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의 거침없는 독주, 한-EU FTA 협상

관리자
발행일 2007.05.11. 조회수 606
칼럼

한미 FTA 협상이 타결된지 한달여가 지난 5월6일 한국과 유럽연합(EU)이 ‘한-EU FTA’ 협상 시작을 선언하였습니다. 세계 최강대국인 미국과의 FTA 협상이 마무리되어서 그런 것일까요? 언론 보도를 봐도 ‘상대적으로 편한 협상’이 될 것이라는 느낌이 듭니다.


하지만 협상 상대국인 EU는 만만한 상대가 아닙니다. 국내총생산(GDP) 규모에서 세계 최대인 EU는 미국에 이어 우리나라의 두 번째 교역상대국이기도 한 거대 시장입니다. 우리가 편한 상대로 생각하건 말건, 지난 6일 협상출범을 공식 선언하는 기자회견에서 피터 만델슨 EU 통상담담 집행위원은 단순히 관세 인하가 아닌, 비관세 장벽 완화 및 투명성 제고를 위한 제도개선까지 요구할 것임을 밝힌바 있습니다.


한미 FTA 협상 결과에 대한 검증과 평가도 아직 제대로 나오지 않았는데 거침없이 EU와의 협상에 돌입한 정부의 모습은 사뭇 자신만만해보입니다. 경실련이 한-EU FTA 협상이 졸속 협상이 될 것이라고 우려하는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이 점입니다. 거침없는 정부의 독주에 대해 현재로서는 아무도 제동을 걸 수 없다는 것이 걱정되는 것이죠. 그리고 그 핵심에는 문제투성이의 통상시스템이 있습니다.
    
국민의견을 반영할 길이 없는 통상시스템, ‘견제받지 않는 통상 권력’


시작부터가 대통령의 결단에서 비롯된 한미 FTA 협상은 단추부터가 잘못 꿰어져 있었습니다. 오랜 기간동안 FTA와 관련된 연구기관에서 축적된 자료를 참고하여 시작된 것도 아니고, 국민적 합의를 거쳐 시작되지도 않았습니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협상 개시 선언후부터입니다. 협상 전 이른바 4대 선결조건에 대해서도 합의했놓고도 안했다고 일관하고, 공청회는 무시되고, 국책연구원이 발표한 FTA 타결로 인한 경제적 효과는 나오자 마자 수치조작논란에 휩싸였습니다. FTA가 타결이 되면 어느 어느 산업에 얼마만큼의 영향을 미칠지 결과를 공개하라고 요구해도 공개할 수 없다고 버텼습니다. 대신 공개된 것은 광개토대왕까지 동원된 막대한 물량의 일방적인 홍보뿐이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정작 한미 FTA로 커다란 영향을 받게 될 국민들의 목소리는 전할 길이 없었습니다. 피해를 입게 될 농민, 중소기업 등 이해당사자들의 의견을 개진할 변변찮은 자리조차 마련되지 못했습니다.


이들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정부의 일방적인 협상 추진에 제동을 걸어야 할 국회가 보여준 모습은 불행하게도 무능력 그 자체였습니다. 정부가 협상 개시를 선언한지 5개월이나 지난 지난해 7월 부랴부랴 특별위원회를 만들었지만 현재에 이르기까지 ‘문건 유출 사건’ 말고는 무슨 활동이 있었는지 잘 모를 지경입니다. 모든 협상이 끝난 지금, 협상 결과에 대한 비준안에 대해 가부만 표시해야 하는 처지에 놓여있는 상황입니다.


결국 입법부도 통제가 불가능하고, 이해집단을 비롯한 각계 각층의 의견을 반영할 수 없는 장치가 전혀 없는 ‘통상 독재’가 우리나라 통상시스템의 현주소라고밖에 할 수 없겠습니다. 국민의 사회경제적 요구들을 수렴하는 통로를 보장하고, 삼권분립을 통한 상호 감시와 견제가 민주주의의 핵심이라 한다면 한미 FTA 협상과정은 우리에게 ‘우리나라가 민주주의 국가가 맞는지’라는 의문을 던져줄 수 밖에 없습니다.


의회의 통제와 각계 민간 의견 수렴을 보장하는 미국과 EU의 통상시스템       


 그렇다면 FTA 협상 상대국인 미국과 EU의 통상시스템은 어떠할까요? 결론부터 말하면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양자 모두 ‘행정부의 통상 협상에 대한 의회의 통제’와 ‘민간부문의 의견을 수렴하는 통로 보장’을 골자로 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통상시스템은 “의회는 관세를 부과하고 징수하는 권한 및 외국과의 무역을 규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다”고 한 헌법 규정에 의거하여 의회가 통상정책의 권한을 가지고 있습니다. 미국 무역대표부(USTR)가 나서서 협상을 총괄하는 것 같지만 이는 원할한 협상 진행을 위해 무역촉진권한(TPA)을 통해 의회가 행정부에게 권한의 일부를 위임한 것에 불과합니다. 의회는 여전히 무역법에 기초하여 의회가 협상 진행과정에 참여하고, 행정부는 의회에 협상 내용과 과정을 보고하고 협의할 것을 의무화됩니다.


 또한 미국의 통상 당국은 민간자문기구를 통해 협상에 대한 조력을 받음으로써 민간부문의  의견을 반영하는 통로를 보장하고 있습니다. 현재 한미 FTA 타결 후 협정문에 대한 분야별 검증과 평가 작업을 벌이고 있는 30여개의 민간위원회와 700여명의 자문위원들의 활동이 이러한 사례가 되겠습니다.


 이번에 협상을 시작하게 된 EU의 경우도 회원국으로 구성된 통합체라는 특성상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미국과 마찬가지입니다. 민주노동당 권영길의원의 정책제안서에서 소개된 내용에 따르면 통상관련 정책결정권은 회원국의 대표로 구성되는 각료이사회가 가지고 있습니다. 각료이사회는 집행위원회(the European Commission, 집행기구)의 통상정책과 협상에 관한 건의를 심의하여 결정하고, 협상에 대한 지침을 하달하며, 정기적으로 협상의 진행상황을 점검하고 협정 타결시 승인의 권한을 가지고 있습니다.


 집행위원회는 유럽의회에 대해 통상협정에 관한 책임을 지며, 정기적으로 협상의 진행과 정책에 관해 유럽의회에 보고하고 의회의 의견을 참조합니다. 또한 유럽의회는 경우에 따라 협상단의 일원으로 참가하기도 합니다.


 한편 업계, 노조, 시민사회단체들은 다양한 채널을 통해 통상정책에 관한 의견을 전달합니다. 이들 단체는 정기적 및 비정기적으로 집행이사회와 대화채널을 가지고 있고, 각 회원국의 행정부 및 의회, 유럽의회를 통해 그 들의 의견을 전달하고 자문을 하게 됩니다. 특히 집행위원회는 민간수렴을 위한 별도의 담당부서를 두고 있어 연 2회 개인 및 관련 단체들을 초청하여 총회를 개최하고, 노동조합, 환경, 농업 등 13개 분야의 단체와 수시협의와 외의를 개최하고 있습니다.


통상절차법을 제정하고 FTA 협상에 나서야


 행정부의 일방적인 통상 교섭에 대한 의회의 견제와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의 의견을 협상에 반영하는 절차를 제도화하는 통상시스템의 구축은 더 이상 미룰 일이 아닙니다. 국내 이해당사자들의 의견수렴과 합의는 협상과정에서 최대한 우리의 국익을 챙길 수 있는 원동력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국내 이해당사자들을 설득하는 과정을 통해 사회적 갈등과 국론분열을 막고 이에 따른 사회적 비용을 줄일 수 있습니다.


 현재 국회에는 지난해 2월 권영길 의원의 발의로 ‘통상 협정의 체결 절차에 관한 법안’(통상절차법)이 제출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열린우리당 이상경, 송영길의원의 법안도 제출되어 있는 상황입니다. 하지만 법안 통과는커녕 심의조차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습니다.


 한미 FTA 협상과 마찬가지로 국내 산업에 미칠 영향에 대한 꼼꼼한 분석도 없고 국민들의 공론을 모으는 과정도 없이 시작되는 한-EU FTA협상은 또다시 졸속 협상으로 흐를 가능성이 높습니다. 더 나아가 정부는 이후에도 세계 각국과 동시다발적으로 FTA 협상을 벌인다고 천명하고 있습니다. 국회는 비록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통상절차법을 제정하여 입법기관으로서의 최소한의 책임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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