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CEJ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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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CEJ 칼럼] 진보와 보수, 그리고 경제정의

이대영 경실련 사무총장


2007년 12월 18일. 뭔가 잃어버린 것 같았다.
대학에 입학해 학생운동을 시작한 이후 30여년 가까이 소위 ‘운동’이라는 것을 하면서 살았다. 그리고 그 기간 동안 단 한 번도 미래가 오늘보다 못할 것이라는 생각을 해보지 않았다. 이명박 한나라당 후보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언론사에서 전화가 왔다. ‘진보진영의 위기’ 또는 ‘시민운동의 위기’에 관해 물었다.

도대체 무엇이 잘못된 것인가? 사실 노무현 정부의 탄생은 ‘설레임, 그 자체’였다. 비로소 제대로 된 개혁이 이루어질 것으로 기대했다. 탄핵국면이라고 하는 다소 비정상적인 상황에서긴 하지만 국회 의석도 과반을 차지하지 않았는가? 이제 개혁의 필요충분조건이 다 갖추어진 것이 아닌가.

집권 초 삼성 임직원들을 불러다가 경제교육을 받을 때만 해도 실물경제를 잘 파악하기 위한 노력 정도로 생각했다. 그러나 경제 각료의 임명, 재벌기업 파견 직원들이 포함된 총리실의 규제개혁팀 운영, 개발시대 관료 출신들이 장악한 열린우리당 정책위 구성 등 개혁과 반대로 갈 수밖에 없는 인적 구성을 보면서 우려하기 시작했다.

노무현 정부는 재벌체제를 개혁의 대상으로 보지 않고, 우리 경제발전에 있어서 불가피한 선택의 문제로 보는 것 같았다. 결과는 참담했다. 재벌의 경제력집중은 그 도를 더해갔고, 공정거래법 개정은 출자총액제한제를 사문화시키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노무현 정부의 필생 역점사업인 지방분권 정책은 행정도시 건설, 공기업의 지방이전이라는 두 가지 눈에 보이는 결과물을 얻었다. 그러나 그 대가는 참담했다. 전 국토의 땅값이 치솟았고, 재벌 건설사를 배 불리는 각종 특별법 제정이 잇따랐다. 부동산은 폭등을 거듭해 노무현 정부 5년 동안 우리 역사상 가장 많은 불로소득이 창출되었다.

경실련은 지난 4년 내내 부동산문제와 씨름했다. 노무현 정권 덕분에 경실련 주가는 조금 올랐다. 그러나 반대로 경실련은 소위 ‘진보적인 노무현 정권과 싸우는’ 이상한 단체가 되었다. 그리고 이에 더해져 몇몇 경실련 출신 인사들의 눈에 띄는 행동은 경실련을 ‘보수적인’ 단체로 의심받게 했다. 억울했다.

경실련은 우리사회의 경제정의 실현을 위한 일에 매진하지, 보수와 진보라는 틀에 얽매어 있지 않다. 우리는 경제정의와 사회정의 실현이 우리사회의 발전에 매우 긴요한 과제라는 것만은 확신하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약 19년 전, 경실련이 창립 당시 경제정의 실현을 위해 내세운 개혁 과제 중 실현된 것은 30%도 안 된다. 금융실명제, 부동산실명제, 한국은행의 독립 등은 다소 미약하나마 실현되었으나 불로소득 근절, 재벌체제 해체 및 경제력집중 완화, 조세의 형평성 강화, 대중소기업간 공정한 거래, 특혜와 특권청산 등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실로 우리의 책임이 막중하다.
사실 우리는 지난 몇 년 간 우리 자신을 지켜내기 위해서도 노력해 왔다. 그것이 시민사회와 시민운동을 보존하고 발전시키는 길이라 믿었다. 그런 결과로 경실련은 다른 시민운동 단체에 비해 역량 손실이 덜한 편이다.

이명박 정부는 우리에게 많은 일을 만들어 줄 것 같다. 인수위에서 쏟아져 나오는 정책들은 경제정의 실현과 배치되는 것들이 많다. 금산분리 원칙 폐기 등 각종 친재벌 정책들은 ‘경제 살리기’라는 파도를 타고 해일처럼 몰려오고 있다.

이제 새로운 전선이 필요하다. 보수와 진보라는 가치체계의 전선은 이미 무너져 버렸다. 경제정의란 ‘일한만큼 대접받는’ 사회를 말한다. 불로소득을 근절함으로써 사회적 자원이 생산활동으로 투여되게 하는 사회, 특혜와 특권을 근절하여 공정한 경쟁이 이루어지는 사회, 우리 경제의 효율을 떨어뜨리는 재벌체제가 없어지는 사회, 사회적 형평을 이루는 방향으로 조세제도가 개혁되는 사회 등을 만들어내는 것이 진보인지 보수인지를 가늠할 필요가 있겠는가? 스웨덴 사민당의 구호도 “열심히 일한 사람에게 높은 혜택을” 이란 것이다.

2008년, 우리는 꿈꾼다.
금산분리 원칙 완화에 맞서서 시민운동과 양심적인 학계인사가 다함께 운동을 벌여나간다. 경제학자 2000명쯤이 금산분리 완화 반대성명을 내고, 시민단체들과 금융노조가 함께 캠페인을 벌여서 결국 이명박 정부가 금산분리 원칙 완화를 폐기한다.

이명박 정부가 추진하는 대운하 건설 계획에 대해 경실련도 참여하여 경제적 타당성을 검토하고, 환경에 미치는 영향을 평가하여 이명박 정부의 무리한 정책추진을 저지한다.

부동산 투기 주범인 재벌건설사들에 각종 특혜를 주고 있는 법률 폐지운동에 전국 100개 단체 쯤이 같이 참여하고, 비정규직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는 정부 발주공사에 있어서 직접시공제 시행을 위해 시민단체와 민주노총이 함께 운동을 벌여 나간다.

방만하게 운영되고 있는 공기업 구조개혁을 위해 시민단체와 공기업 노조가 함께 운동을 벌여나가고, 현대자동차 노조가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아우르는 형태로 전환되도록 법을 개정하는 운동을 시민단체와 노동단체들이 함께 벌여나간다.

공무원연금, 군인연금, 국민연금 제도 개혁을 위해 시민단체와 공무원노조가 함께 머리를 맞대고 토론을 하는 것은 또 어떤가? 학교교사도 교수처럼 재임용제를 시행하자는 입법청원을 시민단체와 전교조가 함께할 수는 없을까?

지금의 현실에서는 한낮 꿈일 수도 있다. 그러나 진보의 이름으로 새로이 국민들의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일이 아닐까?

지금 우리사회는 정글 안에 갇혀 있다. 재벌기업은 인정사정 보지 않고 돈 되는 모든 분야로 사업을 확장하고, 하청업체에 끊임없이 납품단가 인하를 요구하며, 중소기업은 나날이 경쟁력을 상실해 가고 있다. 대기업들은 외국기업들에 맞서 무한경쟁을 벌이고 있으며, 탈락을 면하기 위해 외주화와 비정규직 노동자에 의존하고 있다. 대기업 노조들은 생산성 하락의 책임을 면하기 위해 비정규직 노동자를 양산하는데 침묵하고 있다.

교사들은 늘어나는 사교육비 문제를 애써 외면하고 있으며, 공무원들은 평생직장도 모자라 퇴직 후에도, 대대로 잘 살아야 한다며 연금개혁에 반대하고, 법조계와 의료계는 정원 늘리는 것을 극력 저지한다.

최근 교육문제로 온 나라가 들썩이고 있다.
그러나 정글 안에서 빠져 나온 극소수의 강자들만이 살아남는 현실을 그냥 둔 채로, 교육제도를 바꾼다고 무엇이 달라지겠는가? 대한민국의 가장 뛰어난 인재들이 오로지 공무원 시험에만 몰두하게 하는 현실을 바꾸지 않고서 지식경쟁사회에서 성공할 것인가?

경실련은 몇 년 전부터 특권과 특혜를 없애는 운동을 시작하고 있다.
주로 건설과 부동산에 걸친 문제에 집중하고 있지만 사회 각 영역의 크고 작은 특혜와 특권을 없애는 운동에도 보다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비록 우리의 역량이 부족하다 할지라도 사회적 약자와의 유대와 연대를 강화하여 ‘일한 만큼 대접 받는 사회‘를 만들어 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