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경실련이야기/경실련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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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경실련이야기/경실련이야기] 성장과 분배 둘 다 하면 안 되겠니?
2006.0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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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한 언론사에서 경제 전문가를 대상으로 ‘자본주의’ 설문지를 보내왔다.


문가라고 하기에는 아직 어색한 상황이지만, 여하튼 경제 관련 단체에서 일하는 관계로 설문에 참여하게 되었다.

설문은 처음부터 무척 난해했다.

“자본주의의 핵심은 무엇인가?” 당황했다.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예전에 <자본론>의 두께가 베개로 써도 좋을 정도라는 것은 본 적이 있기에 자본주의는 그 어려운 복합적인 무엇인가라고 생각하고 있던 차였다. 그런데 그 핵심이라…. 다행히 객관식으로 여러 항목이 나열되어 있기는 했다.

기타를 포함해 ①시장 경쟁을 통한 지속 성장 ②사적 소유권 보장 ③정부 계획과 통제 ④부의 평등 분배 ⑤창의적 기업가 정신 ⑥투철한 근로 의식과 같은 6개 항목이 그것이다. 그런데 완벽한 전문가가 아니어서 그런지 하나를 선택하기란 무척이나 어려웠다.

사실 그 항목들은 모두 건강한 자본주의를 이루기 위한 핵심이 아니었던가?

‘투철한 근로 의식’과 같이 단어 자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다소 이해 안 되는 항목이 있기도 했지만, 이들 모두는 자본주의가 불안한 궤도를 그리지 않고 이른바 지속적인 성장을 위해 하나하나 모두 핵심적으로 고려되어야 하는 요소들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나였다. 난감해서, 그냥 복수 응답을 했다. 설문을 부탁한 이에게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설문을 요구했던 이가 바라던 결과를 교란시키는 행동을 해버렸기 때문이다.

그래도 솔직해야 한다는 마음에 복수 응답을 하고 넘어갔다.

그런데 산 넘어 산이라고 다음 질문 역시 하나나 두 개를 선택할 수 ‘없는’ 질문이었다.

“시장경제가 경제발전의 원동력 역할을 하기 위한 정부의 역할은 무엇인가”라는 질문. 답변 항목으로는 기타를 포함해 ①시장 경제 질서 확립 ②성장 동력 발굴 지원 ③국제기준에 부합하는 규정 확립 ④사회 안전망 구축 등 5개 항목이 있었다.

다시 한 번 곤란해졌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보아도 이 5개 항목도 모두 ‘시장경제’가 ‘경제발전의 원동력 역할’을 하기 위해 꼭 해야 하는 일들이 아니던가. 어떻게 할까. 고민을 했지만, 답은 없었다. 또 복수 응답을 해버렸다. 4개 모두라고.

기업의 기여 역할 설문 조항도 마찬가지이다. 여기에 제시된 조항은 다음과 같은 5가지. ①투자 활성화에 의한 일자리 창출을 통해 ②부의 사회 환원을 통해 ③부의 대물림을 막을 수 있는 투명한 기업 지배 구조를 통해 ④주주가치 극대화를 위한 배당 및 주가 상승을 통해 ⑤세계적 기업 활동으로 국가 위상 제고를 통해.

아, 이것도 역시 하나를 고르기란 매우 곤란한 일이었다.

사실 시민 입장에서야 기업에 이것들 다해주면 안 되겠느냐고 하고 싶지만, 최소한 ①과 ③④는 기업의 의무사항이 아니던가.

문제가 거듭되면서 슬슬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과연 이 설문지에서 얻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 설문지가 이러한 질문들을 통해서 어떤 결과를 얻고 싶어한 것인가? 설문이라는 것은 여러 개의 항을 놓고 응답자에 그에 대해 몇 가지를 선택해 대답을 하도록 요구하는 것이라고 알고 있다. 그래야 경향이 보일 테니까.

설문이 진행되면 될수록 이 설문지는 분명히 자본주의에서 성장과 분배를 나누어 놓은 다음에 무엇이 더 우선이 되어야 하는가를 묻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그 언론사의 성격에 대한 편견을 버리고 설문에 응하려고 했건만, 자꾸 이 설문지 뒤에 어떤 의도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지울 수 없었다.

얼마 전에 그 신문에서 읽은 사설은 나의 이런 의심을 더욱 확신으로 바꾸었다. 사설은 아시아의 다른 나라들보다 경제적 분배에 무게를 두는 우리나라 청소년들의 설문조사 결과에 지극한 ‘우려’를 표시하고, 동남아에서 구걸하는 청소년들의 현실까지 들먹여가면서 “모두 못 살아도 평등이 나을까”라는 제목을 통해 성장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강조해 마지 않았다.

그 사설을 읽는 순간, 사실 설문조사 결과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과가 어느 쪽이든, 중요하게 강조될 것은 ‘성장’이기에.

최근 세수 논쟁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경제 정책이 논란거리가 될 경우에는 언제나 성장이냐 분배냐를 두고 갈등 구조가 형성된다. 그러나 최근 발표되는 여러 자료는 지속적인 성장과 건전한 경제를 위해서는 성장과 분배가 따로 갈 수가 없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얼마 전 우리나라를 방문한 바도 있던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조지프 스티글리츠 교수도 분배가 악화될 경우 생기는 대중의 경제적 불안감은 경제의 효율성을 저해할 수 있다는 의견을 내놓은 바 있다. 경제에 있어 성장과 분배는 따로 갈린 길이 아닌, 함께 가는 두 바퀴라는 것이다.

양극화와 경기침체로 사회 전반적 분위기가 가라앉은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성장과 분배냐는 이분법이 아니라, 무엇이 건강한 경제를 만들 수 있는가에 대한 다각적인 의견을 담아낼 수 있는 그런 설문 조사는 없을까 하는 아쉬운 마음이다.


윤은숙(경제정책국 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