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실련의 20년, 우리 사회 미래의 200년

관리자
발행일 2009.11.17. 조회수 609
칼럼

 


경실련의 20년, 우리 사회 미래의 200년



김성훈(전 경실련 공동대표)


나는 1989년 경실련 창립에 한 발짝 늦게 참여하였다. 해상왕 장보고 대사의 족적을 찾아 중국 대륙을 헤매고 다니다가, 문득 경제정의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농업 환경 통일 분야의 아젠다 개혁이 필수불가결하다고 깨달았다. 그래서 1년 늦게 경실련에 몸을 들여 놓았다.


첫 번째 부딪친 난관은 경실련 출범시의 2대 과제였던 금융실명제와 토지公개념 정책의 실현이었다. 금융실명제는 숱한 저항과 반대 찬성 등 우여곡절 끝에 김영삼 대통령의 결단으로 시행되었다. 선진국에 비해 너무나 늦은 제도개혁이었지만 15년이 지난 지금 되돌아 볼 때 그때 경실련이 치열하게 싸워 성취하지 못했다면 우리 사회는 얼마나 부정부패와 사기 횡령 범죄가 더 팽배했을까. 그러나 당시 현재와 미래를 투시해 볼 때 토지공개념(土地公槪念)을 정치 경제 사회제도면에 실현해내지 못한데서 파생된 사회 각 분야의 부작용-투기와 부정 부패의 창궐을 미리 막아내지 못한 책임-을 통감한다. 당시 고위관료를 앞세운 기득권 세력의 반대 로비(?)에 경실련 볼런티어 내부의 의견이 분열되어 순진한 조세주의 정책해법에 굴복한 것이 지금도 우리 경제사회에 엄청난 손실과 비리를 초래하고 있다. 오늘날 위장전입과 불법농지매입을 하지 않은 임명직 고위관료가 없다고 할 만큼 사회 각계의 지도층들이 솔선하여 범법 투성이가 된 현상이 상당부분 우리 경실련의 나이브했던 운동 때문이라고 말해도 변명할 수 없을 것 같다.


두 번째, 우루과이 라운드(UR)에 임한 경실련의 신속 정확한 정보와 대안 중심의 경제정의실천운동의 교훈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미국 유럽 일본 등 선진제국의 협상 동향정보를 신속히 단독 입수할 수 있는 네트워크를 갖춘 경실련은 단군 이래 최초로 186개의 정치, 종교, 환경, 소비자 시민단체들을 망라하여 쌀과 기초농산물 지키기 범국민비상대책위원회(후에 ‘우리 쌀, 우리 농업 지키기 범대위’로 개칭)를 이끌었다. 비록 경실련의 정책제안이 제대로 수용되지 못했으나 경실련이 주도한 정보 중심, 대안 중심의 국익과 기초산업지키기 운동은 지금까지도 대안중심의 시민운동 전형(典型)으로 인정받고 있다. 마침내 정부를 움직여 협력관계로까지 발전시켰었다. 당시 언론에 발표한 다음에라도 즉시 원 자료를 알려주기 바란다는 주무각료의 통사정이 있었는가 하면, 총리가 경실련 대표들을 불러 막바지의 UR 협상대책을 협의 했을 정도였다. 1995년 WTO의 발족 및 가입에 앞서 경실련을 필두로 한 범대위의 투쟁의 결과, 여야가 만장일치로 “WTO 이행에 관한 법률”을 통과시켰다. 동법률은 남북한 간의 거래가 관세가 부과되지 않는 민족 내부간 거래임을 규정했고 농업직접지불제도를 명문화하였다. 그리고 한 차례 대통령의 사과와 두 차례의 총리의 경질, 세 차례의 장관의 문책성 교체를 했고 대통령 직속으로 농어촌발전위원회라는 자문기구를 탄생시킨 바 있다. 그 활동들을 문건으로 정리해 놓은 경실련의 소책자들과 보고서가 다름 아닌, 우리 쌀 어떻게 지킬 것인가, 벼랑에 선 우리 농업 농촌을 살리자, WTO와 한국농업, 그리고 제2의 UR에 대비하자 등이다.


세 번째 기록해 두어야 할 분야가 경실련 통일협회의 활동상이다. 경실련에 대한 사회적 평가와 기대가 높아지면서 “왜, 경실련은 남북통일의 문제와 북한 동포에 대한 활동이 없는가”라는 주문이 쏟아지자 92년 초부터 광범위하게 전문가들을 연달아 초청한 연구 세미나 시리즈를 개최하였다. 그 논의의 결과 유재현, 서경석 전 사무총장들이 앞장서 경실련 통일협회의 발족을 서둘렀고 초대 운영위원장에 필자가 그리고 정책위원장에 외국어대 이장희 교수가 조요한 숭실대 총장을 초대 이사장으로 모시고 출범하였다. 우선 객관적이고 실사구시적인 연구와 세미나를 통하여 정부시책을 유도하고 통일한국을 대비한 국민교육 그리고 정부와 국민간의 교량역할을 자임하였다. 역량이 비축될 경우 실천강령으로서 남북한 교류와 협력추진, 남북간 민간수준의 나눔운동 등을 계획하였다. 당시로는 통일을 화두로 삼는 단체로서 우리가 효시였다. 민족화해부터 이루는 바탕 위에서 교류와 협력을 강화해 나가는 과정에서 비이념, 비정치, 비정파성을 강조한 통일기반 실천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그러다가 뜻하지 않은 암초에 부딪쳤다. 1994년 7월 남북정상회담을 앞두고 이를 준비하던 북쪽의 김일성 주석이 돌연사한 사건이다. 국내에선 조문을 하여야 한다, 아니된다로 의견이 엇갈려 자칫 이념 대결의 양상을 띄게 될 상황에서 통일협회가 과감히 애도의 뜻을 담은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나름대로의 공식적인 검토 끝에 미래지향적인 입장을 표명한 것이다. 그런데 극우보수언론이 사설까지 동원하여 경실련을 성토하자 당시 사무총장이 독단적으로 취소 사과 성명을 발표해 버렸다. 절차의 정당성이 문제되어 지도부가 붕괴 직전이 되었다. 상당한 기간 휴지기에 들어갔고 교육사업 말고는 계획 중이던 실천적인 교류․협력활동은 착수도 못했다. 그때까지 통일협회가 축적한 남북관련 지적자산은 수권의 책으로; 동북아시대의 한민족, 통일 그 바램에서 현실로, 남북경협의 현장, 사회주의와 북한의 농업 등 주로 비봉출판사와 시민의 신문사가 출간하였다. 통일협회가 착수하지 못한 인도주의적 남북협력활동계획 등은 1999년 별도 조직으로 출범한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본부가 전문적으로 담당하였고 경실련 통일협회는 주로 연구 교육사업에만 머물고 있다.


네 번째, 환경정책 연구와 활동의 조기분리사건을 빼놓을 수 없다. 경실련이 초기 높은 시민의 참여도와 지원에 힘을 얻어 환경문제에 주목한 것은 대단히 시기적절하며 선견지명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서울대 환경대학원의 노융희 교수, 권태준 교수 등이 참여하고 우리나라 환경운동의 대부 격인 원경선 이사장이 책임을 맡은 환경개발센터가 1991년 초 경실련에 보금자리를 틀었다. 얼마 되지 않아 시민단체가 너무 백화점식으로 사회문제를 나열만 한다는 시민운동과 경실련에 대한 사회 각계의 비판이 일자 환경문제가 국가적으로 아주 중요하게 대두되는 시점에서 (사) 환경정의로 분가시켜야만 했다. 그곳에서 다시 자연․문화유산 지킴이 내셔날트러스트(National Trust) 운동이 분가하여 나갔다. 경실련이 하마터면 우리나라 환경운동의 선두주자가 될 뻔하였다. 아니 이 땅에 경제정의실천운동과 나란히 환경정의실천운동을 경실련이 시작한 것은 틀림이 없는 사실이다.


나는 경실련 통일협회 이사장직을 역임한 다음에도 계속하여 우리민족서로돕기 공동대표 활동을 했고, 내셔날트러스트 창립 공동대표와 경실련 공동대표직을 역임한 후 지금은 환경정의 이사장직을 맡고 있다. 경실련이 지난 20년간 걸어 온 길을 되돌아 볼 때 참으로 우리나라 정치 경제 사회 각 부문 곳곳에 심혈을 쏟아 뿌린 씨앗과 뿌리를 내린 민생경제살리기 운동이 가히 선구자적이었으며 눈부셨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함에도 우리나라의 현실은 외형상 성장과 발전을 거듭 했음에도 불구하고, 빈부격차가 더욱 심해졌고 더 많은 실직자가 생겨나고, 더욱 불공평하고, 농업과 농촌사정이 더욱 피폐하며, 남북관계가 더욱 나빠지고 있다. 환경생태계는 더욱 파괴되어 총체적으로 국가로서 공동체로서 지속가능성에 의문투성이가 되어 붕괴직전의 벼랑 끝에 몰리고 있음을 본다. 경실련을 비롯한 양심적인 시민단체들은 시나브로 ‘보이지 않는 손’의 공작에 의해 숨통이 조여지고 자금줄이 막히며 존립에 위협을 받고 있다. 피가 말리는 상태, 그대로이다. 상근자 인원을 줄이고 월급을 최저 임금수준으로 낮춰도 생존에의 길이 힘들다. 피 흘려 쟁취한 민주주의가 역주행하고 남북관계가 악화되고 경제는 소수 대기업 부유층 중심이고 환경생태계는 신음한다.


이 암울하고 혹독한 “겨울공화국” 같은 시점에서 우리 경제사회개량운동의 대안은 무엇인가. 다시 시작하는 것뿐이다. 프로메튜스의 피땀 어린 노력을 다시 시작하는 것이다. 민주주의, 생명․환경 주의, 여성․취약계층 북돋기, 남북간의 화해와 협력을 통한 통일기반 쌓기 등 지속가능한 사회를 향하여 공동체의식을 되살리며 상생의 이정표를 향해 뚜벅뚜벅 나아가는 것이다. 인간의 삶의 질을 높이고 국가와 사회의 지탱가능성(sustainability)을 유지 발전시키는 대의를 실천함에 있어 서둘지 않고 쉬지도 않고, 이념에 치우치지 않고 상생의 길을 씩씩하게 걸어 온 그냥 그대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것이 앞으로 경실련과 시민운동이 200년, 아니 영생하는 길이다.



<약력>
전 경실련 농업개혁위원장
   UR 범대위 상임집행위원장
   통일협회 운영위원장/이사장
   경실련 공동대표
현 중앙대 명예교수, 환경정의 이사장



*이글은 2009년 월간경실련 특집호에 실린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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