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의 얼굴-Peace & Green Boat 첫번째 이야기

관리자
발행일 2005.08.31. 조회수 1746
스토리

지난 8월 13일부터 27일까지 보름동안 Peace & Green Boat 크루즈 여행에 참여하고 돌아왔습니다. 특히 올해는 처음으로 한국과 일본의 시민들 각 300명이 함께 참여하여 아시아의 평화문제에 대한 많은 교류와 체험을 하였습니다.

보름동안의 여행을 하며 개인적으로도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또한 많은 경험을 했습니다. 그 중에서 결코 잊을 수 없는 순간을 만들어주신 소중한 분이 계시는데, 그 분은 바로 ‘조선반도의 사람’ 리옥희 할머니입니다. 이제 그 분의 이야기를 당신께 들려드리고 싶습니다.

조선반도의 사람, 리옥희 할머니

내가 리옥희 할머니를 만난 것은 Peace & Green Boat 여행 중에 중국 단동에서의 기항지 프로그램의 하나인 조선족 홈스테이를 통해서이다. 단동은 압록강 하류에 있는 항구도시로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북한과 맞닿아 있는 국경도시이다.

할머니는 5년 전 북한에서 중국 단동으로 이주하셨다고 한다. 이 말만 듣고 혹 탈북자가 아닌가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북한에서는 오랜 교편생활 후에 교감으로 정년퇴임을 하신 엘리트이시다. 사실 할머니는 중국인 남편과 결혼하셔서 그 이전에도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중국에서 사실 수 있으셨지만, 세 자녀의 교육을 모두 북한에서 마치게 하실 정도로 북한에 대한 높은 자긍심과 애정을 갖고 계시다.

그러나 한편으로 할머니는 김일성 주석 혹은 김정일 위원장의 통치하에 있는 북한의 정치현실에 대해 일방적으로 좋게만 생각하지는 않으셨다. 나름대로 북한의 현실을 냉정히 평가하고 비판할 수 있는 안목을 지니고 계셨는데, 이는 역시 오랜 세월동안 중국에서 교편생활을 하신 남편의 영향과 또한 그에 따른 외부로부터의 정보가 많았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할머니의 세명의 자녀들은 모두 결혼을 해서 분가를 했고, 남편 역시 오랜 교직생활 후 은퇴를 하신 후에 지금은 주로 북한상품을 거래하는 중국 무역회사에 근무하고 계신다. 5년 전 단동으로 이주한 이후에 할머니는 가사를 돌보는 평범한 주부로서 지내고 계신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매일 실시간으로 남한의 TV방송, 특히 KBS 9시뉴스와 역사다큐멘터리를 즐겨보시면서 남한의 현실도 익히고 또 남한의 시각에서 바라보는 북한의 상황도 공부하는 열정을 지니고 계시다. 많은 외래어와 외국어 때문에 방송내용의 70~80% 정도만 이해하신다고 하시면서도, 노무현 대통령의 의욕적인 개혁 프로그램이 많은 비판세력 때문에 잘 안되고 있다는 나름의 남한 사회 분석도 하신다.

할머니는 또 좁은 나라에 살면서 좁은 마음으로 서로를 이해하려 하지 않고, 아옹다옹 다투고 있는 남북한의 현실에 대해서 말씀하셨다. 먹을 것이 없어 인민이 굶주리고 있는데도 핵무기 개발에만 몰두하고 있는 북한의 정치 지도부와 오랜 경제봉쇄를 통해 북한 인민을 핍박하고 있는 미제국주의를 비판하셨고, 또 한편으로는 경제적으로 좀 여유 있다고 거만한 태도를 보이는 남한 사람들에 대해서도 비판의 말씀을 하셨다.

또 할머니는 남한과 북한에는 애국자들이 없다는 말씀도 하셨다. 남한에서는 친일파들이 득세하면서 항일운동을 했던 애국자들을 쫓아냈고, 북한에서도 권력투쟁을 하면서 진정한 애국자들은 모두 숙청되었다고 하셨다. 그렇게 진심으로 우리민족의 홀로섬(獨立)과 하나됨(統一)을 위해 애썼던 진정한 애국자들은 남북한 모두에서 사라져버려 지금에까지 이르렀다는 것이다.

할머니는 이제 더 이상 자신은 조선(북한)의 인민이 아니라고 하신다. 물론 한국(남한)의 인민도 아니라고 하신다. 자신은 단지 ‘조선반도의 사람‘일 뿐이라고 하신다.

비록 땅은 나뉘어 있지만, 그렇게 편을 갈라서 다투고 있지만, 자신은 그런 편가름에 참여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의 표현이시리라. 기실 앞서의 남한과 북한사회에 대한 비판도 그런 할머니의 안타까움의 표현이시리라. 갈라진 땅에 갈라진 마음.. 그런 안타까움이시리라...

1박 2일의 짧은 홈스테이가 끝나는 다음날 아침, 할머니는 손수 맷돌을 돌려 콩을 갈아 콩죽을 만들어주셨다. 전기믹서로는 제 맛이 안난다며 이른 새벽에 일어나 손수 만들어주신 것이다. 남은 콩죽은 배에서 먹으라며 싸주셨다. 정(情)이란 것, 짧은 만남이었지만 할머니는 친자식이나 손주들을 맞이해주듯이 그렇게 깊은 정을 담아주셨다.

예정된 시간이 그렇게 지나가고, 우리는 어느덧 버스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서로에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한동안 그렇게 손을 흔들며 이제 막 버스가 출발할 시간, 할머니는 잠시 머뭇거리는 듯 하시더니 주섬주섬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신다. 살펴보니 종이와 볼펜을 꺼내어 무언가를 쓰신다. 잘 가라는 마지막 인사쯤이리라. 버스가 막 출발할 즈음 다급히 종이를 펴보이며 할머니의 얼굴이 안타까이 일그러지신다.

통일!!

할머니가 쓰신 글은 ‘통일‘ 두 글자였다.

순간 내 얼굴도 할머니를 닮아 일그러진다. 두 눈이 흐려진다. 앞을 볼 수가 없다. 다급한 마음과 더불어 뭐라 말하고 싶고, 뭐라 외치고 싶었지만, 머릿속이 하얘지고 만다. 흐려진 눈 사이로, 하얘진 머릿속으로 할머니의 얼굴이 멀어져 간다.








Epilogue

리옥희 할머니는 노래 부르기를 좋아하십니다. ‘반갑습니다‘ 등의 북한 노래뿐만 아니라 단동에 오셔서 배우신 남한의 대중가요들도 좋아하십니다. 그렇게 배운 노래들은 생각날 때마다 수첩에 빼곡히 가사를 적어 놓고서는 가끔씩 그렇게 부르신답니다. 함께 노래를 부르시며 즐거워하시던 할머니의 얼굴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우리는 단 한순간도 공기가 없으면 살 수 없지만, 그 소중함은 잘 알지 못합니다. 지금껏 저에게 평화나 반전이란 말들은 그런 것이었습니다. 아직 한번도 잃어본 적이 없기에 그 소중함이 간절하지를 못합니다.

이런 저에게 리옥희 할머니의 마지막 모습은 많은 것을 얘기해주었습니다. 할머니가 들고 계신 통일이라는 두 글자보다 할머니의 얼굴은 더 많은 것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글로는 설명하기 힘든 마음을 할머니의 안타까운 얼굴을 통해 알게 됩니다.

Peace & Green Boat를 타고 만난 사람들의 얼굴에서 할머니와 같은 마음을 발견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서로에 대한 증오를 버리고 평화롭게 살아가는 세상에 대한 꿈과 희망을 만났습니다. 언젠가 우리는 평화에 대한 더 깊은 바램과 염원을 갖고, 더 많은 사람들과 더불어 다시 만날 것입니다. 그런 믿음과 염원을 할머니의 얼굴과 함께 가슴 깊숙한 곳에 담습니다.


이민규 (경실련 도시개혁센터 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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