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명분과 신의를 주었던 경실련

관리자
발행일 2009.11.17. 조회수 496
칼럼

            


인생의 명분과 신의를 주었던 경실련



이 은 기(전 시민입법위원회부위원장 )



  경실련과의 첫 인연 맺기는 말 그대로 우연이었다. 사회적 이슈에 대해 제대로 된 의견이나 방향을 제시하는 단체가 없던 80년대 말 그런 단체가 비로소 나타난 것이다. 노태우 정권 막바지 날만 새면 전청부지로 오르던 전세보증금 파동으로 많은 세입자들이 목숨을 끊던 그 시대적 상황에서 경실련의 태동은 어쩌면 필연이었다.


  그즈음 부천지역에서 단칸방 세를 살던 세입자 엄마가 방세를 올려달라는 집주인의 말을 듣고 뒷산에 가 천막칠 자리라도 물색해 보려고 외출하면서 세 쌍둥이가 놀고 있는 방문을 잠그고 간 사이 아이들이 장난을 하다가 불이나 모두 타 죽은 사건이 한겨레신문에 보도되었다. 세 쌍둥이 아이들의 귀여운 사진도 실려 있었다. 문래동에서 개업하고 있던 때라 거리상 멀지않은 한겨레 양평동 사옥으로 찾아가 그 가족에게 조그만 성의를 전달해 달라고 무명으로 맡긴 일이 있었다.


 그로부터 얼마 후 경실련의 후원회원으로 가입했다. 바쁜 직업을 핑계로 후원금만 내는 회원으로 우선 가입한 것이다. 중앙위원으로 있던 어느 날 김일수 교수님께서 상집위원으로 같이 일해보자고 전화를 주셨다. 만장일치제로 운영되어 밤늦게 끝나기 일쑤였던 상집회의에 나가면서 경실련의 업무와 좀 더 가까워졌다. 하마터면 둘로 쪼개질 뻔했던 경실련이 끝까지 같이 가야 한다는 의견으로 창립 후 최대위기였던 양분을 막는데 일조하기도 했다. 그 때 과감한  시민운동을 지향했던 인사들은 다른 시민단체로 옮겨간 것으로 안다.


  그러나 나는 점진적 개혁을 지향하는 영국의 페비아니즘(Fabianism)이 우리 사회에서 적절하다는 생각에서 경실련의 방향성은 시종여일해야 된다고 보았다. 당시 ‘헌변’에서 낸 경실련 등 14개 시민단체를 상대로 국민세금환수라는 명분으로 낸 소송에서 ‘경실련’과 ‘도시개혁센터’를 변론하였다. 당시 공동대표였던 고 유현석 변호사님과 상의해서 답변서를 작성하던 기억이 아직 새롭다. 그 사건은 2년여 재판 끝에 승소하였다.


 변호사 일을 하면서 시민입법위원회에 종종 참석하였다. 참여연대 등 대부분의 시민단체가 연대하여 국회의원 낙선운동을 벌이려 할 당시 경실련의 노선을 정하는 회의가 있었다. 아마도 이석연 사무총장시절이었던 것 같다. 그 때도 나는 유권자들에게 입후보자들에 대한 정보만 알려주고 정치적 의사결정은 유권자들에게 맡겨야 한다는 생각에서 경실련이 낙선운동시민연대에 참여해서는 안 된다는 데 이 사무총장과 의견을 같이 했다. 후일 다른 시민단체 대표들이 재판을 받고 유죄판결을 받은 결과는 경실련의 입장이 옳았다는 것을 반증했다. 물론 소극적 시민운동이라는 반론도 만만치 않았으리라. 그러나 그 사건이 있은 뒤 접촉한 많은 인사들로부터 경실련이 가장 합리적인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보고 있음을 이내 확인할 수 있었다.


  물론 김영삼 정권과 김대중 정권에서 경실련과 조금이라도 인연을 가졌던 분들이 적잖게 정치권으로 유입되면서 사회로부터 호된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나는 단순히 그런 분들을 두둔하기 위해서는 아니었지만 만약 시민운동이 정치권과 절연한다면 시민단체는 세상과 담을 쌓은 절름발이밖에 될 수 없다는 논리로 변호하였다. 물론 시민단체 인사가 정치권으로 계속 유입되어야만 한다고 보는 입장은 아니었다.


  그동안 경실련과 나와의 인연을 어느 지인은 못마땅하게 바라보기도 하였다. 무엇을 얻었냐는 시각에서다. 세상일이 꼭 무엇을 얻어야만 자족할 수 있는가? 세상을 살면서 명분과 신의를 위해서 이득과는 상관없이 하는 경우도 많지 않은가. 자신의 생각과 100퍼센트가 아니어도 어느 정도 부합하는 일에 우리는 몸담을 경우가 적지 않다고 본다.


  직업을 바꾸면서 바쁜 나머지 최근 몇 년간은 경실련과의 직접적 접촉은 적어졌다. 그렇다고 무관심해진 것은 아니다. 항상 경실련이 제대로 가고 있는지 지켜보고 있다.
 한 때 시민단체 인사들이 정치권으로 진출하고 사무총장이 물의를 일으켜 물러나고 했던 시절이 있었다. 그 무렵 사회일각에서 시민단체에 대한 반감이 고조되면서 경실련에서 일하는 시민운동가들이 호의호식하는 것으로 매도될 때 나는 만나는 인사마다 붙들고 실상을 얘기해주며 변호했던 시절도 있었다. 그러한 경험은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준다. 내가 회계사 한분과 감사였던 시절 몇 번이나 회계감사내용을 1년에 한 번씩 일간지에 공고할 것을 권했다. 그러나 아직까지 이행되지 않고 있어 실망스럽다.


 시민단체가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음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세상은 간혹 의혹의 눈길을 보내고 있다. 경실련이 대기업으로부터 후원금을 받지 않고 있는 사실도 세상은 잘 모른다. 중앙부처나 지방자치단체로부터 받는 보조금(프로젝트 수임료)을 국민의 혈세를 낭비했다는 이유로 반환청구 소송을 걸어 왔던 사실도 있지 않은가? 경실련은 간간이 후원행사를 벌여 부족한 재정을 메워 오고 있으며 회원배가 운동도 여의치 않은 것으로 안다. 때문에 적어도 회계면에서는 과거보다 더욱 투명해져야 한다.


 어쩌면 우리 사회가 경실련 창립 당시와는 상황이 달라져 시민단체의 설 자리가 좁아졌을 수도 있다. 시민운동의 영역과 방향이 수정되어야 할 所以이다. 과거의 정치‧경제적 정의영역에서 환경, 소비, 인구, 노인문제, 농업, 전통산업, 미래문제 등으로 말이다.


  경실련과의 소중한 인연은 계속될 것이다. 비록 적극적인 참여는 못하지만 몸담고 있는 분들의 점진적 사회개혁을 위한 노고에 항상 감사드리는 마음이다. 봄날의 라일락처럼 그 향기가 은은하게 멀리 퍼지는 경실련이 되기를 바란다.
경실련이여, 영원할지어다!



약 력
전 경실련 중앙위원
   상임집행위원
   시민입법위원회부위원장
   감사
현 서강대학교 법학과 부교수
   법무부 사법시험출제위원



*이글은 2009년 월간경실련 특집호에 실린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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