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중국의 NGO 활동가들이 만나다

관리자
발행일 2005.07.06. 조회수 2089
스토리


“시민단체 대표 및 실무자 중국연수”


‘시민의 신문’에서 주관하는 중국방문 행사의 제목은 그랬다. 처음 외국에 나가는 설렘으로 맞이한 중국은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정말 넓은 곳이었다. 우리가 방문한 도시는 북경, 상해, 소주, 남경 모두 4곳이었는데, 도시 주변지역을 움직일 때는 물론이고 도시 안에서 다른 장소로 움직일 때 마다 우리는 전체 일정의 상당 부분을 이동하는 시간에 할애해야 했다.



<사진 : 만리장성>


맨 처음 중국 땅을 밟은 곳이 북경이었다.

매번 우리는 흔적(?)을 남기기 위해 이동전이나 후에 사진을 찍곤 하였는데, 중국에 도착한 기념으로 사진을 찍기 위해 현수막을 펼치는 순간 중국 공안이 굳은 얼굴로 다가와 치우라는 손짓을 하였다. 우리는 불필요한 마찰을 피하기 위해 중국연수 제목만이 적힌 별 내용 없는 현수막을 서둘러 접으면서도 한 장의 사진을 남기고서야 그 자리를 떠날 수 있었다. 이후에도 우리는 어떠한 악조건에서도 번번이 중국 각 곳에서의 얼굴 도장 찍기를 그만두지 않았는데, 그것도 중국이라는 대륙만큼이나 나에게는 낯설게 다가왔다.


중국에 도착하여 점심을 먹기 위해 간 곳은 북경에서 한국인들이 가장 많이 살고 있는 도심의 한 곳이었다. 도로 주변에 30층 이상의 높게 솟은 빌딩과 아파트들이 여느 도시 못지않게 빽빽하게 들어서 있어 여기가 중국인지 의심스러울 만큼 중국은 도시화되어 있었다. 중국의 고층빌딩이 낯설게 느껴지는 것도 잠시, 정체모를 냄새에 속이 거북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고통스러운 시간의 서곡이 시작되었다.


나는 중국에서 향신료가 든 음식을 먹기는커녕 냄새 맡는 것조차 힘겨워 했다. 평소 보신탕을 제외하고는 웬만한 음식을 가리지 않고 잘 먹는 편이었던 내가 중국의 향신료에 그렇게 민감하게 반응하게 될지 전혀 짐작하지 못했던 터라 나로서도 상당히 당혹스러운 시간이었다. 하지만 내가 향신료가 든 음식 대신 ‘찡따오’ 맥주로 허기를 달랬다면 다른 사람은 기내에서 챙긴 휴대용 고추장을 꺼내 기름진 음식의 불편함을 줄여 각자 서로 다른 방식으로 중국에 적응하기 시작하였다.  


중국은 무척 더웠다. 아니, 덥다고 표현하기에는 뭔가 부족하고 적절하지 않은 듯하다. 중국이 무척 더우니 꼭 양산을 챙기라는 후배의 조언에 우산에서 양산으로 짐을 바꿔 오기는 하였지만 정작 중국에서 내가 양산을 쓰고 있는지를 체감하기는 쉽지 않았다. 타는 듯 태양열이 바닥에서 올라오는 열기와 양산을 통과하는 기운을 피할 수 없을 때에는 숨을 고르기조차 힘들었기 때문이다.


42,3°C의 고온에도 우리의 일정은 계속되었는데, 첫날에는 짐도 못 푼 채 중국의 가장 대표적인 시민단체인 자연지우(自然之友)를 방문하고 이어 중국 NGO 초청 좌담회에 참석하였다.


“자연지우”는 1994년에 설립된 중국의 최초 환경단체로 환경교육을 주목표로 삼으면서도 티벳 영양 살리기 운동과 같이 청정지역 보전캠페인을 포함하여 환경보전을 위한 정책제안 등의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1997년 이후 경제개발과 더불어 환경파괴가 극심해지고 자연자원을 보존하려는 움직임이 강화됨에 따라 환경운동은 중국에서 가장 활발한 활동을 벌이는 시민운동 분야가 되었다. 환경단체 이외에도 중부 하남 등 빈민 지역에서 성행한 매혈과정에서 에이즈에 감염된 사람들의 발병이 3년 전부터 급속히 증가하여 집단적으로 에이즈에 감염된 문제에 대해 대책을 세우려는 NGO 활동도 활발하다. 또한 실제 신분은 농민이지만 대도시에 나와 일하는 경우 법률적으로 보호받지 못하는 이들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 대도시를 중심으로 농민공노동자 NGO 활동이 활발하다고 한다. 농민공은 현재 북경인구 전체의 80~90%를 차지하고 있다.


중국에는 “자연지우”를 포함한 민정부 등록 NGO단체가 28만5천여개에 이른다고 한다. 이 중 대부분은 정부배경을 갖고 있는 관방의 성격이고, 비등록 단체까지 포함하면 200만개이다. 중국에서는 민정부 등록이 까다롭기 때문에 기업의 자격으로 등록하기도 하는데, 중국에서는 정부조직, 기업이외의 모든 사회조직을 NGO로 개념화하고 있어 우리와는 차이가 있다. 그렇다고 중국의 정부등록 NGO가 우리의 관변단체와 그 성격이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중국 엔지오의 재정규모는 연간 2만위엔(한화 2백60만원 정도)인데 전체의 70%는 이 수준에도 못 미치고 있으며, 또한 상근자 없이 활동하고 있는 단체가 대부분이라고 한다.


둘째, 셋째, 넷째 날에는 북경대, 청화대 NGO 센터, 복단대를 방문하여 중국정치의 현실과 한중관계, 중국 NGO 운동의 현재와 미래, 중국경제의 현황과 전망 등의 주제 강연을 듣고 토론하는 시간을 가졌다. 짧은 시간의 강의내용 속에는 중국공산당 일당독재체제를 유지하면서도 중국의 정치상황에 맞는 ‘중국식 민주주의’를 위한 다양한 실험을 진척시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빡빡한 일정이었지만, 개인적으로는 평소에 관심 갖기 어려운 중국의 여러 정치, 경제, NGO상황을 접할 수 있어 유익하고 좋은 시간이었다.


또 사막화방지를 위해 하북성 천막사막 현장을 방문하기도 하였는데, 이곳에 생긴 사막은 황사바람이 불다 중간에 떨어져 생긴 사막으로 점차 그 범위가 넓어질 뿐 아니라 북경에 가까워지고 있다고 하였다.



<사진 : 천막사막>


그 외 방문한 유적지 중 기억에 남는 대표적인 곳이 있었다. 일본에 의해 일반시민 학살사건이 벌어진 남경대학살 현장과 윤봉길 의사의 항거현장으로 뜻 깊은 홍구공원(노신공원)이다.


남경(난징)은 1937년 12월 중국의 수도로 일본군에 의해 약 30만 명의 민간인이 대학살을 당했던 곳이다. 이곳 전시관에는 대학살의 처참한 흔적이 그대로 유지되었는데, 생매장되어 늘어져 있는 유골들, 기총에 의한 무차별사격의 현장을 증명해 주는 피묻은 의복, 휘발유를 뿌려서 불태워 죽인 잔혹한 현장사진 등과 그 속에서 발견되는 어린아이의 시신과 부녀자들의 모습이 세계 문명사의 어두운 한 페이지를 보는 듯했다. 전시관에 시선이 한참 머물 무렵 어린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처참하고 잔혹한 흔적이 곳곳에 배어있는 전시관이 공포로 다가왔을 것임을 어렵지 않게 짐작하면서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사진 : 남경대학살 전시관 입구>



<사진 : 남경대학살 현장>


윤봉길의사가 일본 왕 생일기념식에 도시락 폭탄을 투척했던 홍구공원에서 폭탄 투하 전 윤봉길 의사가 남긴 유서의 내용을 보았다. 일본군에 잡혀 처형을 당하는 사진을 접하는 순간 에는 우리의 가슴에 뜨거운 기운이 전달되었고 이 기운은 상해임시정부청사가 있는 곳을 방문하면서 마치 뭐라 이야기하기 어려운 숙연함이 느껴지더니 남경대학살 전시관에 와서는 가슴이 조여 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특히 대학살에서 죽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어린아이들과 부녀자 등 민간인이라는 점은 어떠한 이유로든 전쟁은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것을 다시금 확인시켜 주었다고나 할까.



<사진 : 상해임시정부청사>



<사진 : 홍구공원>


다만 아쉬운 것은 시간이 부족하여 자금성-이화원-천안문을 제대로 돌아보지 못했다는 점이다. 각 대학을 방문했을 때도 토론장소 이외에는 북경대가 어떻게 생겼는지 거의 기억하는 바가 없고 이화원도 잠깐 머물러 몇 장의 사진으로 기억하는 현장이 전부라는 사실이 안타까웠다. 이런 지경이니 중국의 민주화 시위가 일어난 천안문 현장의 의미 등을 되새겨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아직도 내 귓가에는 장난반진담반 남발하던 가이드의 “빨리빨리” 움직이라는 주문이 맴도는 것 같다.



<사진 : 천안문 광장 >



<사진 : 자금성>


5박6일의 일정은 끝났지만, 여전히 내게 중국에 대한 낯선 기억을 지우지 못한 채 서울의 생활은 시작되었다. (2005.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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