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황금기를 함께 한 경실련

관리자
발행일 2009.11.07. 조회수 669
칼럼

 


인생의 황금기를 함께한 경실련


 



김태룡 (전 부정부패추방운동본부 본부장)


 


1994년 어느 날 연구실로 온 한 통의 이메일로 경실련과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처음이자 마지막이 된 경실련 공채(?) 1기로, 당시 종로 5가에 있던 경실련에 첫 발을 들여 놓은 지도 15년이 흘렀다. 



정치개혁위원회에서 위원을 시작으로 정부개혁위원장, 부정부패추방운동본부장, 조직위원장, 서울시위원장 등을 거쳐 오는 동안, 아마도 경실련의 내우외환은 모두 경험했던 듯하다. 뇌리를 스치는 사건 만도 김현철 테이프사건, 유종성 총장 대필사건, 정보공개와 관련한 소송사건, 간부들의 한나라당 입당에 따른 대국민사과문 발표 등 고비마다 사건도 많다 보니 경실련의 산 증인이나 된 듯한 기분이다.



1994년 첫발을 들여놓은 곳이 정치개혁위원회였다. 따뜻한 안내 속에 시작된 경실련 생활이 그리 만족스런 것은 아니었다. 지금은 많이 변했지만 그 때만 해도 경제학 교수들이 주축이 된 분위기 속에서, 행정학을 전공한 교수가 경실련에는 김석준 교수밖에 없었기에 바라보는 시선들이 그리 곱지 만은 않았다.



허나 어쩌랴! 한 서 너 해를 그리 보내다가 정부개혁위원회를 설치해 본격적으로 행정학 교수들을 영입해 그 기초를 놓기 시작하던 때였다. 그러던 중 생각지도 못한 제안을 받게 되었다. 당시 부정부패추방운동본부(부추본) 본부장이었던 이석형 변호사가 부추본의 본부장을 맡아 달라는 것이었다. 며칠 간 고민 끝에 수락을 하였으나 문제는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사업도 물론이지만 독립된 살림도 살아야 하고, 더 큰 문제는 당시의 환경 변화가 가장 큰 문제였다. 그간 부추본은 주로 고발 중심의 사안들을 중심으로 운영되어 왔는데, 민주화가 진행됨에 따라 고발 창구가 다원화되자 부추본의 활동영역이 축소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하여 부추본의 운영방식이나 내용을 전면적으로 수정해야 하는 입장이었다. 그래서 정책위원회와 운영위원회를 강화하고, 고발 내용보다는 정책지향적인 사업으로 방향을 전환하고자 하였다. 이에 따라 주요 사업으로 자치단체의 반부패지수를 개발해 이를 발표하는 사업을 진행하게 되었다.



지금은 반부패지수가 일반화되어 거부감이 별로 없지만, 당시만 해도 이 같은 내용은 이해당사자들에게는 상당히 민감한 주제였다. 정책위원회와 상근자들이 밤을 세는 노력 끝에 광역자치단체와 서울시 기초자치단체의 반부패지수를 발표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화근이었다.



발표결과에 대해 광역자치단체들은 비교적 온건적인 항의만을 한 채 발표내용을 받아들였지만, 서울시 기초자치단체들의 경우 부패가 가장 높다고 발표된 세 기초자치단체들은 본인을 상대로 6억 원을 배상해 달라는 명예소송을 제기하였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법원의 조정으로 경실련 부추본의 발표가 문제가 없다는 것을 이들이 받아들여 소를 취하해 끝났지만, 소송과정에서 느낀 소회는 남달리 컸다.
우선은 개인적으로 6억 원의 소송이 제기되자 시민운동 한다더니 집안까지 말아먹으려고 한다는 집사람의 애정 어린 조소가 그것이오, 또 다른 것은 역시 송사에 휘말리니 하던 일들이 진척이 안 된다는 것이었다. 다만 이 과정에서 법제처장이 된 이석연 사무총장의 적극적인 후원과 지원에 감사한 생각이 든다. 이 총장은 소송 당시 변호인단을 구성하는데 큰 힘이 되어 주었고, 시종일관 부추본을 격려해 주는 등 소송과정에 깊은 관심을 표해주었다.



이런 우여곡절을 겪고 나서 좀 쉬려고 하는데 다시 조직위원장을 맡게 되었다. 그런데 팔자가 사나워서 그런지 남들은 쉬면서 넘어가는 조직위원장을 그렇게 넘기지 못했으니, 한물가기는 했지만 조폭 두목까지 만나는 행운(?)을 얻은 것도 다 이 시기다.



해방 이후 한국사회가 안고 있는 대표적 문제가 압축 성장으로 대표되듯이 경실련도 예외는 아니었다. 경실련도 1989년 창립 이래 급격한 양적 성장을 꾀하다 보니, 전국적으로 지회가 50 곳에 육박하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모범적으로 운영되는 곳도 많았지만 그렇지 못한 곳도 꾀나 있었다. 게다가 조직위원장을 맡고 나니 문제를 야기하는 지회가  여기 저기서 일기 시작했다. 남들은 조직위원장을 하면서 지회를 만드는데 심혈을 기울였다는데, 나는 문제 지회나 활동성이 없는 지회들을 정리하러 다니는데 시간을 소모해야 만 했다. 그 결과  한 십여 군데 정도는 임기 동안에 정리한 듯하다.



이러한 시간을 보내면서 항상 경실련을 깊이 들여다보고 의사결정에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은, 오랜 시간을 상집위원으로 보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비록 한 달에 한번 씩 때로는 비상 모임을 통해 많은 분들과 머리를 맞대면서 보냈던 상집위원회는, 경실련을 이해하는데 그리고 일을 하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조직이었다.



비록 경실련의 초창기 멤버로서 20주년을 같이 하지는 못했지만, 지난 15년의 기간은 어찌 보면 그 이전보다 더 중요한 시기가 아니었나 싶다. 경실련 초기 5년이 고난에도 불구하고 그 영향력을 팽창하던 시기였다면, 이후 15년은 오히려 감소되어 가는 영향력과 수많은  내우외환을 겪은 시기였다는 생각이다. 화려함보다는 고통과 수모가 많았던 시기가 이때였다는 것이다.



지난 경실련의 15년 생활을 돌이켜 보면 참으로 많은 감회가 든다. 인생의 황금기를 보냈다는 기쁨과 함께 회한도 있고, 그 기간을 통해 참으로 많은 분들과의 교우와 함께 개인으로서는 할 수 없는 큰 경험들, 그리고 경실련을 통해 사회를 밝히는데 조그만 초석 하나를 그래도 놓았다는 자부심이 그것이다. 다만 지난 15년간 경실련에 몸담았던 경험을 통해 볼 때, 청년을 맞이하는 경실련의 앞날이 그리 밝지 만은 않은 것 같다.



그간의 경험을 통해 향후 40주년이 되는, 즉 의미 있는 장년을 맞이하기 위해 경실련이 준비해야 하는 것이 무엇일까? 평소에 생각한 몇 가지를 정리해 보면 이러하다.
가장 중요한 것이 사람 관리인데 경실련이 향후 이 부분을 소홀히 하면 힘든 청년기를 보내지 않을까 걱정이다. 다시 말해 현재와 같은 정체성을 하루 속히 벗어나야만 한다. 항상 새로운 사람으로 넘쳐나야 한다는 말이다. 볼륜티어인 교수들도 그렇고 상근직의 경우도 그렇다. 이 부분의 활성화가 경실련의 미래를 결정하는데 가장 중요하지 않을까 한다.  



이와 함께 고민해 보아야 할 것이 교육에 대한 투자이다. 예나 지금이나 경실련에 발을 디디는 순간부터 경실련에 대한 비전이나 활동 등을 내면화시켜 경실련 사람을 육성해야 하는데, 그저 사업에만 진력하다 보니 그간 많은 문제들의 원인이 되어왔다는 생각이다. 하여 누구든지 경실련을 들어오게 되면, 일정한 교육을 통해 경실련 사람으로서의 정체성과 도덕성을 강화시킬 필요가 있다.



다음으로 생각해 본 것이 비정치성을 강화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시민단체가 정치성을 띠는 한 그것은 사망선고나 다름없다. 아마도 우리사회가 시민단체에 대한 관념을 바꾸기 전에는, 비정치적 • 중립적 노선을 유지해야 한다. 정권도 아닌 이데올로기도 아닌, 경실련이 추구하는 목표인 중도성을 강화하는 것만이 다시금 유일한 대안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이글은 2009년 월간경실련 특집호에 실린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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