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실련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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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실련이야기] [30주년 특집 인터뷰] 송월주(월주 스님) 前 경실련 공동대표
2019.0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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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경실련 2019년 7,8월호 – 30주년 특집 인터뷰 : 송월주 前 경실련 공동대표]

“대화와 교류협력을 통해서 평화통일 기반을 구축해야해요.
교류를 통해서 언어의 동질성을 찾고 이질화된 문화의 동질성을
회복해 평화 정착에 나서자는 것이죠”

 

글·사진 김삼수 30주년사업국·기획연대국장

 

이번 호에서 경실련이 만난 분은 송월주(월주 스님) 前 공동대표입니다.
녹음이 짙어가는 6월, 서울 광진구 아차산 자락에 깃든 영화사에서 월주 스님을 만났습니다.
월주 스님은 1989년 7월 경실련 초대 공동대표를 시작으로 1997년 7월까지 1·2·3·4대 공동대표를 역임했습니다.
또한, 2002년 3월부터 2004년 4월까지는 경실련통일협회 5대 이사장을 맡기도 했습니다. 총무원장을 두 차례나 지낸 조계종단의 큰 어른이면서, 시민사회·남북관계·국제구호를 위한 활동에 일생을 바쳤습니다.


Q. 경실련 활동에 함께 하신 계기나 이유에 대해 말씀해주세요.

A. 김규칠 前 불교방송 사장, 박인제 변호사 등 경실련 중앙위원 불교신자들이 합의해서 나를 추천했고, 서경석 목사, 이형모 대표가 찾아와서 함께 하자고 했어요. 나는 일언지하에 좋다고 했고, 경실련 초대 공동대표를 맡았어요. 경실련은 정치투쟁하는 단체가 아니에요. 반독재 투쟁 이후 민주화가 되고, 몇몇 교수들이 모여 몇 달 동안 치열하게 토론을 했어요. 우리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 경실련을 조직하되, 운동 방법은 비폭력적이고 평화적인 방법으로 해야 하고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는 데 합의해서 만들어졌어요. 나도 그런 취지에 동의해서 참여했고요. 거리에서 돌팔매질하고, 최루탄을 쏘고, 그것을 뒤집어쓰는 것은 종교인의 심성에 맞지 않아요. 당시 경실련이 다섯 번 모임을 하면 나는 세 번 이상을 참석하려고 노력했어요. 내로라하는 경제학자, 사회학자들과 함께하다 보니 세상을 보는 안목을 넓히는 데 상당한 도움이 됐죠. NGO 활동, 복지사업 등 불교계에서 선도적인 역할을 하게 된 계기도 됐어요. 1991년에는 경실련 등 9개 시민단체로 구성된 공명선거실천시민운동협의회(공선협) 상임대표도 했고, 1994년 생긴 시민의신문 최초 발행인이기도 했어요. 1994년에는 다시 총무원장을 하는데, 교계에서 내부 일에 전념해 달라는 정식 질문이 와서 1997년 초에 활동을 그만뒀어요. 그래도 애정이 많아요.

Q. 창립 초기 경실련의 활동은 어땠나요?

A. 경실련이 창립되고 일부 보수 인사나 정치인들은 경실련 활동이 진보적으로 치우치지 않을까 우려하기도 했어요. 그러나 내가 참여하는 동안 모든 사회 의제에 대안을 제시하고, 긍지를 느끼기에 충분했어요. 빈부격차를 해소하고, 상대적 박탈감을 없애고, 노력한 만큼 대가를 받고, 부정부패를 척결하고, 공명선거를 실천하고, 한국은행이 독립해야 하고, 주택임대차 문제를 해결하고, 공정한 사회질서를 확립하는 등 다방면에서 활동했어요. 경제정의·사회정의를 하려다 보니 손대야 할 곳이 너무 많았어요. 경실련이 많은 의제에 대응하다보니 백화점식이라는 비판에 직면했어요. 경실련이 시민운동의 효시적 역할을 했지만, 경실련보다 좀 더 적극적이고 투쟁적으로 활동하는 후발 단체들의 영향력도 커졌고, 다른 단체들을 규합하는 역할도 한계에 직면했어요.
2000년 총선 당시 총선연대를 만들어 낙천낙선운동이 이루어질 때, 경실련의 후보자정보공개운동은 힘을 받지 못했어요. 낙천낙선 분위기가 뜨면서 나는 후보자들의 과거 잘잘못을 드러내 유권자가 판단하게 하고 공정선거가 되도록 해야 하지, 누구를 낙선시키기 위해 거리로 나가면 안 된다고 했어요. 그러나 헌법의 하위법인 선거법이 잘못됐어요. 표현의 자유, 언론의 자유, 결사의 자유를 규정한 헌법에 어긋나기 때문에 하위법인 선거법을 지킬 필요가 없다는 논리가 강했어요. 공선협도 그렇고, 많은 단체가 낙천낙선운동에 나섰어요. 결국 선거 이후 선거법 위반으로 고발되었고, 실형을 선고받기도 했어요. 지금 생각해도 후보자정보공개운동 등 경실련의 주장이 옳았고, 당시 낙천낙선운동에 앞장서지 않은 것은 잘한 거예요.
또 다른 문제는 경실련 주요 임원들이 정부에 입각하거나 정당에 붙어 국회의원에 출마하면서 선명성이 훼손됐어요. 시민운동·NGO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이 전문성을 익히고 대안도 제시해야 되는데 정치입문을 위한 발판으로 경실련을 이용했어요. 그런 상황에서 경실련이 정책을 발굴하고 대안을 제시하는데 한계를 보였어요. 정치권에 나가는 것도 시민운동·NGO 활동을 한 사람은 일정 기간 쉬었다가 가야 해요. 정당에서는 전문가들, 대안을 제시하는 사람들이 필요하니까 모두 끌어들이는 상황이었어요. 당시 정치권에 발을 들인 사람들이 찾아왔을 때도 이런 얘기를 했더니 시민운동을 한 사람들, 유권자 운동을 한 사람들이 정치권에 당연히 가야한다고 말했어요. 시민운동을 하려는 사람들도 다 그런 사람들인 것 같아요. 경실련이 초기에 선도적이고, 선각적인 활동으로 십수 년 동안 큰 역할을 했어요. 전에는 합법적이고 합리적인 선명한 운동을 했지만, 지금은 많이 변한 것 같아요.

Q. 요즘 정치권, 국회 상황은 어떻게 보시나요? 30년 전과 한국사회가 변했나요?

최근 국회의원들이 여야를 막론하고, 막말과 악담, 조롱에 하후하박도 넘쳐요. 이렇게 해서 유권자들의 감성을 끌어낼 수 있을지 의문이에요. 예전보다 많이 심해진 것 같아요. 유권자의 표를 얻기 위한 전략은 발전한 것 같은데, 도덕적인 것은 오히려 퇴보했어요.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고, 당선을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정치인에게는 표를 주지 않는 유권자들의 각성이 필요해요. 정책을 제시하고, 그것으로 대결하여 국민의 마음을 사도록 해야 해요.

Q. 남북 관계, 한반도 정세는 어떤가요?

A. 경실련통일협회가 남북문제에도 관여했고,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도 했어요. 북한을 10여 번 다녀온 것 같아요. 2000년 김대중 대통령의 6·15선언 후에 이산가족이 최초로 8월에 만났어요. 11월에 2차 상봉을 하고, 2001년에는 2월에 한 번 밖에 못 만났어요. 북한을 방문했을 때 이산가족이 천만 명이라는데, 다들 노쇠해서 몇 년 지나면 다 돌아가시니 계속 만나게 했으면 좋겠다고 하자, 북측에서 자꾸 그런 말 하면 스님은 내일 여기 못 있는다고 했어요. 북한의 10만 명이 동원된 카드섹션 아리랑 공연도 마찬가지였어요. 공연 자체가 체제선전이에요. 체제에 익숙한 사람은 모르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거부감을 느끼기 충분했어요. 처음 공연보다 많이 달라졌다지만 여전하다고 말했더니 북측에서 말은 안했어요. 서로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어요.
경실련통일협회 이사장을 할 때부터 우리가 온건하게 접근해야 하고, 북쪽에만 치우쳐도 안 된다고 말했어요. 그렇다고 우리가 폐쇄적이거나 갈등을 부추겨서도 안 돼요. 대화와 교류협력을 통해서 평화통일 기반을 구축해야 해요. 교류를 통해서 언어의 동질성을 찾고, 이질화된 문화의 동질성을 회복해 평화정착에 나서자는 것이죠. 6·15선언도 하고, 평화번영정책도 펼쳤지만, 핵과 미사일 실험을 계속 해오고 있죠. 봄바람에 외투를 벗을 거라고 했지만, 오히려 갑옷을 입었어요. 일부에서는 자기방어용일 뿐 남한을 공격하려는 게 아니라고 해요. 하지만, 대북지원에 대한 여론이 좋지 않아요. 내가 북한의 선군정치를 비판하고 북한에게 속았다는 말을 몇 번 했더니, 남한 내부에서도 비난하고 북한에서는 방북 초청장도 안 나와요. 김대중 정부는 6·15선언 이후 전쟁은 없다고 했지만, 2002년 월드컵 때 연평 해전이 벌어졌어요. 김정일 위원장의 답방 약속도 지켜지지 않았어요. 노무현 정부 때는 평화 정착에 기여한다고 하지만 임기를 불과 1년도 채 남겨놓지 않은 상황에서의 10·4선언은 문제가 많았어요. 이후 남북 관계가 완전히 경색돼 버렸지요.
그래도 대북 인도적 지원은 해야 해요. 북을 도와주되 투명하게 도와줘야죠. 국제기아대책기구 등 국제구호단체를 이용하는 것도 방법이에요. 북한의 경우 산모들이 영양섭취를 못하니까 젖이 마르고, 어린아이들 영양결핍도 심각해요. 아이들이 건강하게 발육할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하되 고통 받는 사람들을 투명하게 도와줘야 해요. 대북 지원이 무기화되거나 독재 유지를 위한 수단으로 전용된다는 우려를 불식시켜야 해요.

Q. 끝으로 경실련 또는 시민사회에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A. 불경에 나오는 석가족 학살 사건을 보면, 가비라성의 이웃나라인 꼬살라국의 파세나디왕은 석가족 공주와 혼인하기를 원해요. 석가족은 파세나디왕을 노하게 하고 싶지 않아 마지못해 청혼을 받아들였지만, 공주를 보내는 대신 마하나마왕과 노예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를 공주라고 하고 보내요. 파세나디왕은 그 아이를 왕비로 삼았고 비타투바라는 아들을 얻었어요. 비타투바가 16살이 되던 해 마하나마왕과 석가족 공주들을 만나기 위해 가비라성에 방문했다가 노예 계집의 아들이란 소리를 듣게 돼요. 이에 분노하여 비타투바가 석가족의 씨족을 모두 말살했어요. 야사이기는 하지만, 수만 명의 비타투바 군대가 가비라성을 점령했을 때, 마하나마왕은 자신이 연못에 들어가서 떠오를 때까지만 도살을 멈춰달라고 했고, 비타투바는 이를 받아들여요. 연못에 들어간 마하나마왕은 자신의 상투 머리를 큰 나무에 묶어 떠오르지 못하게 했어요. 왕의 시체가 떠오르지 않는 동안 석가족 사람들은 많이 도망가서 목숨을 구할 수 있었어요.
자기가 죽으면서 다른 사람을 살려낸 석가족 일화처럼 그런 심정으로 남북 관계도 다가가야 해요. 사회정의·분배정의를 위해 노력하는 시민운동·NGO 활동도 마찬가지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