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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레터] 7호-5) ‘정숙한 동네’ 정동을 아십니까?(마지막회)
2002.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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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로’에는 신문사가 몰려있어 ‘신문로다’?

태종은 서소문과 서대문(돈의문)이 지맥상 왕궁이 나쁜 영향을 주므로 돈의문을 없애라고 명령하고 그 앞쪽으로 서전문이라는 작은 문을 만들었다.

서전문이 세워진 곳은 조선개국 공신이었던 이숙번의 집 앞이었는데 사람의 왕래, 말소리 등으로 소란스럽자 자기의 권한으로 서전문을 닫아버린다. 이것을 한자로 ‘색문’이라 하는데 그래서 당시 지명이 “색문동”이었다.

세종 즉위 후 현재 이화여고에서 경향신문사로 가는 언덕길 근방에 ‘돈의문’이란 이름으로 새로운 문을 세운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옛문이 아니라 새로운 문을 열었다는 의미로 당시 지명이 ‘새문동’이었다고 한다. ‘새문’을 한자로 고치면서 이 일대의 지명이 ‘신문로’로 바뀌게 된 것이다.

일반 사람들은 지명을 듣고 이 일대에 경향신문, 문화일보, 조선일보, 동아일보 등의 신문사가 몰려있어 신문로라고 이해하는 경우가 많으나, 세종대왕이 이 일대에 서전문이 아닌 새로운 문을 열였다는 ‘새문’을 한자로 고치면서 ‘신문로’가 된 것이다.

손탁호텔














▲ 손탁호텔의 옛 모습
우리 근대사 당시 서울에 와있던 서양 세력 그리고 그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활동했던 사람들의 살롱이었다.
ⓒ2002 홍순민
손탁호텔은 1885년 8월 28일 대리공사 겸 총영사로 부임한 러시아공사 웹베르(그의 부인은 프랑스인이었다)의 처제인 손탁이 운영한 2층 짜리 호텔로 그녀의 고향은 알자스로렌이었다.

손탁호텔은 전통적인 왕실의 땅을 고종황제가 하사하여 1902년 지어졌다. 손탁호텔에서는 일제식민지의 고통을 안겨준 이토 히로부미가 묵기도 했었다.

고종황제가 ‘가베’란 이름의 커피를 처음 맛보게 되는 것도 손탁에 의해서였다. 이러한 인연으로 손탁은 명성황후와 친교를 쌓아 을미사변때 고종황제가 러시아공사관으로 ‘아관파천’하게 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손탁호텔은 우리나라 최초의 커피하우스로 이완용, 서재필 등 내국인의 친목단체인 ‘정동구락부’의 근거지였으며, 주로 외국공사 관계자들을 접대하던 곳이었다.














▲ 손탁 호텔 터
현재 주차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2002 신용철
고종이 커피를 즐겨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이야기로 커피와 관련하여 러시아 통역관 김홍육 사건이 있다.

순종과 고종이 커피를 즐겨한다는 것을 알고 러시아 통역관 김홍육이 커피에 독을 탄 사건인데 고종은 독이 든 커피를 마셔보니 평소의 맛과 달라 마시지 않았으나 평소에도 몸이 약했던 순종은 독이 든 커피를 마셨고 그 후유증으로 18개의 이빨을 의치로 바꾸어야만 했다.

커피에 독을 탄 혐의를 받은 러시아 통역관 김홍육은 이 사건으로 사형을 당했다.

손탁호텔 터는 1917년 이화학당의 기숙사로 팔렸다가 1922 원래의 건물을 헐고 3층짜리 프라이 홀로 사용되었다. 프라이 홀은 1975년 5월 화재로 소실되고 현재는 이화여고 주차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러시아 대사관

서울 중구 정동의 옛 배재학당 자리에 신축된 러시아 대사관은 1917년 소련연방 수립과 함께 한반도에서 떠났지 80년만에 다시 서울에 들어섰다.














▲ 주한 러시아대사관
ⓒ2002 신용철
러시아 대사관은 1999년 7월 한국과 체결한 ‘공관부지 교환협정’에 의해 장기임대 형식으로 빌려준 땅으로 알려져 있다.

한국청년연합회 김기주 길라잡이는 “국교정상화가 되고 나서 러시아는 러시아공사관 문서를 내밀면서 옛 러시아공사관을 내어달라고 요구했다”며 “그러나 그 자리엔 이미 건물들이 들어선 상태여서 당시 비어있던 배재여고 자리를 내어주게 된 것”이라며 임대 형식으로 빌려주었다는 것에 의혹을 제기했다.














▲ 캐나다 대사관 신축 예정지
이화여고 맞은 편에 위치할 예정이다.
ⓒ2002 신용철
현재 러시아 대사관이 있는 자리는 옛 배제학당이 있었으며, 서재필 박사가 일제 식민지에서 대한민국의 독립을 염원하며 만든 독립신문을 발간한 자리이기도 하다.

정동지역에는 이렇게 러시아 대사관뿐만 아니라 석조전 뒤편으로 보이는 영국대사관, 정동 예원고 옆에 들어서게 될 캐나다 대사관, 미대사관측에서 신축을 강행하고 있는 덕수궁 터 미사관이 몰리게 될 상황에 놓여있어 한말 열강들에 의해 짓밟혔던 아픔의 역사가 21세기 외국타운으로 전락할 처지에 놓여있는 상황이다.

중명전

중명전은 ‘무거운 빛의 전’이란 뜻을 갖는데 고종이 궁궐의 도서관으로 세운 서양식 건물로 우리나라 최초의 도서관 건물이기도 하다. 현재 중명전은 외관만 원래의 모습이고 내부는 화재로 소각되어 대부분 변형되었다.














▲ 중명전
ⓒ2002 신용철
이곳에는 경운궁에서 러시아 공사관으로 연결되었던 지하 비밀통로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외부인의 출입이 용이하지 않다.

덕수궁에는 세 번의 화재가 있었는데 1904년 일본인들의 방화로 추정되는 화재로 인해 치명적인 피해를 입은 1904년 대화제로 고종이 1904년∼1907년(약3년)동안 머무르며 헤이그 밀사 파견을 위한 밀서를 전달한 곳이기도 한 중면정은 1905년 이토 히로부미의 강압에 의해 을사조약을 맺었던 장소로 국권상실의 역사가 고스란히 숨쉬는 곳이다.

중명전은 순종의 계비 윤씨가 황태자비일 때 살던 곳으로 외국 대신들을 초청하여 피로연을 열기도 했다.

현재 중명전은 1935년 3월 12일 일어난 화재로 외벽만 남고 다 타버린 후 재건되어 외국인구락부로 쓰였으며, 해방 후에는 서울클럽(SEOUL CLUB)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던 것을 1963년 11살 때 일본으로 인질로 잡혀간 영친왕이 이방자 여사와 영구귀국하면서 1974년 74세의 나이로 사망할 때까지 머물렀다.

영친왕 사망후 중명전은 이방자 여사와 아들 이후의 공동명의였다가 무슨 연유였는지 제일은행에 저당을 잡혔다. 그것던 중명전 소유권은 한영, 반도상사에서 결국 동방유량의 계열사인 경한실업에 소유권이 넘어오게 된다.

최근 중명전이 언론을 통해 다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은 노태우 비자금 사건 청문회를 통해서이다. 경한실업 소유였던 중명전이 노태우 비자금 청문회를 통해 소유자가 노태우 전 대통령으로 드러난 것이다. 노태우 전 대통령의 사돈인 경방유량이 사돈인 노태우 전 대통령의 명의로 소유자를 변경했던 것이다.

얼마전 방한해 강연회를 연 마이클 그레이브스교수가 ‘덕수궁보다 미공관이 15년 일찍 지어졌다’고 주장한 근거가 바로 중명전때문으로 미공관이 세워진 후에 중명전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 미대사관 신축 상황도
ⓒ2002 신용철
마이클 그레이브스교수의 발언은 단지 미대사관, 아파트 설계자 개인이 아니라 미국이 한국문화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보여주는 것으로 덕수궁의 여러 전각들 주에서 중명전이 미국공관보다 늦게 지어졌다는 이유만으로 덕수궁보다 미국공관이 먼저 지어졌다고 주장하는 것은 억지일 뿐이다.

중명전은 대부분 원형에서 변형되었으나 창틀의 반원형, 다락방 구조 등을 통해 러시아 건축양식임을 뚜렷이 알 수 있다. 대표적인 러시아아건축에서 창문은 아치형태를 띄며 다락방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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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글 : 경실련 이슈 ‘ 덕수궁터 미대사관 신축에 반대한다.’


             경실련 시민마당 ( 8월 정동탐험)  ( 9월 정동탐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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