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칼럼] 왜 우리는 '배달'의 민족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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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2023.09.25. 조회수 51574
칼럼 스토리

[월간경실련 2023년 9,10월호] [전문가칼럼]

왜 우리는 '배달'의 민족인가?


박만규 아주대 불어불문학과 교수/한국불어불문학회 회장


우리 민족은 오래전부터 ‘배달’의 민족이라 일컬어지고 있다. ‘배달’이란 무슨 뜻일까? 고대 국어시대에는 우리말 자료가 너무 부족하여 엄밀하게 학술적으로 공인된 어원을 말하는 것이 어렵지만, 여러 학자들이 ‘배달’을 ‘박달’에서 유래한 어휘로 추정한다. ‘박달’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선 ‘달’부터 알아보자.


‘달’은 ‘땅’(地) 혹은 ‘산’(山)을 의미하는 말이다. 예를 들어 볕이 잘 드는 곳을 일컫는 말인 ‘양달’에서, ‘양’은 ‘볕’(陽)이고 ‘달’은 땅을 말한다. 반대로 볕이 안 드는 곳을 말하는 ‘응달’의 경우 ‘응’은 ‘그늘 음’(陰)의 발음이 변한 것이다. 기울어진 곳을 가리키는 ‘비탈’이라는 말도 비스듬하다는 뜻의 ‘빗’에 땅을 뜻하는 ‘달’이 결합한 다음, 발음이 ‘탈’로 변한 말이다.


아사달(阿斯達)은 단군이 고조선을 개국할 때의 도읍이다. 이의 어원은 ‘처음’을 뜻하는 ‘아시’와 땅의 ‘달’이 결합한 단어로 분석된다. 요컨대 나라를 세울 때의 첫 번째 땅이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박’은 무엇일까? ‘박’의 어원에 대해서는 두 가지 학설이 공존하는데, 우선 하나는 ‘머리’를 뜻하는 말로 보는 것이다. ‘박치기’, ‘이마빡’(이마빼기) 등의 어휘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달’을 ‘땅’으로 해석할 경우 ‘박달’은 ‘머리 땅’이 되어 ‘첫 땅’(첫 도읍지)인 ‘아사달’과 짝을 이루고, ‘달’을 ‘산’으로 해석할 경우 ‘박달’은 ‘머리 산’, 즉 두산(頭山)이 되어 ‘첫 산’, 즉 일산’(一山)인 ‘아사달’과 역시 짝을 이루게 된다.


한편 다른 학설은 ‘박’을 밝다는 뜻의 ‘밝’에서 기원하는 말로 본다. ‘밝다’는 ‘불’(火)에서 출발한 ‘붉다’와 같은 어원을 가지는 단어이다. 붉으면 밝으니까 그리된 것이다. 또한 ‘박쥐’도 에서 유래한 것으로, 어두운 동굴에서 잘도 날아다니는 ‘눈이 밝은 쥐’라는 뜻이다. 이처럼 ‘밝다’ 설을 따른다면, ‘박달’은 ‘밝은 땅’, 혹은 ‘밝은 산’(明山)의 의미가 된다.


그런데 ‘박달’은 우리나라의 지명으로 여러 고장에서 발견할 수 있는 이름이다. 우선 충북 제천시와 청주시 사이에 있는 고개인 ‘박달재’가 떠오른다. 옛 가요 ‘울고 넘는 박달재’로 잘 알려진 이 박달재의 ‘박달’은 ‘朴達’이라는 한자로 표기하고 있지만 이는 한양에 과거 보러 이곳을 지나간 박달이라는 선비와 이 마을에 살던 금봉이라는 처녀와 얽힌 전설에서 유래한 민간어원에 불과하다.


또 우리가 잘 아는 태백-산(太白山)의 ‘태백’도 , 즉 ‘커다란 밝음’이라는 뜻의 우리말을 한자로 표기한 것으로 분석된다. 백제(百濟)도 본래 으로 이루어진 단어로서 ‘밝은 성’으로 해석될 수 있다.


이상에서 보듯이 이 ‘밝음’을 뜻하는 예는 비교적 풍부하게 관찰된다.


‘배달’이 ‘박달’에서 기원한 말이라면, 이는 결국 ‘밝은 땅’이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왜 우리나라를 ‘밝은 땅’이라고 불렀을까? 그것은 아마도 중국에서 볼 때 동방의 해 뜨는 나라이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조선’(朝鮮)도 ‘조용한 아침’을 한자로 옮긴 것이라는 점을 생각해 보면 매우 타당한 해석이라 하겠다. 조선이나 배달이나 결국 해가 뜨는 밝은 땅, 조용한 아침의 나라라는 뜻을 갖고 있는 말들이다.


박달은 식물의 영역에도 넘어가 ‘박달나무’를 만들었다. 중국, 시베리아 등지에서부터 우리나라에 이르기까지 분포하는 박달나무는 재질이 단단하여 건축과 가구 재료로 많이 썼던, 과거 우리나라 농경사회에서는 없어서는 안 될 필수품이었다. 그래서 박달나무는 우리 민족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나무라 할 수 있는데, 이는 우리 민족의 시조인 단군(檀君)에게서도 확인할 수 있다. 단군의 ‘단’(檀)이 박달나무인 것이다. 단군의 아버지 환웅이 3,000명의 무리를 거느리고 태백산(위에서 ‘크게 밝은 산’이라고 한) 꼭대기의 신단수 밑에 내려와 그곳을 신시(神市)라 하였다는 기록이 삼국유사에 나오는데 이 신단수(神壇樹)가 태백산의 단풍나무이다. 곰이었던 웅녀(熊女)가 박달나무 아래(檀樹下)에서 잉태하기를 빌어 아들을 낳았기 때문에 단군(檀君)이라 이름하였다는 것이다.


‘밝’은 하늘에도 흔적을 남기고 있다. 달이 가장 밝을 때인 ‘보름’도 ‘밝음’에서 온 말이다. 또 정월 대보름에 먹는 견과류를 가리키는 ‘부럼’도 ‘보름’이 변이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밤하늘에 밝게 빛나는 ‘별’도 이 ‘밝음’의 에서 온 말이라는 분석도 있으니 우리 민족이 얼마나 많은 영역에서 ‘밝음’의 개념을 폭넓게 사용했는지를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우리는 ‘밝음’을 추구하는 것일까? 물론 앞서 말했듯이 중국 대륙의 입장에서 보면 해가 뜨는 동방에 사는 민족이기에 그렇다고 볼 수도 있지만 그것은 그들의 시각이다. 내 생각에는 우리 민족이 수많은 시련에 직면하여 어둠 속에서 항상 불을 밝혀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추구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무지의 상태를 깨우치는 일을 우리는 ‘배우다’라고 하는데, ‘밝히다’에서 온 말로 분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무지를 밝히는 배움이 어둠을 밝히는 일과 동일한 것이 아닌가?


배달의 민족은 ‘밝음’의 민족이다. 나아가 배달의 민족은 ‘배움’의 민족이다. 교육에 투자하여 나라를 일으킨 것은 우리 민족의 핏줄 속에 흐르는 바로 이 DNA 때문이 아닐까?


그런데 요즘은 경제도 그렇고 정치도 그렇고, 온통 어두운 분위기이다.


어둠을 밝혀 배달의 민족답게 ‘밝은 나라’를 이룩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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