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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대표 연속칼럼 [사법주권회복을 위한 기소대배심]
2017.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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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승옥(목포경실련 공동대표, 변호사박승옥법률사무소)

명량과 사법개혁

국민의 사법주권 회복이 사법개혁의 핵심이다.

임진왜란 당시의 해전은 원양에서가 아니라 육지의 해안 가까이서 벌어졌으므로 해안을 어느 쪽이 지배하느냐가 전투의 양상에 영향을 크게 미쳤던 것 같다. 초전에 4 차례나 출진하여 연전연승할 때까지는 경상도 해안에 대한 왜군의 정비와 통제가 아직 미흡한 상태였기에 조선수군은 퇴로차단의 염려 없이 진격해 들어가 적선을 찾아 쳐부수다가 지치면 포구에서 쉬거나 비바람을 피하거나 할 수 있었고 적의 움직임에 관한 정보를 얻을 수도 있었다. 조선수군을 제압하고 서해로 나가려 했던 왜군의 전략이 수군끼리의 조우를 성사시켜 주었으니 말 그대로 수군끼리의 싸움이었다.

연거푸 깨지고 난 저들은 우리 수군을 상대하기를 아예 포기하고 육지해안을 정비하여 조선인 부락을 소개하고 망루를 쌓고 병력을 배치하고 포대를 설치하였다. 그 때부터 충무공은 적의 수군을 상대한 것이라기보다 육군을 상대해야 하게 된 셈이었다. 우리 육군이 적을 내몰면 그 적을 바다에서 우리 수군이 깨부수기를 기대한 합동작전에 충무공이 (부득이) 참가하였으나, 육군의 성과가 미미한 터에 해전 아닌 싸움에서 육지를 향하여 수군이 승전할 여지는 별반 없었던 것이다. 적들은 우리의 동태를 보아 여차하면 육군으로 공격하기도 하고 배로 공격하기도 해서 아군의 피해가 있었던 것인데, 이미 사방이 적으로 둘러싸인 경상도 소굴에서 휴식도 취하지 못한 채 우리 수군이 겪었을 고초가 느껴진다. 그러한 두 번의 사례(1593. 2월 5차 웅포, 1594년 9월 8차 장문포)를 패전으로, 나머지 6, 7차의 출진을 별무성과의 전투로 “조일전쟁”의 저자 백지원은 평가하고 있다. 충무공의 승전은 그 이길 만한 여건이 되었기에 얻어진 것일 뿐이고, 그에게도 어쩔 수 없는 한계가 있었던 것임을 알게 해 준다.

대규모 출진이 위험하여 한산도를 굳게 지키는 것만 같지 못함은 적어도 이 시점에서 분명해 졌던 것이다. 조정의 독촉에도 불구하고 정유재란 있기까지 2년 수개월 동안 충무공은 움직이지 않았다. 큰소리치던 원균이 통제사가 되고 보니 그 출진해서는 안 됨을 비로소 깨닫고서 머뭇거리는 것을 도원수 권율이 출진을 강요하여 칠천량의 비극이 있게 된 것이었다.

명량 바로 코 앞인 해남 어란에 집결했던 압도적 숫자의 왜군이 병력 일부를 육지로 진격시켜 진도 벽파진과 해남 우수영을 공격하고 명량 양안을 접수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랬더라면 13척의 판옥선은 오히려 포위되어 칠천량이 재현되었을 것이다. 저들이라고 그 생각을 못 했을까마는, 진도 해남의 곳곳마다에서 노적봉을 돌면서 강강수월래를 해 대는 저 수많은 사람들을 육지에서 상대함은 일을 그르칠 위험이 있다고 판단한 저들이 그걸 포기하였던 것이라고 봄이 타당할 것이다. 정유재란 때 육지에서 바다에서 충무공과 함께 싸운 고흥 보성 영암 일대의 의병들에 관하여 자료들이 검색된다. 육지에서의 의병전략은 육로를 통한 왜적의 접근을 막는 데 두어졌던 것이다. (네이버검색, 황병성, 정유재란기 이순신의 전략과 의병막하인물). 바다에서라 하여 달랐을 수 없으니, 의병들이 모아온 크고 작은 배들은 전투에도 참여하고 군세의 위장에도 쓰였을 것임에 의문의 여지가 없다.

충무공은 전라좌수사가 되기 전에 정읍현감을 거치셨고 전라우수영의 수군과 함께 그 동안 남해바다를 지켜오셨으니 살아 돌아온 그 양반과 함께인 한 모두가 죽을 힘으로 싸울 수 있었던 것이다. “신에게는 아직 열두 척이 있나이다.” 한 말은 그걸 의미한 것이었다. 그것이 명량싸움이었으니, 백성들의 마음을 알고 늘 백성들과 함께 움직이면서 백성들의 자발적 주도적 참여의 길을 열어주었기에 열두 척은 수백 척 수만 명 이상일 수가 있었던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의 새 정부 아래서 사법개혁과 검찰개혁이 추진되고 있는 상황이다. 고위공직자수사처의 설치라든지 경찰수사권의 독립이라든지 다들 그 요구되는 사항들임에 대하여 필자는 이의가 없다. 여기에서 나아가 보다 더,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검찰과 법원의 절차들에 국민의 참여를 대폭 확대하는 일이라고 나는 본다.

수사와 기소절차에 대배심 제도를 도입하고 민형사 재판절차에서도 소배심 제도를 확대하여 국민의 마음과 상식이 검찰 사법 절차에서 사안을 주도적으로 판단하고 결정하게 할 때 우리는 그때의 그들처럼 함께 영광스러울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필자의 책 미국연방대법원 판례시리즈 V에 실린 Hurtado (1884), Duncan (1968), Baldwin (1970), Calandra (1974) 등 일련의 판례에서 궁극적으로 배심제도는 적법절차의 필수적 요소임이 확립되었다. 대배심 소배심을 아울러 국민의 자유와 정의의 수호에 있어서의 배심제도의 역할을 그것들은 잘 설명하고 있다. 배심제도의 도입과 확대는 재판과 수사절차에서의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문제라든지 전관예우 등 우리의 사법절차에 잔존해 있는 악폐들의 제거에도 기여할 것이다.

거듭, 그리고 언제나, 그때 저 명량에서처럼 국민으로 하여금 주인공이 되게 하는 데 사법 검찰 개혁의 해법은 있다. 그것은 국민주권의 당연한 명령에 다름 아니다. 새 정부의 개혁의지가 성공을 거두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