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피해자를 지킬 수 있었던 기회

관리자
발행일 2022.12.01. 조회수 12743
칼럼

[월간경실련 2022년 11,12월호 – 특집. 이번이 마지막이길...(3)]

피해자를 지킬 수 있었던 기회


고은비 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 활동가


지난 9월 14일, 신당역 여자 화장실을 순찰하던 여성 역무원 A씨가 살해당했다. 범인 전주환은 피해자 A씨의 직장 동료였다. 전주환은 피해자 A씨를 불법 촬영물로 협박해 지난 2021년 10월 불법 촬영 혐의로 고소당한 상태였다. 첫 고소 당시 경찰이 구속영장을 청구했지만, 법원에서는 이를 기각했다. ‘주거가 일정하고, 증거인멸 및 도주 우려가 없다’는 이유였다. 한 차례 고소 후에도 A씨를 향한 괴롭힘은 멈추지 않았다. 만나달라고 강요하며 300여 차례의 문자와 전화를 남겼다. 피해가 계속되자 A씨는 한 번 더 전주환을 고소했다. 스토킹 범죄 혐의였다. 두 차례의 고소로 보건대, 피해가 지속적이고 더 강력해졌을 가능성이 높다. 그럼에도 경찰은 구속영장조차 신청하지 않았다. 가해자의 접촉을 막을 수 있는 기회를 두 번이나 놓친 것이다. 또한 전주환은 고소당한 뒤 직위해제 되었지만 내부 전산망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었다. 이를 이용해 전주환은 피해자 A씨가 당직 근무를 하는 날을 골라 계획적으로 살해를 저질렀다. 그렇게 일터에서 일하던 여성은 자신을 스토킹하는 남성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한국여성의전화의 통계에 따르면 1.4일마다 1명의 여성이 친밀한 관계 내 남성 파트너에 의해 살해되거나 살해될 위험에 놓여있다고 한다. 스토킹은 개인적 차원이 아닌 우리 사회의 구조적 성차별이 촉발한 젠더폭력 범죄다. 전주환에 의한 신당역 살해 사건 직후 여성가족부 김현숙 장관은 피해자에게 “자신에 대해서 보호하는 조치를 강화했다면”이라며 피해자를 탓했다. 피해자 보호에 앞장서야 하는 여성가족부 장관이 했다고는 믿기 어려운 무책임한 발언이다. 피해자는 경찰에 가해자를 신고했고, 변호사를 선임하여 적극적으로 엄벌을 탄원하였으며, 접근금지 조치도 요청하였다. 현행법 내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대응을 해 온 것이다. 그렇다면 경찰은, 법원은, 여성가족부는 피해자 보호를 위해 최선을 다했는가.

더불어민주당 이상훈 서울시의원은 “좋다고 하는데 안 받아줘서 그랬다”며 가해자를 감싸고 피해자 탓을 했다. 하지만 스토킹은 그가 말하는 것처럼 ‘좋아해서 하는’ 가벼운 장난이 아니다. 전문가들은 스토킹이 강력 범죄로 이어질 수 있는 전조 범죄로 봐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런 인식은 비단 이상훈 서울시의원뿐 아니다. 법원은 얼마 전 한 스토킹 범죄에 대해 무죄 판결을 내렸다. 가해자가 300여 통의 전화를 했지만, 피해자가 전화를 받지 않았기 때문에 스토킹으로 볼 수 없다는 것이었다. 피해자는 가해자가 자신에게 연락을 취한다는 사실만으로도 굉장한 압박감을 느꼈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단순히 전화만 했으니 스토킹은 아니다’라는 판결은 우리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스토킹을 경미한 범죄라고 보는 시선이 그간 어떤 결과를 만들어 왔는지 성찰하지 않는다면 변화는 없다. 그래서 무엇보다 스토킹 사건을 다루는 판·검사, 수사기관 종사자 등의 인식 변화가 필요하다. 더 이상 국가의 무책임한 태도로 인해 누군가가 죽어서는 안 된다. 더 이상 한 명도 잃을 수 없다.

최근 성폭력상담소에 ‘사이버 스토킹’과 관련한 상담이 늘고 있다. 기술의 발달에 따라 스토킹의 양상도 변화하고 있다. SNS를 사칭하거나 커뮤니티에 피해자에 대한 글을 계속 남기기도 한다. 피해자에 대한 거짓 정보 혹은 모욕적인 메시지를 공개 게시판에 작성하기도 한다. 실제로 피해자의 계정으로 로그인을 시도하고, 비밀번호 찾기 문자가 지속적으로 전송되게끔 했던 사례도 있었다. 하지만 이런 행위들은 스토킹처벌법으로 처벌하기가 어렵다. 스토킹처벌법 2조를 보면 정보통신망을 통해 글이나 그림 등을 상대에게 ‘도달’하도록 하는 행위를 중심으로 스토킹을 정의한다. 하지만 이런 행위는 피해자에게 직접 글이나 그림을 ‘도달’하게 하는 행위에 포함되기 어렵다. ‘도달’의 정의가 모호하기 때문이다. 상대방에게 비밀번호 찾기 문자가 지속적으로 전송되도록 하는 행위를 ‘도달’로 볼지, 이 같은 행위가 피해자로 하여금 불안감이나 공포심을 일으키는 행위로 해석될지는 명확하지 않다. 실제로 경찰을 찾은 피해자에게 되돌아 온 대답은 “직접적인 살해 협박이 있었나요? 그렇지 않으면 고소가 안 됩니다”였다. 직접적이고 물리적인 행위가 아니라면 스토킹으로 인정받기조차 어렵다. 가해자들은 다양한 디지털 기술을 통해 피해자를 감시하고 염탐한다. 단순히 SNS 계정을 탈퇴하거나 가해자를 차단한다고 해서 끝나는 폭력이 아니다. 사이버상에서 계속 스토킹 행위가 일어나기 때문이다.

연구에 따르면 직장에서 스토킹을 경험했다고 응답한 여성은 13%이다. 또한 스토킹 범죄의 75%가 애인, 배우자 등 친밀한 관계에 의해서 발생한다. 스토킹이 상해, 폭행 등 신체적 폭력으로 이어지는 경우는 35.8%, 성폭력으로 이어진 경우는 28.4%로 나타났다. 이렇게 많은 여성이 스토킹 범죄에 노출되지만, 가해자가 강력하게 처벌받는 경우는 드물다. 보도에 따르면 78.57%의 실형 선고 중 42.85%가 집행유예에 그쳤으며 17.85%는 벌금형이 선고됐다.

이런 가벼운 판결을 먹고 스토킹 범죄는 자라났다. 그동안 여성들의 수많은 구조 요청에도 ‘주거가 안정되었다, 앞날이 창창한 청년이다, 가장이다’라며 무시해온 판결과 우리 사회의 무관심이 만들어낸 결과다. 이번에는 가해자에 대한 온당한 처벌이 이루어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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