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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CEJ 칼럼/경실련이야기] [전문가칼럼] 송년회, ‘함께주의’보다 ‘서로주의’로!
2021.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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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경실련 2021년 11,12월호] [우리들이야기(2)]

송년회, ‘함께주의’보다 ‘서로주의’로!

박만규 아주대 불어불문학과 교수

 

연말이 다가오니 송년회 날짜를 잡는 데 분주하다. 그런 데 왜 연말이면 모든 직장에서 송년회를 가지는 것일까?

우선은 직원들에게 한 해 동안 회사를 위해 행한 수고에 대해 보상과 격려를 하기 위함일 것이다. 우리말에 있는 아름다운 말인 ‘수고’는 일을 열심히 하는 데 대한 찬사의 의미를 담고 있다. 일이 ‘수고’라고 불린다는 것은 구성원들이 집단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여러가지 고통을 견뎌내었음을 뜻한다. 이를 보상해 주기 위해 흔히 여러가지 상을 주어서 격려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상은 단지 크게 수고를 해 준 몇몇 개인에게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발 더 나아가 집단 구성원 전체에 보상을 행하고 모든 구성원들이 함께 고생했다고 하는 사실을 공유하는 의식이 필요하다. 그것이 회식이다. 그리고 연말에 갖는 마지막 회식은 특별히 더욱 성대하게 시행하여 기억에 남도록 마무리해야 한다.

한국인이라면 모두 동의하듯이 우리는 한(恨)이라는 정서를 공유하고 있다. 특히 집단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열심히 뛰다 보면 서로에게 원망도 생기고 각자 나름의 억울함도 생겨서 마음 한구석에 깊은 응어리가 진다. 이러한 한은 해가 가기 전에 모두 풀고 깨끗이 씻어내야 한다. 그런데 한은 나 혼자서 풀고 싶다고 쉽게 풀리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술도 마시고 노래도 부르면서 적절한 분위기를 만들어 모두가 함께 공감하고 이해하는 의식을 진행하면서 다 같이 풀어야 한다. 모든 사람들이 공감하는 분위기 속에서 함께할 때 이것이 가능하다. 집단적인 공감이고 카타르시스이다.

집단 카타르시스를 위해 우리가 동원하는 방법의 첫 번째는 노래이다. 사실 한민족은 노래를 좋아하는 민족이다. 프랑스인 셋이 모이면 토론을 하고, 영국인 셋이 모이면 스포츠를 한다는 말이 있듯이, 한국인 셋이 모이면 노래를 부른다고 말해도 될 정도이다. 동네 어귀마다 있는 노래방의 존재는 이를 입증해 주고 있다. 음악은 감정의 속기법이라고 톨스토이가 말했듯이, 내가 생각하기에 음악은 가장 감정을 고양하는 예술이다. 그리하여 구성원들을 순식간에 동일한 감정으로 묶어 특별한 연대의식을 공유하게 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그런데 여기에 한국의 회식 문화는 특별한 요소를 하나 더 넣는다. 그것은 바로 회식의 의식(rite)화이다. 모임 의 순간을 보다 더 특별한 행위로 기억하도록 하기 위해, 보다 오래 지속되는 추억으로 만들기 위해 우리는 회식을 단순히 음식을 먹고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가 아니라 하나의 특별한 의식, 하나의 특별한 이벤트로 만든다. 예를 들어 회식에 단골 메뉴로 등장하는 폭탄주가 그러하다. 폭탄주는 단순히 술을 취하게 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제조(?) 과정을 볼거리로 만들고 술자리 자체를 이벤트화 한다.

술로 인해 적당히 분위기가 달아오르면 여기에 춤도 곁들여지면서 회식은 더욱 이벤트화 한다. 나는 K팝이 전세계적인 성공을 거둔 이유 가운데 하나가 단지 노래가 아니라 거기에 항상 춤, 특히 집단적인 춤, 즉 군무(群 舞)를 동반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것도 바로 노래라는 작품에 댄스를 넣어 노래를 이벤트화 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사실 이벤트화는 한국인에게 매우 자연스러운 행위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소풍을 가면 반드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었고, 장기자랑이라는 순서를 통해서도 소풍이라는 행위 자체를 예능화하고 이벤트화 하였으며 이를 내면화 해왔기 때문이다. 유년기부터 가졌던 이러한 학습 경험은 이벤트화를 매우 자연스러운 행위로 받아들이게 했다. 거기에 대학만 들어가면 술이 더해지고 합법화된다.

이것은 회식을 그리스 비극과 유사한 장르로 만든다. 마치 그리스 비극에서 코러스를 들으며 마음속에 억압되었던 슬픔에 공감하고 이를 온 관객이 함께 표출하고 배출함으로써 그동안 쌓였던 감정의 응어리들을 해소하고 이를 통해 마음을 정화(淨化)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다만 한국의 회식에서는 한발 더 나아가 관객도 직접 의식에 참여한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마치 마당극처럼. 주지하다시피 마당극은 배우와 관객이 묻고 답하고 서로 호응하고 함께 교감하면서 진행하는 형식을 갖고 있다. 그래서 공연장과 객석의 구분도 없다.

우리는 3년 전 그룹 퀸(QUEEN)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Bohemian Rhapsody)가 크게 흥행했을 때 우리나라에서 매우 특이한 현상을 목도했던 기억이 있다. 그것은 극장에서 관객들이 모두 함께 노래를 부르는 이른바 ‘떼창’ 현상이었다. 집에서 혼자 보면 될 영화를 굳이 극장이라는 공개적인 장소에 가서 생면부지의 사람들과 함께 보면서 어깨동무하고 노래를 부르는 이유를 서양인들은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우리는 이렇게 집단 카타르시스와 이의 이벤트화라는 독특한 문화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대학의 MT, 교회의 부흥회 등 많은 모임 에서 우리는 이러한 이벤트화의 예를 본다.

그런데 이러한 집단 카타르시스라는 회식문화에는 숨겨진 메카니즘이 하나가 더 있다. 그것은 수고에 대해 보상과 격려 외에 유대와 결속을 통한 충성심의 강화라는 이중적 장치이다. 하급자들에 대해 ‘수고했다!’라고 말하면서 보상해주니 집단에 ‘계속 충성하라’라는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다. 근무시간 내의 위계질서가 회식 자리에 와서도 연장되어 분위기를 지배하는 것으로부터 이를 잘 알 수 있다. 회식 자리에서도 집단우선주의가 작동하는 것이다.

기성세대는 이러한 회식을 우리가 가난할 때 경제 기적을 일으킨 원인 중 하나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개인의 권리를 중요시하고 워라벨을 꿈꾸는 신세대에는 이제 불편한 자리가 되고 있다. 회식을 도리어 끔찍한 감정노동으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것은 근무와 회식의 목적을 생각하면 된다. 근무시간 내에서 목표하는 것은 성과이지만 회식에서 목표하는 것은 공감이다. 공감은 자유를 전제로 한다. 무엇보다 참석을 강제화하면 안 된다. 자유롭게 참석할 수 있도록 권리를 보장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상명하복식의 분위기를 조장해서도 안 될 것이다. 술과 음식, 노래, 춤 등은 자발적으로 행할 때 아름다운 것이고 감동이 있는 것이지, 강요할 때는 엄청난 고통을 수반하는 것이고 인권의 침해이다.

근무 시간에는 ‘함께주의’가 좋다. 집단 전체를 위해 협력하여 함께 일하는 것이 개인의 정신 건강에도 좋고 조 직의 성과도 올려 주니까.

그러나 회식 시간에는 ‘함께주의’가 맞지 않다. 술을 잘 하는 사람도 있고, 못하는 사람도 있으니까. 노래를 잘 하는 사람도 있고, 못하는 사람도 있으니까. 특정 음식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싫어하는 사람도 있으니까. 춤을 추고 싶은 사람도 있고 춤을 추지 않고 싶은 사람도 있으니까. 회식 자리에서는 ‘서로주의’가 좋다. 서로 상대의 취향과 인격을 생각해주고 배려해 주는 것이 진정한 집단 공감을 일으켜주어 카타르시스를 통해 개인의 행복 뿐 아니라 집단의 단합에도 좋다.

이번 송년회에서는 ‘함께주의’가 아니라 ‘서로주의’로 가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