대의 불상사가 발생했다.


처음 밝히는 이야기 하나 : 장관직 제의

김 대통령은 1993년 12월 7일 UR 협상에서 ‘쌀 개방 저지’ 대선 공약을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해 공식적으로 대국민 사과를 했다. 대통령으로서는 그해 2월 취임 후 첫 번째 하는 대국민 사과였다. 

며칠 후 평소 면식이 있던 김덕 국가안전기획부장으로부터 만나자는 전갈이 왔다. 김 부장은 UR 협상 과정에서 정부 실패에 대한 필자의 설명을 경청한 다음, 단도직입적으로 즉각 농림수산부 장관을 맡으라고 했다. 필자는 그것이 김 부장의 사견인지 대통령의 전언인지부터 먼저 물었다. 김 대통령의 뜻임을 확인한 다음, 생각 끝에 다음 세 가지 이유를 들어 단호히 사양했다. 

“첫째, 187개 단체가 참여하는 범국민 비대위 상임집행위원장으로서 UR 협상이 국민 여망에 어긋난 채 타결된 시점에서 국민의 기대를 저버린 입신양명(立身揚名) 행위는 자칫 모욕을 안겨주는 처신일지 모른다. 둘째, 친형제처럼 30여 년을 동학한 허신행 장관이 현재 스위스 제네바에서 곤욕을 치르고 있는데 선배로 그 자리를 밀어내고 장관이 된다는 것은 인간으로서 취할 정도(正道)가 아니다. 셋째, 설사 장관에 임명된다 하더라도 국민 호도용 땜질 인사가 돼 평소 닦아온 소신을 농정(農政)에 제대로 펼 수 있을지 의문이다.”

김 부장은 시종 겸허하게 이야기를 경청하더니, 사흘의 말미를 줄 테니 좀 더 숙고해 답해 달라고 권했다. 

사흘째 되던 날, 필자는 비대위 상임 집행위원장으로서 종묘 앞 광장에 UR 반대 집회(8000여 명의 학생 시민 시위대)를 긴급 소집해 머리와 가슴에 ‘UR 반대’ 완장을 두른 채 김 대통령을 향해 UR·농업관련 반대 구호를 내리 스무 개나 선창했다. 그것이 청와대에 대한 나의 답변이었다. 


말라케쉬 파동의 전말, “UR 협정문은 1字 1劃도 못 고친다”

마침내 1993년 12월 15일 총리와 두 장관의 사퇴를 부른 UR 협상이 타결됐다. 하지만 UR 협상이 끝난 것이 아니었다. 비대위의 해외 안테나에는 미국과 EU 등이 다음 해 2월 25일로 예정된 참가국의 최종 실행 이행계획서 제출을 결정짓는 말라케쉬 협상(실제로는 1994년 4월 타결)에 즈음해 UR 협정문과 다르게 일부 내용을 변조, 다른 실행계획서를 제출할 것이라는 정보가 입수됐다. 특히 미국 정부는 자국의 수퍼 301조가 UR 협정에 우선한다고 주장하는 국회의 권유를 받아들여 일부 이행 스케줄을 변경해 제출할 것으로 파악됐다. 그리고 이를 법률적으로 뒷받침(규정)하는 UR 이행 관련 법률(초안)을 준비 중인 것으로 확인됐다. 비대위는 초안 서류뭉치도 입수했다. EU 국가와 호주도 비슷한 수정작업을 마치고 제출을 준비하는 중이었다. 

그래서 비대위는 우리 정부 역시 UR 농업협정문의 쌀 및 기초 농산물 관련 이행계획서를 현지 사정에 맞게 수정·재협상 하라고 강도 높게 주장했다. 연일 격렬한 시위도 벌였다. 그러자 신임 이회창 총리가 국회에 나와 UR 협정문은 120여 개국이 합의해 타결한 것이므로 ‘일자 일획’도 고칠 수 없다고 답변했다. 김영삼 대통령도 기자회견에서 같은 취지로 말씀앴다. 대법관 출신의 총리 말이다 보니, 국민 대부분과 특히 언론은 철석같이 믿고 대서특필했다. 

그러던 중 2기 YS 내각은 미국이 몇 나라 앞으로 이행계획서를 일부 수정해 제출한 것을 뒤늦게 인지했다. 부랴부랴 농림부로 하여금 우리도 일부 항목을 수정해 곧바로 말라케쉬 협상(가트 본부)에 제출하지 않고, 먼저 농림부 고위관료를 미국 정부에 보내 의중을 타진했다. 그렇게 미국이 ‘안 된다’는 조항을 삭제해 GATT에 제출하다 보니, 현행 이행계획서의 형식적인 골격만 남게 됐다. 그것이 이른바 ‘말라케쉬 UR 실행 이행계획서 파동’이다.

이번에는 언론이 뿔이 났다. 연일 정부의 무능을 질타했다. 그 결과 채 100일이 안 돼 이회창 총리가 대국민 사과 끝에 사퇴했으며, 3개월 된 농림수산부 장관도 교체됐다. 순수 민간단체 모임인 우리쌀 지키기 범국민 비상대책위원회보다 못한 정부의 정보수집 능력, 무지와 무능, 오판은 두고두고 역사에 기록될 것이다. 



여야 만장일치로, WTO 이행법안 통과 및 WTO 가입 

그러나 정치인들의 후각(嗅覺)은 달랐다. GATT 규범을 전면적으로 개정하는 UR 타결로, 1995년 1월 GATT를 대신한 세계무역기구(WTO)의 창설을 앞두고 다시 국민 여론이 들끓었다. 이대로 가입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대세이었다. 비대위가 그 선두에 섰음은 물론이다. 1994년 후반 민자당 정책위 이상득 의장, 나웅배, 이승윤 의원들이 비대위 대표들과 개별적 또는 공식적으로 대화를 시도해 왔다. WTO 가입 선행조건으로 미국, EU 등 선진국처럼 ‘WTO 이행법률안’을 제정하라는 비대위의 주장을 처음으로 제도권에서 진지하게 경청해 검토하기 시작한 것이다. 국회 여야를 대표해 민주당 박상천 정책의장이 비대위의 주장을 그대로 수용, 15개 조항으로 조문화했다. 

그렇게 대한민국 국회에서 여야 만장일치로 통과시킨 것이 ‘WTO 이행법률'(1994. 12.13)이다. 주요 내용은 ① UR 보상조건으로 농업직불제도를 제정·시행하고, ② 남북한 간 교역을 민족내부간 거래로 인정하는 등 14개다. 원래 15개 조항으로 구성되었는데, 우리 정부가 한사코 국회에 ‘국내법이 UR 협정에 우선한다’는 미국 이행법률안에 준하는 조문을 반대하며 삭제를 요구, 14개 항이 되었다. 그로 인해 비대위는 WTO 가입반대 시위를 거두고, 1995년 1월 정부는 예정대로 WTO에 가입할 수 있었다. 그때 대한민국 행정부가 한 일이라고는 미국처럼 국내법(수퍼 301조)이 UR 협정에 우선한다는 동 법률안의 중요 조문에 반대해 삭제한 것뿐이었다.


되풀이 되는 박근혜 정부의 무능과 오판

박근혜 정부 들어, 농업 통상업무는 다시 UR 협상 때의 백지상태나 다름없이 초보들의 조직으로 되돌아와 있다. 그동안 산전수전을 겪으며 양성된 애국·애농심이 강한 협상 전략가와 전문성이 탁월한 인재들은 다 어디로 갔는가. 실사구시(實事求是)적 외부 전문가의 자문 흔적조차 보이지 않는다. 박근혜 정부의 방침인지 박 대통령의 방침인지, ‘쌀의 관세화에 의한 완전개방’만 찬성하는 어용만 득실거린다. ‘쌀 시장 전면개방’ 방침이 대통령의 지시인지, 아니면 심중의 의중인지는 아직 분명치 않다.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

1993년 타결된 UR 농업협정문 중 쌀 관련 조문 자체가 미국과 일본의 주도(밀약설)에 의해 작성되다 보니, UR 타결 전에 쌀을 수입한 적 있는 일본이나 대만은 부분 개방 후 관세화 개방을 선언했다. 그때는 UR 협상 이전 수입 시 국내외 가격차이만큼의 고율관세(500~800%)를 부과하는 조건으로 관세화 개방이 가능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UR 이전까지는 일본처럼 다만 실험실용일지라도 외국 쌀을 공식 수입한 적이 없다. 통상협상 논리상 높은 관세율을 매길 근거가 모호한 셈이다. 관세화로 개방을 하려해도 고율관세의 이론적 근거가 지극히 미약하다는 것이다. 오로지 협상 과정에서 미국 등 수출국의 선심에 달려 있을 뿐이다. 장차 TPP(태평양 동반자 협정)와 DDA(도하개발협정)의 타결을 앞둔 시점에서, 그래서 더욱더 지금 관세화로 개방하려는 정부 방침은 위험하기 짝이 없는 모험과 같다. 물론 그 결과는 지금 현직 중 그 누구도 책임지지 않겠지만….

그리고 또 한 가지, 2003년 노무현 정부가 쌀 수출국과 재협상해 타결한 2014년 제2차 10개년 관세화 유예기한이 끝났을 때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규정도 UR 협정문에 없다. 따라서 ‘자동적으로 관세화로 개방해야 한다, 어쩐다’라는 현 정부 당국자의 주장은 근거가 전혀 없는 상상에 의한 억측일 뿐이다. 아무런 규정도, 근거도, 선례도 없기 때문이다. 오로지 진작 타결됐어야 할 DDA 협상(제2의 UR)의 결과에 따를 수밖에 없는데, 그것이 타결될 때까지의 경과 규정마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현상 유지 상태의 유예화냐, 또는 관세화에 의한 전면 개방이냐에 대한 결정은 오로지 쌀 수출 관련국 간 협상 결과에 달려 있다. 우리와 비슷한 처지의 필리핀은 어차피 연간 100여만 톤에 달하는 쌀을 수입해야 하는 관계로 그 범위에서 부분 개방(MMA) 수량을 추가하되, 35%(우리는 5%)의 관세를 매길 수 있다. 그래서 필리핀은 추가적으로 의무 수입량을 확대하거나, 또는 면제(Waiver)조항을 원용할 수 있는 협상의 신축성이 우리나라보다 훨씬 크다. 그렇기 때문에 필리핀은 협상에서 자국의 이익에 가장 부합한 자주적 선택이 자유로웠다. 

요컨대, 우리 정부가 언론을 통해 희망하는 400~500%의 관세화에 의한 전면개방 계획은 단지 희망 사항일 뿐 논리적·사실적 근거가 지극히 미미하다. 역으로, 고율 관세를 얻어내지 못할 경우 우리나라 쌀 농업은 이 정권이 끝날 무렵 쯤 조종을 울릴지도 모른다. 

또 박근혜 정부의 농정 당국은 엄연히 현존하는 실정법인 양곡관리법을 개정하지 않은 채 먼저 관세화에 의한 쌀 시장 전면 개방부터 밀어붙이려는 모양새다. 정부 스스로 실정법을 위반하는 무법·탈법을 저지르려는 것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이에 따라 다시 한 차례 폭풍이 예고될 듯하다.  


두 개 이상의 협상카드가 준비돼 있어야!

무릇 협상에 임할 때는 누구나 최소한 두 개 이상의 카드를 쥐고 있어야 한다. 하나는 이른바 성동격서(聲東擊西) 용이다. 다른 하나는 협상이 결렬 또는 중단됐을 때를 대비한 숨은 카드다. 이런 진짜 카드를 두세 장 마련해 다면적인 협상을 진행해 왔음은 동서고금의 협상사(史)에 있어 상식적인 이야기이다. 

그러니 우리도 일단은 무조건 현상유지(Stand-still) 관세화에 의한 개방 유예화를 제1 카드로 내세워 밀어붙이고 볼 일이다. 협상하다 결렬되면 또 다른 카드로 협상하면 된다. 협상은 언제 다시 해도 늦지 않다. 결렬 또는 중단도 협상 과정의 한 전략이다. 쌍방의 협상이 진행되고 있는 한, 벌칙이 수반되는 일방적인 기한이란 있을 수 없다. 타결 기한이 지났다고 WTO에서 쫓겨나거나 쫓아낼 법률적 근거도 없다. 모든 협상의 선례들이 이를 증거한다. 오죽하면, 지난달 내한한 WTO 사무총장마저 모든 것이 관련국 간 협상 결과에 달려 있다고 했겠는가. 

그런데 대한민국 농림부와 통상 당국은 ‘현상유지 관세화 유예안’과 관련한 협상을 시도해 볼 생각마저 지레 포기하고 있는 것 같다. 그 이유에 대해 책임 있게 유권 해석하는 당국자의 ‘얼굴’도 보이지 않는다. 총수가 누구인지도 알려져 있지 않다. 오로지 먹히지도 않을 ‘고율관세화에 의한 전면개방’ 방침만을 뭣이 씨나락 까먹듯 조아린다. 누가 명시적으로 나타나 시켰거나 지령하지도 않았는데도, 우리 정부는 당사국인 미국·중국·태국 등과 DDA 협상 타결 때까지 standstill에 의한 현상유지 유예화 안에 대해 일말의 협상을 시작해볼 생각도 하지 않고 있다. 

도리어 국내 협상만 열심이다. 일방적인 언론몰이와 만만한 농민 단체장을 회유하는데 여념이 없다. 벌써 몇몇 농민 단체장은 농림부의 주사약을 맞고 혀 꼬부라진 소리를 하고 다닌다는 유언비어가 나돌고 있다. 농민 단체 간에 서로 의심의 손가락질을 겨누고 있다. 박근혜 정부는 하라는 대외협상은 하지 않고, 손쉬운 대내협상을 통해 농민 단체나 소비자 간 반목 조성에만 명수이다. 그럴 힘과 여유가 있거들랑, 차라리 대외협상이나 제대로 한번 올바로 해봐라. 몇천 년 묵은 사대주의 방식의 일방적인 협상 방식에 찌들어 있는 우리나라 일부 통상 관료들의 역방향, 대내 협상력 집중은 누구를 위해 무엇을 바라고 하는 짓인가!

설사 그런 공작이 성공했다 하더라도 식량자급율이 23%(쌀 자급률 86%) 밖에 되지 않는 우리나라 농업, 농촌, 농민의 현재와 미래에 장차 무슨 이익이 돌아올 것인가. 가슴에 조용히 손을 얹고, 오고 또 올 후손의 앞날을 단 한 번만이라도 깊이 생각해 보기를 간절히 비는 바이다. 

<저작권자 ⓒ 프레시안> 이 기사는 2014년 7월 2일 프레시안에 게재되었음을 밝힙니다.

URL :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184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