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CEJ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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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CEJ 칼럼] [전문가 칼럼 ] 양심
2019.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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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경실련 2019년 9,10월호 우리들이야기1]

양심

정지웅 변호사 / 경실련 시민입법위원회 위원

유년 시절 유난히 실험 유사의 놀이를 좋아했다. 야생초들을 뜯어서 물과 함께 병에 넣어 놓고 햇빛에 며칠 동안 노출시켜 두면 어떻게 변하는지 관찰하기도 했고, 개구리를 잡아서 해부하거나 주사를 놓은 적도 있다. 유년기의 나는 개구리, 작은 물고기, 곤충 등 그 생명을 뺏는 일에 전혀 거리낌이 없었다.

중학교 들어서면서 법정 스님의 글을 읽고 점점 불교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나의 의식 형성 과정에 부처님의 가르침이 많은 역할을 하였다. 어느 순간부터 생명을 죽이는 것을 꺼리게 되었다. 나의 생명의 가치가 지렁이나 물고기의 생명 가치보다 뛰어나다는 확신을 가질 수가 없었다.

군 시절 계룡산 아래 위치한 부대에는 유난히 지렁이가 많았다. 습기가 많은 밤에 아스팔트 위로 기어 나온 지렁이들은 낮에 햇볕이 비치면 괴로워하고 말라 죽어갔다. 지나가다 눈에 띈 지렁이 중 아직 살아 있는 지렁이는 주워서 습한 음지에 놓아 주곤 했다. 이등병 시절 어느 날의 일이다. 그날은 비가 왔다. 지렁이들이 유난히 많이 콘크리트 위로 올라와 있었다. 사병은 우산을 쓸 수 없기에 비를 맞으면서 지렁이를 한 마리씩 집어서 화단에 올려주고 있었다. 그런 행동을 지나가면서 지켜보던 타 부대 병장들이 저거 완전히 미친놈 아니냐고 비웃으며 지나갔다. 그들이 보기에 나의 행동은 미친놈의 행위 그 자체였을 것이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그것은 나의 양심의 행동이었다. 국가가 부과하는 의무와 충돌하지 않았기에 어떠한 제재를 받지 않았을 뿐, 누가 나에게 그런 행동을 하지 못하게 하였으면 나는 괴로움을 느꼈을 것이다.

제주에서 낚시하는 사람들을 보며 나도 해보고 싶었다. 그래서 방파제에서 낚시를 했다. 눈먼 고기가 잡혔다. 낚싯바늘에서 괴롭게 파닥거리고 있는 물고기를 손으로 쥐어 보았다. 생명의 박동이 느껴졌다. 나는 감히 그 물고기의 생명을 빼앗을 자격이 없었다. 미안해하며 다시 바다로 던져주었다. 그때 만약 누군가가 나의 그런 행동을 제지했다면. 만일 국가가 물고기를 쥐고 있는 나의 그 손을 꽉 쥐라고 명령한다면 나는 어떤 느낌을 받았을까?

깊이 생각하지 않고 적당히 사회와 타협하며 사는 나는 양심의 존재에 대해서 일부러 외면하고 살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눈앞의 현실에 허우적거리며 무감각하게 사는 것이 오히려 정신건강에 좋다는 생활의 지혜(?)를 터득했는지도 모르겠다. 나의 작은 추억들이 양심적 병역거부자들과의 공감을 어느 정도 가지게 해주었다.

전체의 이익을 위해서는 양심적 병역거부 문제를 아예 부정해 버리는 것이 쉬운 해결방안이겠지만, 공동체 내에 있는 소수의 사람이 너무 아파한다면 안 될 것 같다. 공동체의 이익 증진을 위해서는 소수의 희생자가 따를 수밖에 없지만, 그 사람들의 아픔을 구제해야 하는 것이 헌법재판소와 대법원의 역할이 아닐까?

2018년 6월 28일, 헌법재판소는 양심적 병역거부자를 위한 대체 복무 방안을 마련해놓지 않은 병역법은 ‘위헌’이라는 결정을 내렸고, 이어서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2018년 11월 병역법에서 정한 현역 입영 또는 소집통지서에 응하지 않을 정당한 사유에 양심적 병역거부가 해당한다고 판결했다(2016년도 10912). 대법원의 양심적 병역거부 무죄 판결 이후 병역법 위반사건으로 재판을 받던 여호와의 증인 신도들에게 무죄 판결이 이어지고 있다.

2018년에 헌법재판소와 대법원에서 양심적 병역거부에 대한 결정은 자신의 존재 가치를 빛나게 하는 아름다운 판결이었다. 나는 오늘도 길을 걷다가 햇빛 아래 고통받으며 말라죽어가는 3마리의 지렁이를 촉촉한 나무 밑으로 옮겨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