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실련 통일협회 설립, 활동과 그 의미

관리자
발행일 2009.11.17. 조회수 524
칼럼

 


경실련 통일협회 설립, 활동과 그 의미



심 의 섭 (통일협회이사)


경실련 <통일협회>는 시민이 주체가 되어 실사구시(實事求是)적 통일운동을 전개해 민족통일에 대한 민족적 합의를 도출하는 것을 기본방침으로 해 1994년 1월 18일 발족했다. <통일협회>는 설립 취지문에서 창설 이래 4년간의 경제정의 실천의 성과물이 통일의 밑거름이 될 것을 천명하였는바 이는 남한사회만의 개혁, 분단 상태하의 경제정의는 통일을 우리 당대의 과업으로 설정하는 한 영원한 미완성일 수밖에 없다고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창립모임 당시 종로 3가와 종묘 앞은 쉼터로 개발하기 위해 땅을 이리저리 뒤집어 놓은 상황이었는데, 그 근방에서 기념 회식이 있었다. C 교수, O 교수들과 함께 참석하였고, 보수논객 J씨도 옆에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 후 나는 정책위원(1994-1996)으로 활동하였으며 <남북경협의 현장>이란 저서를 감수하기도 하였다.


내가 통일협회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된 동기는 김성훈 전 농림부장관과의 인연이다. 마침 대한민국 정부수립이래 최장수(最長壽) 장관이라는 기록을 세우고 사임하면서, 유관단체와 여기 저기 편한 자리를 모두 마다하고 친정(?)인 경실련으로 돌아오면서 퇴직금의 대부분을 경실련을 비롯한 시민단체에 기여하겠다고 한데서 요새 말로 ‘감동을 먹었기’ 때문이다. 한완상 이사장-이장희 운영위원장 팀의 후임으로 김 장관께서 통일협회 이사장을 맡으면서 나에게 운영위원장을 맡아 함께 일하자는 제의였다. 나의 고사(固辭)도 아랑곳없이 함께 통일협회를 이끌면서 통일협회 제4대 운영위원장, 경실련 상임집행위원(2001.3-2003.2)으로 일하게 되었다.


주요 활동으로는 2001 금강산 “민족통일 대토론회”에 참관인으로 참석(200l 6.14-6.16), 2001 민족통일대축전 평양공동행사 참석 (경실련, 공동의장, 2001.8.15-8.21), 경실련 통일협회 민족화해 아카데미 제12기 통일체험현장학습 인솔 (금강산관광선상세미나, 2001. 12. 2-12.4) 등을 들 수 있다. 이어서 통일교육협의회의 이사 (2003-2004), 경실련 통일협회 이사 (2003 이후), 경실련 중앙위원 (2001 이후)으로 활동하고 있다. 함께 일한 분들은 김성훈 이사장님과 송월주 이사장님을 뫼시었으며, 서동만 교수, 최완규 교수, 김갑배 변호사를 비롯한 훌륭하신 선후배 동료를 비롯한 열렬한 통일 일꾼들이 모두 힘을 모았으며, 차승렬씨, 박준우씨, 정원철씨, 김삼수씨 들이 간사로서 수고하였다. 후임은 윤경로 이사장-최완규 운영위원장 팀이 맡아 주었다.


1996년에는 올바른 통일관의 정립과 한반도의 평화공동체건설을 위해 민족화해와 평화나눔운동에 앞장 설 일꾼을 양성할 목적으로 <민족화해아카데미>를 개설하여 시민을 대상으로 하는 통일교육을 해 왔는데 임기 중 <민족화해아카데미> 11기, 12기, 13기를 운영하였다. 민족화해 아카데미 수료생들로 조직된 <민화회>의 활동에 대해서도 ‘수강 자료집’을 만들어주고 수첩을 매 기수별로 만드는 등 조직 활동을 강화하였다. 통일협회 홈페이지를 활성화시키었고, 자료사업으로는 그 동안 부정기적으로 발간되어 오던 ‘통일세상’을 정기적으로 발행하고 합본(合本, 창간호~35호)을 만들었다. 아울러 통일교육협의회 시민분과사업을 간사단체를 맡아 수행하였으며, <민족화해아카데미> 교육사업도 통일교육협의회의 지원으로 이루어졌다.


당시는 통일논의가 활발한 때여서 성명서도 자주 냈고, 연대사업도 활발히 하고, 금강산 관광, 대북식량지원 논란, 방북민간단체 사법처리문제, 북방한계선 문제, 미선이 효선이 장갑차 사건, 금강산을 사랑하는 범국민운동을 비롯해 통일운동의 현장 참여도 활발히 하였다.


기금확보 수단인 용역사업으로는 농림부로부터 “사회주의 농업개혁의 북한 적용가능성 분석” 이란 프로젝트를 수임하여 워크숍과 심포지엄을 실시하였으며, 이를 묶어서 “사회주의와 북한의 농업”으로 출판하였다. (김성훈과 공편저, 비봉출판사, 2002. 8).


운영위원장 재임 시의 회고담을 몇 가지 남긴다면 다음과 같다.
우선 <경실련의 동숭동 이사사업>이다. 경실련이 사옥(?)도 없이 항상 불안해하던 때이었는데, 마침 내가 학교에서 경매교육을 수년간 해 오던 터라 그 경험을 통해 경매를 통한 사옥확보사업을 제안하여 서경석 상집위원장과 신철영 사무총장이 주도적인 역할을 하여 결실을 맺었다. 또한 홈페이지의 활성화와 온라인 활동을 강화하기로 한 것도 보람된 일이었다. 그리고 정동시대와 신문로 시대에는 일류인 C호텔에서?조찬이 잦았는데 근검절약을 위해 좀 허름한 곳으로 옮기었던 것도 기록에 남기고 싶다. ‘미선이 효선이 장갑차 사건’으로 촛불시위(문화제)가 이어지는 상황에서 미 대사관 관계자와의 면담도 잊을 수 없는 것이다.  <민족화해아카데미>의 현장학습으로서 실시된 DMZ 답사기행과 김제의 금산사(金山寺)에서의 워크숍도 추억거리로 떠오른다.


가장 어려웠던 것은 예산과 기금부족 문제이었다. ‘후원의 밤’을 통해 기천만원 씩 모으기도 했지만 왕성한 사업에 비하면 늘 부족한 상황이었다. 용역사업에 대한 추억은 씁쓸하기도 하다. 예산이 부족한 상황이어서 항상 경실련 본부로부터 재정지원금을 받아서 충당했지만 용역비는 일단 본부로 들어가서 다시 나와야 하기 때문에 본부와의 갈등도 있었다.


본부와의 협조는 대체로 순조로웠지만 가끔씩 마찰도 있었다. 예를 들어, 성명서를 채택할 때 본부와의 미묘한 입장 차이 때문에 운영위원장으로서의 한계를 절실히 느끼기도 하였다. 그래도 김성훈 이사장님과 송월주 이사장님의 말씀의 영향력에 기댈 수밖에 없었던 입장이 아쉬웠다.


그 동안 경실련과 통일협회의 활동은 역사적 발전 단계에 분명히 일조를 하였다고 역사는 평가할 것이며, 나 역시 시대적 활동을 함께 한 것이 자랑스럽다. 돌이켜 보면, 이 나라에 민주화를 꽃 피우고 통일의 불을 지피던 지난 세월에 해방을 전후해 태워난 ‘새 나라의 어린이’로서, 겨레가 그리도 염원하여 이름 지어진 아들 딸 들인 광복(光復)이랑 독립(獨立)이랑 함께 일했던 것은 진정 이 사회의 경제정의 실천을 통한 조국과 겨레의 통일과업의 달성을 위한 역사의 마디일 진저 . . . 



<약력>
전 통일협회 정책위원
   통일협회 제4기 운영위원장
   경실련 상임집행위원
현 통일협회 이사
   경실련 중앙위원
   명지대 교수


 


*이글은 2009년 월간경실련 특집호에 실린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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