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실련 체험기] 한 달 그리고 일주일

관리자
발행일 2010.02.03. 조회수 1462
스토리

[경실련 체험기]


한 달 그리고 일주일


경실련 경제정의연구소 인턴 박 ○


(* 체험수기여서 경어를 쓰지 않았으니 양해 부탁드립니다.)


메일을 받았다.


‘경실련 인턴생활 1달 체험기를 작성해주세요.’


한 달.. 벌써 한 달? 말도 안 되는데 이건..
한 달. 사실 정확히 말하면 한 달 하고도 일주일이란 시간을, 시간의 흐름을 잊은 채 빠르게 흘려보냈다. 하루 하루 날짜가 지난다는 객관적 사실보다, 오늘의 업무를 마치고 내일의 업무를 시작한다는 주관적 사실에 기초해 새해의 한 달을 보냈던 것이다.


2009년 12월로 기억을 돌려보자. 근 1년에 가까운 타지 생활을 마치고, 엄마의 밥에 굶주려 만신창이가 되어버린 몸을 이끌고 7월 입국을 했다. 익숙한 행복을 실컷 느끼기도 전에 졸업과 취업이라는 무거운 돌이 대한민국의 죄 많은 4학년 예비 졸업생의 머리를 잔인하게 짓눌렀고, 그 압박감에 휘둘리며 다녔던 4학년 첫 학기는 지쳐버린 내 다리에 사정없이 몽둥이질을 해댔다.


조금만 쉬면 안 되는 걸까? 하지만 그런 사치는 허용이 되지 않았다. 나는 죄 많은 대학민국 예비 졸업생이니까.


과제, 수업, 프로젝트에 밤샘과 끝없이 시달리며 준비하면서도 밀려왔던 인턴에 대한 걱정. 하고 싶은 것보다는 해야만 했던 인턴. 누구나 이 시기에 그런 압박감을 느꼈겠지만 정말 무엇이든 해야만 했다. 돌아오는 겨울방학이 얼마나 무서웠는지 모른다. 그 시간에 나는 어디서 무얼 하고 있을까.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 불확실성이 매일 나를 흔들어댔고 불안하게 만들었다.


그 불안감이 고조될 무렵. 전화를 받았다.


‘경실련에서 인턴쉽 합격 연락이 왔습니다.’


무엇인가 복잡 미묘한 느낌. 겨울방학에 할 일이 생겼다는 안도감과 쉼 없이 되풀이 되는 일정에 대한 힘겨움과 동시에 느껴졌다.


‘그런데 경실련이 뭐하는 데지?’



그 후로 몇 일이 지난 후,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고, 그 분은 내가 가게 될 부서의 국장님이셨다. 일을 시작하기 전에 몇 가지 하실 말씀이 있다고 하셨다.
개괄적인 내용은 이러했다.
매년 진행하고 있는 [경제정의기업상]의 주 업무를 담당.
재무자료와 엑셀을 주로 사용하게 될 것이므로 이에 대한 숙지가 필요.
시간이 촉박하므로 12월 말부터 일을 시작.


사실 그 말을 듣고 있을 당시만 해도 향후 내가 엑셀과 숫자에 묻혀 싸움을 하게 되리라고는, 700개가 넘는 상장기업의 재무 보고서를 모두 들여 다 보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사실 지금에 와서 말이지만 나는 내 전공과목 중 회계와 재무를 가장 싫어했고, 숫자와는 천적 관계였으며, 엑셀은 쳐다보기도 싫은 덩어리라고 생각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첫 번째 과제. DATAPRO와 FN-GUIDE를 숙지하시오.
아.. 이거 학교 다닐 때 스치듯 들어본 적이 있었다. 듣는 것만으로도 오한이 느껴지던 이것들은 재무를 사랑하는 이들을 위한 대표적인 프로그램. 평생 가까이 할 일이 없다고 생각했던 이 아이들은 내가 넘어야 할 첫 번째 관문이었다. 이걸 이용해 한국의 모든 상장 기업의 재무 데이터를 정리해 오는 것. 아 세상에 이럴 수가.. 아무렇지 않은 듯 자신 있게 YES를 외쳤지만 내 머리 속은 앞으로 다가올 무시무시한 폭격을 감지했는지 본능적으로 꿈틀거렸다. 따스한 손길 없이 혼자서 이 잘난 프로그램과 싸워야 했던 그 시간은 정말 무서웠다. 무릎까지 내려와 버린 다크 써클.


두 번째 과제. 엑셀과 숫자의 바다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도대체 기업은 왜 이렇게 많지? 누가 회계랑 재무라는 걸 만든 거지? 그냥 자급자족 하면 안 되겠니?
힘겨움에 지쳐 떠오른 지극히 감정적인 느낌들. 난관에 부딪칠 때마다 폭탄처럼 터지는 이런 생각들로 인해 나는 시계를 쳐다보는 것도 잊었다. 하루 종일 말없는 컴퓨터와 친구를 해야 했던 시간들. 시시각각 나를 죄어오는 데드라인에 대한 압박에서 벗어나기 위해 좀 더 업무 속도를 높이기 위한, 생전 쳐다보지 않던 엑셀 매뉴얼 공부를 시작했다. 일종의 생존 전략인 셈이었다. 그렇게 한 달을 엑셀+숫자라는 최강 조합과 씨름을 했다.
그나마 내 컴퓨터 친구가 성품이 좋아서 한 달 가까운 시간을 고장 한 번 없이 나랑 놀아주었는데, 나에게 뭔가 감정이 상했던 일이 있었는지 완성본을 저장하기 전 그냥 shut down.
아 친절한 내 친구, 절교할 뻔했다.


세 번째 과제. 내 얘기를 들어주세요.
바로 이틀 전 끝이 보이지 않던 기업리스트가 70개로 줄어들었다. 자르고 또 자르고, 숫자를 기입하고 계산하고 정렬하고. 이제 마지막 관문. 각 기업으로 정성평가 설문 자료를 발송하기 위한 전화 작업만이 남아 있었다. 이쯤이야 뭐!
어.... 그런데 이게 뭐지. 좀 친절하게 대해 주세요. 물건 팔려고 하는 거 아닙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사람 대하는 것만큼 힘든 것이 없다고 했던가. 모르는 사람에게 그것도 대한민국에서 가장 바쁜 사람들에게 시간을 내어 내 얘기를 들어달라고 하는 것이 이리 어려운 일일 줄 몰랐다.


바로 오늘 한 달 내내 지지고 볶고, 화해하고 싸우고, 병주고 약주고 했던 내 애기들이 다음 과정을 위해 우체국으로 떠났다. 하나라도 흐트러질까 잘못될까 싶어 애지중지 했던 아이들.  그 아이들이 탄생한 과정을 봐서라도 부디 떠난 아이들이 모두 내 손으로 돌아오길 간절히 바란다.


참 많은 일들이 있었다. 한 달은 참 짧은 시간인데 벌써 경실련 사무실 한쪽의 내 책상이 너무 손에 익어버렸다. 나도 사람이기에 일이 버겁게 느껴질 때, 무언가 잘 풀리지 않을 때 지치고 힘들 때가 많았지만 그 누구도 하기 힘든 경험을 했다고 자부한다. 하기 싫어 피했던 것들도 이번 일을 계기로 (비록 원한 건 아니었지만ㅋ) 원 없이 접해보았고, 무엇보다 그 수많은 기업들에 대한 기록을 일일이 확인하고 찾아봤던 건 개인적으로 큰 공부가 되었다.


아직 끝나지 않은 업무들이 남아 있지만 제일 큰 산을 하나 넘어서인지 이제 한숨 돌릴 수 있을 거 같은 느낌.


다시 한 달이 지나고 이곳을 떠나게 되더라도 여기서 쌓았던 시간과 기억은 결코 잊지 못할 것 같다. 4학년 절박함과 책임감이 함께 했던 시간. 사회에 나가기 전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색다른 인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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