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실련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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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실련이야기] [문화산책] 김영갑 글과 사진 ‘그 섬에 내가 있었네’
2008.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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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를 다니던 때까지만 해도 사진은 생일이나 졸업식과 같은 특별한 일이 있을 때 찍는 걸로 알았는데 대학 입학 후 디지털 카메라가 보편화 되면서 이제는 사진 찍기가 일상이 되어 버렸다. 처음 카메라가 딸린 휴대폰을 갖게 되었을 때는 신이 나서 얼짱 각도를 잡아보며 셀카를 찍기도 했지만 그것도 잠시 지금 휴대폰에 저장된 사진은 거의가 5년 이상 된 것들이다. 흔하다 보니 그 가치가 떨어졌다고나 할까?



요즘은 넘쳐나는 사진들이 오히려 불편할 때도 많다. 모처럼 간 식당에서도 먹기 전에 찰칵, 멋진 풍광 앞에서도 구경 전에 찰칵. 가끔은 사진을 위해 식당에 가고 여행을 가는 것은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든다. 그러다보니 차츰 의식적으로 사진을 거부하기 시작했고 지금은 자연스럽게 카메라가 보이면 피하게 된다. 그래도 가끔 꺼내보는 어린 시절 사진들은 더없이 정겹고 고맙다.



가깝게 지낸 친구들이 사진 찍기를 좋아해 중고 카메라를 구입해 들고 다녀도 보는 둥 마는 둥 했다. 친구 중에 사진도 잘 찍고 그림도 잘 그리는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는 자기가 찍은 사진이나 그림을 보여주는 걸 즐겼다. 친구가 보여주는 사진들을 통해 사진을 달리 보기 시작했던 것 같다.



아스팔트 바닥에 흩어진 진달래 꽃 사진이었다. 비에 젖은 분홍빛 꽃잎들을 보고 있자니 처연해졌다. 비릿한 공기와 눅눅한 바람, 그 속에서 꽃잎을 바라보고 서있는 친구의 모습. 피사체를 건너 카메라 밖을 보기는 처음이었다. 그 뒤로는 사진을 볼 때면 카메라에 눈을 맞대고 선 사람이 누구일지, 렌즈를 통해 들여다보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지 생각하는 버릇이 생겼다. 사진이 찍는 사람에 따라 전혀 다름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래서 사진‘작가’라고 부르는 것일 텐데도.



친구의 사진을 통해 사진가를 발견했다면 피사체와 사진가의 교감을 통한 사진미학을 제대로 느낄 수 있었던 것은 김영갑의 사진을 통해서다. 당시 ‘올 해 안에 반드시 제주도에 간다’고 마음먹고 제주올레길에 관한 소식과 현기영의 작품들을 찾아 정리하며 나름의 준비를 하던 차에 김영갑의 사진을 알게 되었다. 사진집에 실린 김영갑의 사진을 처음 마주한 순간 모든 것은 정지하고 오직 그 사진만이 살아 움직이고 있는 듯 했다.



일렬로 늘어선 소나무 사이로 저녁 해가 지는 모습을 담은 세 장의 사진이었다. 소나무 그림자 사이로 막 떨어지는 저녁 해를 바라보려니 눈이 부셨다. 푸른 먹빛의 하늘은 기울어지는 해를 따라 점점 붉은 노을로 물들고 해가 사라지기 무섭게 사방에 붉은빛 어둠이 내려앉고 있었다. ‘몰입의 황홀함’, 이 사진을 찍은 사람은 렌즈에 눈을 대고도 눈앞의 풍경을 미치도록 그리워했을 것이고, 온몸으로 제주를 사랑했음이 분명하다. 그런데 너무 쓸쓸한 아름다움이다. ‘등 따시고 배부른 사람은 이런 사진 못 찍을 거야’ 저절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제주의 봄, 여름, 가을, 겨울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사진집 ‘그 섬에 내가 있었네’는 비할 데 없이 아름답다. 제주 토박이들도 제주에 이런 곳이 있었느냐고 되묻게 만든다는 그의 사진은 섬에 홀리고 사진에 미친 사람이 훔쳐본 이어도가 맞을지 모르겠다. 팀 버튼의 환상세계를 연상시키는 색감은 비현실적으로 느껴지고 제주의 거센 바람은 부드러운 숨결을 닮았다. 새하얀 눈으로 덮인 오름으로 향하는 발걸음에 ‘뽀드득 뽀드득’ 소리가 난다. 두 페이지크기의 사진이 반으로 잘려 아쉽기만 하다.



책에 실린 김영갑의 글도 사진 못지않은 감동을 준다. 예술가들 중에는 고난의 삶 속에서 예술혼을 꽃피운 이가 적지 않지만 배고픔과 외로움을 견뎌내는 모습에 가슴이 먹먹했다. 바람을 안고 초원을 떠돌며 찍은 사진들이 물난리에 잠기고 장마철 곰팡이에 밥 대신 선택한 필름을 몽땅 버려야 할 상황에 처했을 때 그 심경이 어떠했을까? 울적한 날에는 바느질을 하며 마음을 달랜다는 대목에선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한 개인의 일생으로 보면 김영갑의 삶은 결코 행복하다고는 할 수 없을 것 같다. 돈벌이와 상관없는 사진 작업으로 끼니를 잇기도 힘들었고 몸을 뉘일 잠자리도 마땅치 않았으며 루게릭병에 걸려 그토록 사랑했던 사진작업도 할 수 없는 상태로 생을 마감한 사람. 엄마는 책을 보고나서 나를 걱정한다. 속마음을 들킨 것 같아 얼른 둘러댔다. ‘엄마, 난 그만한 용기는 없으니 걱정 마세요’



루게릭병에 걸려 숟가락도 제대로 움직일 수 없었던 그가 혼신의 힘을 다해 만든 ‘김영갑 갤러리 두모악’, 눈을 감고 하늘을 날아가는 꿈을 꾼다. 저 멀리 바람을 따라 눕는 억새가, 중산간의 안개가, 시린 하늘을 딛고 선 나무가 보인다. 카메라 가방을 둘러맨 채 황홀경에 빠져든 한 사람과 함께. 


* 이 글은 월간경실련 2008년 9월호에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