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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CEJ 칼럼] [전문가칼럼] 장애는 비용이 아니다!
2022.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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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경실련 2022년 5,6월호-전문가칼럼]

장애는 비용이 아니다!

박만규 아주대 불어불문학과 교수

 

5월 21일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은 지난해 말부터 진행해온 지하철 시위를 재개했다. 이에 대해서 울경찰청은 이 시위가 비록 사회적 약자 단체의 의사표현이라고 하더라도 시민의 권리를 과도하게 침해하는 것이라며 경찰의 강제권을 행사하겠다고 밝혔다. 그동안 출근길 지하철 ‘휠체어’ 시위는 장애인 이동권에 대한 사회적 논쟁을 불러일으켰으며, 여론은 이에 대한 옹호론과 비판론으로 갈려 팽팽하게 맞서고 있다.

그렇다면 장애인 ‘이동권’ 요구의 근거는 무엇인가? 영어에서는 ‘장애’를 handicap(핸디캡)이라고 하는데 이의 어원을 살펴보면 답을 얻을 수 있다.

‘handicap’은 ‘hand in cap’(모자 속 손)이라고 불리는 1650년대에 시작한 게임에서 유래했다. 이 게임에서는 한 사람이 상대방이 갖고 있는 물건 중 하나를 소유하고 싶을 때 비슷한 가치의 자기 물건을 내놓으면서 거래를 시도한다. 이때 심판이 판단할 때 두 물건의 가치가 불균형할 경우 값이 덜 나가는 물건의 소유주에게 물건을 더 내놓으라고 한다. 그 사람이 물건을 더 내게 되면 이제 두 교환자는 손을 모자 속에 넣는다. 모자에서 손을 뺐을 때 손이 펴져 있느냐 혹은 주먹을 쥐고 있느냐로 각자 거래에 대한 동의와 거부 의사를 표시하며 진행하는 게임이었다. 이로부터 가치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더 부담하는 행위나 조처를 이 게임의 이름인 ‘hand in cap’이라 부르기 시작했는데, 발음이 변하여 handicap이 된 것이다.

이는 이후 경마에도 영향을 미쳤다. 1754년에 최초의 기록이 나오는 ‘핸디캡 경기’(Handy-Cap Match)가 그것이다. 당시 경마가 인기가 있었지만 1등마가 계속해서 1등을 하는 문제가 노정되었다. 잘 훈련되고 근육이 많은 말이 유리하므로 너무나 뻔히 예측이 되어 내기가 성립이 안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더 젊고 더 강해서 더 빠를 수밖에 없는 말에 쇳조각 같은 것을 채워서 몸을 무겁게 하여 다른 말들과 기회의 균형을 맞추도록 하였다.

이러한 핸디캡은 달리기 경주에도 적용되었는데, 더 빠른 사람이 더 뒤에서 출발하게 하도록 했다. 이어 골프나 폴로, 볼링 등의 스포츠에서도 이전 게임까지의 평균 성적에 핸디캡을 적용함으로써 이길 수 있는 기회의 조건을 균등하게 했다. 스포츠 분야에서는 대개 ‘핸디’라 고 줄여서 부른다. 흔히 골프에서 ‘핸디’라고 하는 것이 이것이다.

이후 스포츠 분야를 넘어 1915년에는‘ handicapped’ (핸디캡을 받은)가 장애를 가진 아이들에게 쓰였고, 1958년부터는 전체 장애인을 가리키는 말로 쓰이기 시작했다. 즉 비장애인들과 기회를 균등하게 하기 위해 생활에서의 조건을 보정받는 사람이라는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다만 최근 들어 영어서는 이 ‘핸디캡’이라는 어휘가 점점 덜 쓰이고 있음을 볼 수 있는데, 이는 일종의 장벽이나 한계의 의미를 가지는 말이기 때문에 부정적 뉘앙스가 느껴지기 때문이다. 장애인들을 봐주는 것 같은 느낌을 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용어를 써야 할까? disability(장애)가 올바른 용어로 제안된다. 왜냐하면 이는 신체의 일부를 쓸 수 없는 상태를 뜻하는, 즉 움직임이나 감각, 활동의 한계를 의학적으로 정의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이때 주의할 것은 disabled를 명사로 쓰지 말라는 것이다. 영국 정부의 가이드라인을 보면 disabled 다음에 반드시 person이나 people을 써서 장애를 가진 사람이라는 의미로 쓰라고 권고하고 있다. 부유하다는 뜻의 형용사 rich에 정관사가 붙은 the rich가 ‘부유층’을 뜻하게 되는 것처럼, 영어에서 정관사를 앞세워 형용사를 명사적으로 사용하면 그런 특성을 가진 계층 혹은 집단을 의미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처럼 장애인을 단지 장애를 가지는 개인으로 볼 것이지 장애인을 특정한 부류로 계층화 또는 집단화하는 것을 경계하는 것이다. 요컨대 장애인을 특별한 사람들의 집단으로 규정해서는 안 되고, 단지 비장애인들과 동등하게 생활할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들어 주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장애인들이 진정 원하는 것이기도 할 것이다.

그런데 전장연의 시위는 우리 사회가 장애인의 이동권에 대해 살펴보고 바람직한 해결 방안을 찾는 계기가 되어야 할 텐데,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그러한 대화는 온데 간데 없고 그저 전장연의 시위 방식에 대한 찬반으로 변질되어 버렸다.
이러한 변질의 원인이 무엇일까?

우선은 정치인들과 고위 관료의 잘못이라 하겠다. 그들은 힘있는 사람들의 불만 해결에 더 관심이 있다. 그래야 자신들의 입지가 더욱 공고해지고 권력이 더욱 확대되기 때문이다. 반면에 힘없는 사람들의 불만 해결에는 큰 관심이 없다. 그들로부터 불만을 들으면 대체로 말만 하고 행동에 옮기지는 않는다. 예컨대 원래의 약속에 따르면 2004년까지 엘리베이터를 100% 설치했어야 하지만, 서울 시내에는 아직도 설치되지 않은 역들이 존 재한다.

비로 이러한 이유들 때문에 전장연의 시위가 여기까지 온 것이다. 그들에게 다른 방도가 없기 때문이다. 물론 장애인들이나 그 단체의 대표들이 사실 파악이나 관련 법에 대한 지식과 공부가 깊지 못한 경우가 있다. 그러나 그러한 점을 지적하면서 문제 제기의 권리까지 무시하는 것은 온당치 않다. 그들에게 고위 관료나 정치인에게 기대하는 수준의 지식을 요구하는 것은 지나치다 하겠다.

다음으로는 언론의 잘못을 들지 않을 수 없다. 장애인 이동권 시위에 대해 언론은 지난 21년간 투쟁의 이유를 짚어서 왜 이런 불행이 있는지를 취재하고 이를 시민들에게 알려서 시민들이 올바른 지식과 정보를 갖게 하고 이를 통해 올바른 여론을 형성하는 데에 기여해야 했다. 그러나 많은 언론들이 시민 불편을 제목으로 뽑아 보도함으로써 사건을 처음부터 특정 시각으로 몰아갔으며, 일부 사례를 선정적인 제목으로 침소봉대하여 장애인 단체 측에 대부분의 잘못을 귀인시키고 있다. 특히 지난 2월 전장연이 시위를 하면서 출입문 사이에 고의로 정지해서 지하철 운행을 막는 모습과 지하철이 지연되자 할머니의 임종을 지키러 가야 한다고 울부짖는 시민에게 전장연 측이 버스타고 가라고 응한 모습 등을 집중적으로 기사화했다.

방송에서의 토론이나 대화를 보아도 마찬가지이다. 장애인 단체의 입장에 동조하는 입장은 별로 없고 주로 시위 방식의 문제점에 주력하고 있다. 심지어 그들의 시위방식에 ‘비문명’이라는 프레임을 씌우기도 했는데, 이것이 결코 장애인 시위의 본질이 아닌 것을 모를 리 없건만, 참으로 안타깝기 짝이 없다.

전장연의 방식은 분명히 적절치 못했다. 시위의 방식이 과격했다. 그러나 그러한 이유로 그들의 항의 내용 자체가 잘못된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표층에 드러난 일부 잘못된 행동을 근거로 전체를 잘못이라 규정해서는 안 된다.

사실 시위라고 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다른 시민에게 피해를 주는 면을 불가피하게 갖고 있다. 문제는 이를 얼마나 사회적 연대의식으로 이해해 주느냐의 문제이다. 프랑스의 경우 우리에 비해 상대적으로 다른 시민들의 시위를 비교적 잘 이해해 주는 편이다. 시위의 역사가 우리보다 훨씬 오랜 나라이고, 무엇보다 프랑스 혁명을 일으킨 나라이므로, 우리와 단순비교할 수는 없다. 내가 처음 프랑스에 갔을 때 대중교통의 큰 파업으로 모든 시민들이 불편을 겪은 적이 있었는데 임시로 편성된 버스에 함께 탔던 옆자리의 할머니로부터 “파업한 사람들을 이해하고 불편하지만 괜찮다”라는 말을 들었을 때 참으로 놀라웠다. 이것은 한 국가와 사회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사이의 연대의식이다. 우리나라는 단기간에 압축성장을 하는 바람에 많은 혼란을 겪고 있지만 앞으로 조금씩 바뀌어 나갈 것으로 기대한다. 세상은 서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야 하는 공간이니까. 그러려면 본인의 불편 감수가 반드시 필요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