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CEJ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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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CEJ 칼럼] 한국재벌의 땅굴파기, 이대로 둘 건가

홍종학 경실련 정책위원장 (경원대 경제학과 교수)


재벌문제는 매우 복잡해서 전문적인 지식이 없이는 이해하기 힘들다. 필자 역시 몇 년간 공부를 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알지 못했던 사실이나 이론이 새롭게 등장하여 쫓아가기 힘겨울 정도이다. 그렇기에 재벌편향적인 정책을 펴는 정부나 정치권을 보면서, 일반 국민들이 이해하기 쉽지 않다는 재벌문제의 속성을 악용하는 것 같아서 기분이 언짢다.


언젠가 국회의원들에게 부탁한 적이 있다. 언제든 불러만 주면 기꺼이 필자가 재벌에 대해 공부한 내용을 성심성의껏 알려주겠노라고. 왜 필자뿐이겠는가? 그런 열의를 가진 사람들은 많다. 냉랭한 반응, 한두 번 연락이 온 것을 다행으로 여길 정도다. 참여정부 임기 절반이 지나고서야 청와대의 모 인사가 재벌문제를 상의하고자 한번 연락이 왔었다. 그리고 얼마 후 필자가 만난 인사들은 경질되었다.


땅굴파기


2000년 유명한 재무경제학자들에 의해 ‘땅굴파기'(Tunneling)라는 논문이 발표되었다. (Simon Johnson; Rafael La Porta; Florencio Lopez-de-Silanes; Andrei Shleifer, “Tunneling,” American Economic Review Vol. 90, No. 2)


‘땅굴파기’는 마치 땅굴을 통해 물건을 빼돌리듯이 기업의 이익이나 자산을 지배주주의 이익을 위해 빼돌리는 행위를 말한다. (we use the term ‘tunneling’ – as in removing assets through an underground tunnel – to describe the transfer of assets and profits out of firms for the benefit of those who control them.)


악명 높은 한국재벌의 ‘땅굴파기’


서울남부지방법원 민사12부(재판장 김주원)는 17일 참여연대가 엘지그룹의 구본무 회장 등 옛 엘지화학(현재의 ㈜엘지에 흡수)의 전·현직 이사 8명을 상대로 제기한 주주대표소송에서 구 회장 등은 400억원을 ㈜엘지에 배상하라고 원고 일부승소판결을 내렸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회사가 소유하던 비상장주식을 적정가액보다 훨씬 낮은 값에 매도함으로써 회사에 손해를 끼쳤다면 그로 인한 회사의 손해를 배상할 책임이 있다”며 “구본무 회장과 허창수(GS그룹 회장), 허동수(GS칼텍스 회장)씨 등은 400억원 전액에 관해, 집행임원(강유식, 성재갑, 조명재)들은 이 중 60억원에 관해, 사외이사(이기준, 장종현)들은 이 중 30억원에 관해 연대해 배상하라”고 밝혔다. (<한겨레> 2006.8.17)


정몽구(68) 현대차그룹 회장이 구속된 지 61일 만에 보석으로 풀려났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5부(재판장 김동오)는 28일 회삿돈 797억원을 빼돌린 혐의(특정경제범죄 가중처벌법의 횡령)로 구속기소된 정 회장의 보석을 허가했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정 회장이 비자금 조성의 책임을 원칙적으로 인정하고 있고, 회사 관계자에 대한 조사와 압수수색 등이 끝나 증거인멸 우려가 소멸된 점과 건강문제 등을 고려했다”고 밝혔다. (<한겨레> 2006.6.28)


2003년 2월 계열사끼리 주식 맞교환으로 900억원대의 부당이득을 챙기고 1조5000억원대의 분식회계를 한 혐의 등으로 구속기소된 최태원 에스케이 회장은 1심에서 징역 3년을 선고받고 구속 7개월 뒤에 보석으로 풀려났다. (<한겨레> 2006.6.28)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5부(재판장 이혜광)는 4일 전환사채를 이재용씨 남매 4명에게 헐값에 배정해 회사에 970억원의 손해를 끼친 혐의로 기소된 허태학 전 에버랜드 사장과 박노빈 전 상무에게 각각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했다. 이번 판결은 2000년 6월 곽노현 교수 등 전국의 법학교수 43명이 삼성 이건희 회장 등 33명을 고발한 지 5년3개월 만에 나왔다.(<한겨레> 2005.10.4)


많은 재벌이 연루된 불법에 대해 재판이 진행 중이다. 검찰은 외부에서 폭로가 이루어져야 비로소 수사에 들어가고, 그 후에도 이 핑계 저 핑계 대면서 기소를 미루다가 마지막 순간에서야 기소한다. 경제학 공부를 제대로 하지도 않은 재판부가 국민경제를 생각해서 불구속재판을 하거나 보석을 허가하고, 결국엔 대부분 집행유예의 관대한 처분을 내린다. 그러면 조만간 대통령은 사면·복권을 해 준다. 그 기간도 기다리기가 힘든지 정치인들은 마치 생색을 내듯 앞장서서 하루속히 사면·복권을 해주라고 요구한다. 모두 국민경제를 위해서란다.


재벌에만 관대한 법제도


지난 4월6일, 참여연대는 38개 민간재벌 총수 일가의 주식거래를 검토하여 ‘땅굴파기’의 의심이 가는 70건의 거래를 발표했다. 어디 그뿐이겠는가? 외부인으로서 접근할 수 없는 자료까지 포함해 조사한다면 수없이 많은 ‘땅굴파기’ 의심사례가 발굴될 것이다. 더욱이 시민단체에서 이런 조사를 할 때까지 국가기관인 재경부, 금감원, 공정위, 국세청, 검찰은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것일까?


재벌의 ‘땅굴파기’를 막기에 한국의 법과 제도는 역부족이다. 그런데도 그 보잘 것 없는 출자총액제한제도조차 없애자고 달려드는 관료들, 정치인들…. 그들은 과연 누구일까? 세상이 이상한 건지, 내가 이상한 건지 혼돈스럽기만 하다.


앞서 인용한 논문의 저자들은 법제도적 개혁을 통해 이 ‘땅굴파기’를 줄이는 것이 금융과 경제의 발전을 가져올 핵심적 사항으로 지적하는 것으로 논문을 마치고 있다. (Using legal reform to reduce tunneling is then a crucial element of promoting financial and economic development.) 언제 그런 날이 올까?


* 이 글은 오마이뉴스에도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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