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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CEJ 칼럼] [월간경실련] 경실련 30주년에 부처
2019.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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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경실련 2019년 11,12월호]

경실련 30주년에 부처

조연성 경실련 재벌개혁위원/덕성여대 국제통상학과 교수

경실련 소개 글은 이렇게 시작한다. “부동산 투기에 따른 불로소득이 다수의 성실히 일하는 사람들을 박탈감과 생계 위협 속에 몰아넣었던 1989년,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은 경제정의의 기치를 내걸고 시민운동의 첫발을 내디뎠다.” 이처럼 경실련은 불로소득과 경제정의의 기치를 내걸고 출범한 시민단체로서 정체성을 명확히 밝히고 있다. 30세면 이립(而立)이라는 너무나 잘 알려진 표현처럼 경실련은 지난 세월의 경험과 축적된 시민운동 역량에 기반해 뜻을 세울 때이다. 학문의 뜻을 세우라는 공자(孔子)의 말을 산술적으로 적용할 수는 없지만, ‘뜻’이라는 의미를 생각할 때 앞으로의 방향에 대한 정체성을 확립할 필요는 있다. ‘뜻’은 여러 층위에서 적용이 가능한 말이다. 개인도 뜻을 세울 수 있으며, 사회 안의 여러 공동체 역시 모두 뜻을 세울 수 있다. 뜻이라 함은 건강한 시대정신과 더불어 나아갈 올바른 방향을 세우는 것을 의미한다. 시대정신에 역행하는 모습들이 역사에서 어떻게 사라졌는지를 돌아볼 때, 지금 현실에 적합한 방향을 설정하는 것은 중요하다.

1989년 이후로 한국사회의 발자취를 돌아보면 지금 우리가 처한 현실을 지식할 수 있고, 이에 맞는 ‘뜻’을 세우는데 유익하리라 생각한다. 1987년 항쟁 이후 한국사회는 짐짓 민주화 열풍에 힘입어 상당한 수준의 진보를 전개한듯하였다.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으로 이어지는 기간 동안 사회는 변화했으며, 크고 작은 역동이 우리 안에 발생했다. 이후 이명박, 박근혜 시절을 지내면서도 변화는 유효했다. 최소한 어느 정권이던 사회정의와 평등을 전면에 내걸고 시작한 점에서는 그러하다. 그럼에도 이명박 정부 이후 한국 사회는 퇴화한 시대상과 너무 오랫동안 직면하며 살아왔다. 10년에 치지 못하는 시간이 길지 않을 수 있지만 경제정의 구현이라는 측면에서는 거듭된 실정 속에서 우리사회가 길을 잃어버린 느낌이었다. 경실련은 항상 경제정의의 관점에서 사회문제를 대하고, 이에 대한 의견을 제시하는데 게으름이 없었다. 일관성이라는 표현이 적절하다고 생각하며, 경실련의 과거를 기반으로 미래를 고민할 때도 ‘일관성’을 고민할 필요가 있다.

시간은 흘러 박근혜 정부의 실정에 대한 거대한 저항 물결이 촛불을 불러왔고 많은 시민단체가 광화문에 모였다. 경실련도 시대의 흐름에 부응해 적극적 자세로 적폐세력의 폐단에 맞서 싸웠다. 그렇게 새로운 물결이 한국사회에 들어왔고 우리 모두의 기대가 컸음을 숨길 수 없다. 과정과 결과가 정의로운 시대가 오기를 기대하며, 시민들은 새롭게 창출된 정권에 많은 응원을 보냈다. 시간이 흘러 오늘에 오기까지 건강한 시민정신이 기대했던 것과는 다르게 나타났다. 지난 정권의 잔재로 남아 있던 재벌과 권력의 유착에 대한 판단은 아직도 흐지부지하며, 어느덧 흘러간 이야기처럼 공허한 기억만이 우리 주변을 맴돌고 있다. 경제를 필두로 정치, 사업, 사회정의, 노동, 교육에 이르기까지 한국사회의 변화란 요원한 현실이다. 경실련이 창립 30주년을 맞이하는 지금은 새로움과 낡은 것이 공존하는 기묘한 상황이라는 점에서 더욱 많은 숙고가 필요하다.

미래비전은 시대정신과의 대화를 전제로 한다. 인류 역사에 등장했던 수많은 이념, 종교, 사회체제 중에서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은 모두 어려운 시절을 겪었다. 어려운 시절을 살아남을 수 있었던 동인은 모두 당시의 건강한 시대정신과 대화를 멈추지 않았기 때문이다. 역사의 어느 시점에라도 항상 있었던 건강한 시대정신은 결국 세상을 바꾸는 방향으로 진화했으며, 이에 부응하는 것들만 사회 안에 남을 수 있었다. 결국 경실련 30주년에 생각해야 할 미래비전은 지금 한국사회의 시대정신이 무엇인가를 돌아보는 일에서부터 시작할 필요가 있다. 과거의 적폐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오늘날, 우리시대 다수가 원하며, 억눌리고 힘없는 이들, 노동하는 사람들이 더 나은 삶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내용이 시대정신의 요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점에서 오늘날 한국사회의 시대정신을 대변하는 표현을 멀리서 찾을 필요가 없다. 바로 경실련 이름 안에 있기 때문이다. ‘정의(正義)’, 이것이 한국사회에 필요한 시대정신의 핵심이다. 새삼스럽다고 말할 사람도 있다. 어느 시대에는 ‘정의’가 시대정신이 아닌 적이 있었냐는 질문도 나올법하다. 그렇다, 늘 어려운 질문은 당연한 형태를 띠고 있다. 당연한 것이 그런 대접을 받지 못하는 사회일수록 근원으로 돌아가서 사회를 바라볼 필요가 있다. 다행히 경실련은 늘 그러한 태도를 견지해왔다고 평가한다. 이 점에서 오늘 한국사회에 만연한 정의롭지 못한 것들을 돌아보면 자연스럽게 경실련이 나아갈 바를 생각할 수 있다.

우선, 한국사회는 경제 불평등에 따른 부의 대물림과 구조적 계급화가 급속히 진행되고 있다. 사회면에 나오는 여러 지표는 부모의 부와 학벌이 자식 세대로 이어지는 현상을 잘 보여주고 있다. 금수저, 흙수저 이야기와 더불어 ‘헬조선’이라는 청년들의 아우성은 불평등의 세습구조에 대한 항변이다. 경제 불평등의 출발은 불공정한 경제 관행과 대기업, 특히 재벌 중심의 개발주의가 아직 득세하고 있는 사회현실과 맞물려 있다. 과거 정부에서 추진했던 신자유주의 정책은 결과적으로 가난의 원인을 개인의 능력 부족으로 돌리려는 잠재의식을 한국사회에 가득 심어 주었다. ‘스펙’이라는 낯익은 표현은 가난을 물려받아야할 청년을 공격하고 책임을 떠넘기는 데 쓰인 전가의 보도(傳家의 寶刀)였다.

경실련은 이런 점에서 청년의 시대정신에 부합하는 정책과 활동을 전개할 필요가 있다. 미래란 결국 오늘의 청년이 만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억눌리고 구조적 장벽에 가로막혀 답답한 일상을 반복해야 하는 청년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이들이 한국사회 경제 불평등을 해소할 실질적 동력이기에 그렇다. 부의 대물림에 따른 상대적 빈곤과 더불어 실질적 빈곤 속에 처한 이들의 외침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이들이 보기에 이미 너무 많은 기성세대가 신적폐의 길로 들어서고 있다. 기득권은 늘 지키려는 자와 부수려는 자의 갈등이 불러온 기재였다. 그렇다면 누구 편에서 기득권을 조정할 것인지를 결정해야 한다. 정의에 중립이란 없다. 경실련의 미래는 억압받고 눌린 처지에 있으며, 가난의 대물림에 처한 청년의 목소리를 경청하고 함께 하려는 자세를 갖추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도덕이 만든 것 중 괴물이 될 가능성이 높은 법(法)의 정의를 세우는 일 역시 오늘날 시대정신의 요체 중 하나다. 오늘날 ‘만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는 말을 신뢰하는 한국인이 얼마나 있을까’라는 자조 섞인 질문을 해보아야 하는 현실이 곧 우리사회의 비극을 상징한다. 과학과 기술이 발달하고 넘치는 정보의 풍요 속에 더 이상 감출 것도 감추기도 어려운 이 시대에, 여전히 법의 정의란 요원한 일이다. 이런 비극은 말하고 있다. ‘나를 바로잡지 못하면 결국 제도가 만든 구속 안에서 우리 모두가 살아야 함을, 불평등을 인정하는 비루한 삶을 살아야 함을’ 말이다. 사법정의와 검찰개혁이 화두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최근 발생하는 일련의 사건은 이제 어느 개인의 문제에도 법의 정의가 더 중요하다는 점을 시민사회가 주목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법의 정의를 세우는 일이란 결국 사회전반의 약자들과 대화하려는 태도를 유지해야 함을 의미한다. 법의 공평성이 기계적 접근에 있다고 보기 어렵기에 그러하다. 이 문제를 바로잡지 못하면 나아간다는 의미를 지닌 진보(進步) 세력이 그들만의 과거에 천착하고 있다는 비난을 면할 길이 없다. 약자가 보기에 사법부의 정의란 그들의 권력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수단에 불과할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경실련이 이번 과정에서 보여준 태도는 이런 점에서 시대정신과 대화하려는 태도를 잘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다. 정의란 진보와 보수의 가치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는 이분법적 접근을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늘을 살고 있는 약자가 누구인지, 억눌린 자가 누구인지, 차별받는 자가 누구인지를 묻고 답할 때 정의를 직시할 수 있다. 경실련의 미래도 이러한 태도에서 출발해야 한다.

경제와 법의 정의를 세우는 일이 아직도 우리사회의 숙제로 남아 있는 현실이 개탄스럽지만 이를 피할 수는 없다. 정의를 세우는 일에는 우회로가 없기 때문이다. 또한, 지난 30년 경실련이 걸어온 길에 우회가 없었기 때문이다. 경실련이 30년간 말해왔던 정의에 중립이란 없었다. 정의 앞에 중립은 비겁한 수식어이며, 부당한 행위에 면죄부를 줄 때 사용하는 관용어에 불과하다. 경실련에는 이런 관용어에 사로잡혀 사회적 책무를 등한시 한 역사가 없다. 이 점에서 경실련의 미래는 과거에 보여준 전통을 계승하고 오늘날의 시대정신과 대화하려는 태도를 유지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더불어 오늘날 시대정신은 결국 경제와 법의 정의에 있음 또한 기억해야 한다.

결국 경실련의 미래란 거창한 청사진에 있지 않다. 하루를 살아가는 시민의 삶처럼 너무나 당연한 우리의 일상에 응답하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당연한 것을 당연하게 인지하지 못하고 불합리성에 익숙해진 사회를 바꾸는 초석으로 경실련의 역할이 필요하다. 30년간 그렇게 걸어온 바처럼 미래에도 당연한 가치를 외면하고 억누르려는 세력과 싸워야 하며, 이겨야 한다. 청년과 사회적 약자, 이 둘이 하나일수도 있고 때로는 다른 계층일수도 있다. 하지만 이들과 함께 가려는 자세는 잊지 말아야 한다. 정의란 이들처럼 아무렇지 않은 사람들 사이에서 더 큰 힘을 발휘하기에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