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이 되면 가장 하고 싶은 일_박경화 환경운동가 겸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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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2014.11.06. 조회수 1485
칼럼




통일이 되면 가장 하고 싶은 일


박경화 환경운동가, 작가


1. 단체사진.JPG


로저 셰퍼드, 전직 뉴질랜드 경찰관인 40대 후반의 이 사나이는 내가 가장 부러워하고 질투하는 사람이다. 아마 2012년 어느 날이었을 게다. 경복궁역에서 지하철을 타려다가 우연히 로저 셰퍼드의 사진전을 보게 되었다. 남쪽 백두대간뿐 아니라 북쪽 백두대간까지 종주를 하고, 그 사진을 모아 산림청 주최로 사진전을 열고 있었다.


강원도의 산보다 더 높고 장쾌하게 펼쳐진 개마고원 풍경과 인가 가까운 곳에는 나무 한 그루조차 없는 민둥산, 다양한 표정을 가진 금강산까지…, 우리에게는 미지의 세계 같은 북녘의 웅장한 산줄기들이 큰 액자 속에 담겨 있었다. 가고 싶어도 가지 못하는 우리 땅을 남반구 출신 사나이가 먼저 걸었다는 것이 몹시 부럽고도 배가 아팠다. 우리는 기껏해야 반쪽 백두대간만 볼 수 있는데, 남북 백두대간을 온전히 걸은 이가 우리 민족도 아닌 뉴질랜드 사람이 될 줄이야.


몇 달 후 로저 셰퍼드가 걸었던 북쪽 백두대간 종주는 텔레비전 다큐로도 방영되었다. 탐방로가 제대로 나 있지 않은 진흙탕길을 달리다가 낡은 차가 고장이 나고, 코펠과 버너가 아닌 냄비에 모닥불을 피워서 밥을 해 먹고, 빨치산 대원 같은 후줄근한 가이드 사내와 함께 종주하는 모습은 못내 안쓰러울 정도였지만 언젠가 나도 저 길을 걷고 말리라. 통일이여, 어서 오라! 욕망이 불타올랐다.


4. 도라산전망대.JPG


도라전망대에서 망원경으로 본 개성공단은 손에 잡힐 듯 가까웠다. 개성공단 뒤로는 아파트 여러 채가 우뚝 솟아 있는 개성시가 보였다. 그 마을에 살면 세금도 내지 않고 군대면제라는 말에 남자들이 매우 부러워하는 대성동도 보이고 판문점도 어렴풋하게 보였다. 정말 이렇게 가까울 줄이야. 10월 18일 경실련통일협회 민족화해아카데미 프로그램의 일환인 현장기행을 따라갔다. 제3땅굴과 도라전망대, 도라산역, 임진각을 간다는 말에 두 번 고민할 틈도 없이 냉큼 같이 가겠다고 했다. 신라의 마지막왕인 경순왕릉과 연천군에 있는 북한군․ 중국군의 무덤에는 따뜻한 가을볕이 내려앉고 있었다.


그러잖아도 서울역에서 도라산역까지 DMZ 통일열차를 운행한다는 소식을 듣고 꼭 가야겠다는 생각을 하던 차였다. 좋은 분들과 같이 가고 친절한 해설까지 해주는 DMZ 기행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비무장지대는 참 묘한 기분이 들게 만드는 곳이다. 반공교육을 투철하게 받았던 청소년 시절엔 곧 총알이 날아올 것 같이 후들후들 떨리는 곳이라 생각했고, 통일운동이 한창이던 대학 시절엔 꼭 한번 가보고 싶은 호기심 가득한 곳이었고, 지금은 아주 독특한 관광지 같은 느낌으로 다가왔다. 이런 생각은 비단 나 뿐만은 아닌 모양이다.


첫 도착지인 임진각부터 왁자지껄한 중국어 때문에 귀가 따가웠다. 작년에 우리나라를 찾아온 중국인 관광객은 430만 명인데, 그중 꽤 많은 사람들이 이곳 비무장지대를 찾아온다고 했다. 가는 곳마다 와글와글 주변 사람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 큰 목소리로 이야기하고 사진을 찍느라 여념이 없었다. 한국여행의 필수 코스로 찾아오는 이들은 한반도의 분단을 바라보면서 무슨 생각을 할까? 우리와 비슷한 생각을 할까?


내가 활동했던 녹색연합에서는 해마다 봄이 되면 활동가들이 열흘 동안 환경현장을 걸으며 우리 땅의 환경문제에 대해 생각하는 녹색순례를 떠난다. 2001년 그해 녹색순례는 비무장지대였다. 열흘 동안 임진각에서부터 강원도 고성 통일전망대까지 구간을 나누어 걷고 또 걸었다. 가장 많이 본 것은 중무장한 군인과 철조망, 초소, 군부대였고, 오르락내리락 끝없이 이어지는 철조망과 산불로 까맣게 타버린 철조망 들판, 흡사 아프리카 평원 같은 철원 비무장지대, 과일화채 그릇 모양을 닮은 양구 펀치볼에서 걸어 내려오는 길은 오래도록 깊은 인상으로 남았다. 남북이 분단되면서 비극적인 역사가 시작되었지만 남북 각각 1km씩 철조망을 세우면서 인간의 출입이 금지되자 그 안의 자연생태계는 살아났다. 그 생태계를 직접 보고 현장에서 듣는 생생한 이야기는 가슴을 뛰게 만들었다.


2. 땅꿀.JPG


그 뒤로도 간간히 비무장지대를 찾았지만 땅굴은 가본 적이 없었다. 이번 기행에서 가장 기대했던 곳 역시 땅굴이다. 땅굴은 매우 깊은 곳까지 길게 이어졌다. 안내판에는 350미터라고 적혀 있는데 ‘이러다가 북한까지 걸어가는 거 아냐’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헉헉 걸어야 했다. 좁고 답답한 굴속을 와글와글 쉬지 않고 떠드는 중국 사람들과 같이 걷자니 통일에 대한 엄숙함은 끼어들 겨를도 없었다.


제3땅굴은 1974년 북한에서 귀순한 김부성 씨가 자신이 땅굴을 측량한 측량기사였다고 제보를 하면서 알려졌다. 땅굴 예상 위치에 PVC 파이프 시추공을 107개를 설치해 두었는데, 3년이 지난 1978년 6월 10일 한 시추공에서 폭발음과 함께 물이 솟아오르는 것을 발견하고 주변에 시추공을 추가로 설치하다가 땅굴을 발견하게 되었다고 한다. 총 길이 1,635m, 지하 73m에 위치하고 있으며 높이 2m, 폭 2m의 둥근 아치형 땅굴이다. 땅굴 안쪽 울퉁불퉁한 바위를 손으로 짚으니 촉촉한 물기가 닿았다.


몇 해 전, 일본 교토 외곽에 있는 단바망간기념관을 찾아간 적이 있었다. 이곳은 한국인 강제징용자들이 망간을 캐던 탄광이다. 망간은 철을 단단하게 만드는 광물로 총이나 대포를 만들 때 꼭 필요했다. 평생을 이 탄광에서 일하다가 진폐증을 앓은 이정호 선생이 기념관을 짓고 아들이 운영하는 곳인데 만성 적자에 허덕인다고 했다. 일본어도 할 줄 모르고 버스 타는 방법도 몰랐지만 물어물어 그곳을 찾아갔다.


굳이 먼 길을 찾아간 것은 우리 할아버지가 1943년 무렵 강제징용되어 탄광에서 일했기 때문이다. 결국 할아버지는 고향마을로 돌아오지 못했고, 지금도 생사를 알 수 없다. 비록 이 탄광에서 일한 것은 아니었지만 할아버지가 일했던 비슷한 환경을 찾아가보고 싶었다. 밖에는 한여름 더위가 작렬했지만 탄광은 서늘했다. 탄광의 벽과 바닥에서도 촉촉한 물기가 스며 나왔다. 이 좁고 답답한 탄광에서 허리도 제대로 펴지 못한 채 일했을 사람들의 모습이 생생했다. 바위 사이로 스며 나오는 물은 한 맺힌 할아버지의 눈물 같았다. 땅굴과 탄광 모두 우리 현대사의 비극적인 현장이다. 이 어두컴컴한 공간은 우리 민족이 겪은 암울한 역사이자 적나라한 민낯이다.


3. 경순왕릉 지뢰.JPG


통일이 되면 환경운동을 하는 우리는 할 일이 참 많다. 로저 셰퍼드처럼 백두산에서 지리산까지 백두대간을 걸으며 보전가치가 있는 숲과 훼손현장을 생생하게 기록하고, 남북 생태계와 생물종 조사, 민둥산이 된 북녘 땅에 나무심기 행사, 환경교육 프로그램까지 흥미로운 일들이 줄줄이 기다리고 있다. 이번 현장기행에 작은 쌍안경을 가지고 가서 틈틈이 하늘을 나르는 새를 관찰했다. 겨울철새인 기러기와 오리류들이 남쪽을 향해 V자를 그리며 날아오곤 했다. 저 자유로움 부럽다. 2007년 금강산을 갔을 때, 앞으로 해마다 방문할 거라 생각해서 설렁설렁 보고 왔는데 그 다음해부터 중단되어 지금까지도 가지 못하고 있다. 내년엔 아무래도 백두산 야생화 기행부터 다녀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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