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위기의 원인은 금융실명제가 아니다

관리자
발행일 2000-02-10 조회수 3235
경제

여야 3당은 12월 20일 금융실명제 대체 입법의 내용으로 무기명 장기채 발행, 금융소득 종합과세 무기한 유보, 금융거래 비밀 철저히  보장등에 합의하고 이를 연내에 국회에서 처리키로  하였다. 이는 그간 학계와 시민단체에서 실명제의 근본을  흔드는 내용이라며 강력하게  반대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정치권이 이를 무시하고 처리하는 것이다.


우리는 정치권의 이러한 합의는  지금의 경제위기에  대한 잘못된 인식에  기초한 것으로 단지 정치권과 재계 일부의 편의에 의한 조치로 전체 국민의  이해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것임을 분명히 한다. 정치권의 합의는 실질적으로 금융실명제를  폐지하는 것이다.


우리는 금융실명제가 깨끗한 정치를 가능케 하고 경제정의와 선진적인  경제질서로 나아가는 데 필수적인 제도라는 것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위에서 이 제도를 수용하였고 IMF와의  합의과정에서도 이미 실명제의  골격을 유지키로 합의한 바 있다. 그럼에도 이를  폐지하려고 하는 것은 극소수 계층의 이해를 대변하고자 하는 것외에  그 어떤 납득할만한 이유를  찾기 힘들다. 


첫째, 금융실명제는 경제위기의 주범인가? 경제위기의 원인을 금융실명제에서 찾는 것은 현재 한국경제의 기본 현황도 파악하지 못한 것이다.


정치권은  금융실명제가 경제위기의 원인이 되었다는 이유로 실명제로 인해  돈이 돌지 않고 지하자금이  산업자금화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미 IMF와의 합의에서도 드러나듯이 현재의 경제위기 원인은 한국경제의 구조적 문제에 기인한 것이다. 기업이 자금난을 호소하는 것은 그동안 관치금융질서에 젖어 있던 우리 금융시장이 WTO 체제에 따라 금융시장 개방을 앞두고 금리가 부분적으로 자유화되기  시작하였고 자율적 경영이 이루어질 수 밖에 없게 되자 은행의 부실을  두려워한 금융권이 부실기업에 대한 대출을 신중히 하기 시작하였다. 부실기업에 대출되었던 자금을 회수하기  시작하면서 대부분의 재벌그룹도  부채가 자기자본의 3-5배에 달하는 우리  기업들의 특성상 기업들의 자금난이 가중되기 시작하게  되었다.


그러자 기업들은  단기채를 끌어다 쓰기 시작했고 이는 기업의 금융비용을 가중시켜 큰 부담이 되기 시작하였다. 기아와 뉴코아 등의 부도원인을 지적하면서 항상 나오는 것이  단기채였다. 이런 기업들이 한국 재벌들의 공통의  문제인 선단식 경영으로 인해 산하 기업의 부도가 그룹 전체의 부도로 이어졌던 것이다. 상호지급보증으로 그룹 전체가 얽혀 있으니 한  기업이 부도가 나면 그룹 전체의  부도로 이어졌던 것이다. 기업의 부도는 은행들의 부실채권 규모를 확대해 갔고 은행들은 더욱 대출금 회수에  열을 올리게 되면서 자금난은  더욱 가중되었다.


 결국 김영삼정권 초기부터 금융개혁 등을 시작했다면 있지 않아도 좋을 금융위기를 임기말에 와서야 시작함으로써  자초하였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기업들도 94-95 호황기에 구조조정을  하지 않고 여전히 과다차입하거나 방만한 경영을 함으로서 부실 기업을 자초하였던 것이다. 두산그룹 등이 일찍 구조조정에 나서 위기를 넘긴 것을 다른 그룹들은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한다.  따라서 지금의 경제위기는 본질적으로 금융시장 개방을  앞두고 금융개혁을 서두르지 못한 정부와 상호지급보증 등으로 얽혀 있는  재벌그룹들이 호황기에 구조조정을 하지 못한 것이 가장 큰 원인인 것이다.   


 둘째, 실명제를 폐지하면 지하자금이 산업자금화 하는가? 10조원에서 30조원까지로 추정하는 엄청난 규모의 지하자금이 실명제로 인해 묶여 있고 이로 인해 사채시장의 자금흐름이 막혀 금리가  상승하는 등 금융비용을 높여 금융위기가 왔으니 실명제를 유보해야  한다는 이 주장에 동의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우선 지하경제와 소위 장롱속으로 숨은 퇴장현금은  엄연히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학계 추론으로는 퇴장현금은 아무리 많이 잡아야 1조원 정도일 것이라고 보고 있고  이는 실명제 실시 전과 후가 큰 차이가  없으리라는 것이 일반적인 의견이다. 더구나 퇴장현금은 구매력을 행사하지 않는 돈이기 때문에 단지  금융시장의 유동성을 줄일 뿐이므로 이는 통화공급의 확대로 얼마든지  상쇄할 수 있는 규모이다.


    반면 지하경제에서 움직이고 있는 돈은 자금의  구성과정과 이윤의 확보과정 등이 불법적인 경우가 대부분이고 동시에 세금을 피해  다니는 것이 일반적이라 자금의 소유주를 정확하게 알기  어렵다. 그러나 이 돈은 이미 금융권을 통해 산업자금화  되어 시장에서 움직이고 있는  돈이다. 실명미전환 예금인 3조원의 돈도  이미 금융기관을 통해 산업자금으로 쓰이고 있으며 나머지 돈도 차명으로-이 돈도 현행 실명제 아래서는 소유주에게는 차명이지만 금융거래로 볼 때는 이미 실명인 돈이다-시중에서 유통되고 있는 돈이다.


 따라서 숨어 있는 돈의 의미는 두가지 인데 하나는 퇴장현금이고 하나는 소유주가 소유주의 이름으로 사용할  수 없는 차명계좌에 속한  돈이다. 퇴장현금에 대해서는  부족분 만큼 유동성을  늘리면 되는 것이고 차명계좌에 속한 돈은  이미 시중에  유통되고 있는 돈이므로  새삼스레 시중에 나올 돈이 특별히 없는 것이다. 단지 차명계좌의 성격상 이 돈은 불법적으로 조성된  정치자금이거나 사채시장  큰 손들이거나  재벌그룹 대주주들의 자금일 가능성이 큰 바  이들이 자신들의 돈에 대해  면죄부를 받아 마음대로 쓰고자 하는 것이다. 


 따라서 실명제를 유보해야 한다는 논리는 허구적이며  그 진실은 정경유착이나 부정부패로 자금을 조성한  몇몇 정치인이나 재벌그룹의 이해를 대변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정치권이 합의한 무기명장기채권의 발행이나 종합과세의 무기한 유보는 이런 점에서 마땅히 철회되어야  한다.


 우선 무기명장기채권의 경우 이는 결국에는 재벌들의 불법적 상속과 증여를 합법화해 줄 뿐만 아니라 그동안 불법적으로 조성되었던 자금에 당당하게 면죄부를 주는 등 그 부작용이 너무나 크다. 더구나 현행 제도아래서 무기명 장기채가 오히려 자금은닉 수단이 되어 제도금융권안에 있던 자금마저 무기명 채권으로 몰려 엄청난 부작용이 예상될 뿐이다.


 둘째로 종합과세의 무기한 유보도  공평과세라는 애초의 실명제의 취지를 근본적으로 훼손하는 것이고 결국 어려운 경제난을 극복하기 위해서 고통을 분담해야 할 시기에 오히려  부익부 빈익빈을 심화시키는 조치를 취함으로써 고통분담의 취지에 정면으로  역행하는 것이다. 정치권이 물가상승과 세금인상,  실업의 고통에 내몰릴  국민들에게 더욱 허리띠를 졸라 매 줄 것을 요청하면서 극소수 부자를 위해 공펑과세의 취지를 훼손시킨다면 어느 누가 고통을  분담하려 하겠는가?


 그러므로 현행 금융실명제의  골격이 절대로  훼손되어서는  안된다. 금융실명제의 보완은 다음과 같은 방향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첫째, 현재의 금융, 외환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도 IMF의 요구대로 실명제의 골격은 유지되어야 하며, 차명거래도 금지되어야 한다. 오늘의 경제위기는  정경유착과 관치금융,  비효율적인  산업구조로 인한 총체적이고 복합적인  것에서 기인한다.  금융실명제가 문제해결의 근본적인 수단은 아니지만 이상과 같은 문제는 금융실명제가 없으면  접근 자체가 어려운 문제들이다. 선거법의 개정과정에서도 정치자금실명제가 도입되지 않았고 자금세탁방지법도 제정되지  못하였다. 이렇게 되면 정치권의 떡값도 여전히 처벌이  어렵고 기업의 비자금조성도  근절되지 못해 기업경영의 투명성 확보도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세계적 투자자인 조지 소로스조차 도대체  한국기업의 규모가 어느  정도 되는 지  알 방법이 없어 투자를 하지 못하겠다고 하고 있지 않는가?


더구나  자본시장 개방으로 악성 단기투기자금인  국제 핫머니의 경제교란활동과  우리나라 기업에 대한 공격적 인수도 파악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회계의 투명성은 우리 내부의 기업 지배구조의 변화를 위해서도 필수적이지만  이렇게 국제 핫머니의 경제교란활동을 막기 위해서도 필요한 것이다. 따라서 현행의 실명거래 규정을 실소유자 규정으로 전환하여 차명거래를  금지하여야 한다.  


 둘째, 금융실명제의 비밀보장에 관한 조항은 대폭 강화해야 한다.  국민들에게 금융실명제에 대한 왜곡된 인식을 심어 주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것 중의 하나가 비밀보장에 관한 것이다. 금융거래에 관한 비밀은 영업비밀일 수도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동안 정부가 혹은  집권당이 스스로 금융거래에 관한 비밀을 가벼이 취급한 것은  금융실명제의 근간을 흔든 행위이다. 특히 현재의 긴급명령에 의하면 금융기관의 내부 혹은 상호간의 업무상 필요에 의한  경우나 기타 법률규정에 의한  의무 제출과 같은 포괄적 규정등은  공권력이 자의적으로 금융거래의  비밀에 개입할 소지가 있는 조항이다. 따라서 이는  마땅히 삭제되어야 할 조항이며 향후 어떠한 경우든 금융거래 내역의 의무제출은 반드시  사법부의 허락을 받아야 하는 것으로 규정하여야  하며 공권력이 이를 어길시  이또한 엄격하게 처벌받도록 하여야 한다.  


 셋째, 종합과세는 유보되어서는 안된다. 종합과세가 특별히 유보되어야 할 이유는 없다. 실명제의 골격이 유지되고 비밀이 엄격히 보장되며  차명거래가 금지된다면 어차피  금융소득은 투명하게 된다. 이 경우 금융소득에 대해 공평과세가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은 경제정의에 부합하는 것이다. 더구나 대부분의 예금주들은 종합과세를 통해 오히려 금융소득에 대한 과세가 낮추어지는 이득을  보고 있다. 다만 고소득자 일부만 과거보다 손해를 보는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경제정의라는 면에서 종합과세가 특별히 유보되어야 할 이유는  없는 것이며 더구나 지금처럼 경제난 극복을 위해 전국민이 고통을  분담해야 할 시기에 부익부 빈익빈을 심화시키는 조치에 정치권이 합의하는  것은 진정한 고통분담을 모색하는 태도가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밝혀 둔다.  


 우리는 이상과 같은 근거와 이유로 금융실명제에  대한 현재의 정치권의 합의는 취소되어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지금이라도 정치권은 국민들에게 금융실명제가 경제위기의 원인이라든지 실명제가 예금주의  금융거래내역을 공권력이 자의적으로  볼 수 있어 비밀이 보장되지  않는 제도라는 왜곡된 인식을 주고 있는 것에 대해 이를 바로 잡으려는  노력을 기울여 줄 것을 촉구한다. 애써 바른 제도를 만들어 놓고 눈 앞의 조그만 이해에 집착해 다시 우리  사회의 공정한 제도를 뒤죽박죽으로  만드는 행위를 즉각 중단해야 한다. 금융실명제의 제도적 보완은 경제정의에 부합하는 방향에서 이루어져야 함을 강력히 촉구한다.


 특히 김대중 당선자에 대한  국민적 기대가 그  어느때 보다  큰데, 금융실명제 폐지라는 첫출발을 잘못하여  또 다시 김영삼정부처럼  불행한 마무리를 한다면 이는 모두에게 소망스럽지  못한 것이다. 김대중 당선자의 용단을 기대한다.    


  1997년 12월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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