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100년 도약을 기대하며

관리자
발행일 2009.11.17. 조회수 573
칼럼

 


새로운 100년 도약을 기대하며



김석준(전 상임집행위원회 부위원장)


    나는 1989년 경실련 창립 이후 평생회원, 조직위원장, 윤리위원장, 상임집행위 부위원장, 정책위 부위원장 등을 지내고 경실련이 초기 어려웠던 고비마다 비상대책위원을 세 차례 지냈다. ‘정보공개연구팀장’을 맡아 정보공개법 제정을 경실련이 주도하는데 동참하고 연구결과를 경실련 총서 2권인 ‘열린사회 열린정보’로 발간하였다. 초기 경실련에는 정치학자나 행정학자가 거의 없던 시절이라 내가 각종 토론회나 발표회에 경실련의 대표로 참여하는 경우가 많았다. 10여년 뒤 경실련과 정부의 관계가 돈독해진 뒤에는 정치행정학자들이 많이 참여하고 이들이 정부의 각종 위원회에 시민단체대표로 참여하면서 외로움은 덜했다.


    내가 경실련 창립부터 관여하게 된 것은 서경석, 이형모, 신대균 목사 등 새문안교회팀과의 개인적인 인연 때문이다. 특히 서울공대 1년 선배인 서경석 목사와 공대시절 ‘산업사회연구회’를 만들어 함께 공부한 후 인천도시산업선교회의 소개로 1969년 11월에서 1970년 2월까지 구로공단과 인천판유리공장에서 막노동을 하면서 기독교 사회운동의 기초를 닦았다. 공대로 돌아와서 나는 서울공대 기독학생회 총무와 회장을 지내면서 방학 중에는 새문안교회 대학부를 다녔다. 행정대학원 진학 후에는 새문안교회 청년회 총무를 지낸 인연으로 내가 대학교수였지만 경실련 창립의 주력세력인 새문안교회팀이나 서울대기독학생회팀과는 쉽게 어울릴 수 있게 되었다. 이들과의 인연이 정치행정학자로서는 예외적인 처신이었지만 내가 편안하게 경실련에 동참하게 한 것이다.


    내가 경실련 활동에서 가장 보람 있게 생각하는 것은 창립 초기 경실련의 활동 방향을 모색하는 데 기여한 점이다. 특히 창립 3주년과 5주년 및 11주년 기념 전국행사에서 경실련 활동에 대한 평가와 나아갈 방향에 대해 내가 발제를 하고 토론을 거쳐 경실련의 활동방향이 회원 총회에서 채택되는 등의 일에 동참한 것이다.


    둘째는 조직위원장으로 전국조직을 대대적으로 정비하고 확장한 일이다. 1995년에서 1997년 사이에 전국 지부를 거의 두 배로 확장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 일은 박병옥 조직 국장과 하승창 조직국장이 자리를 이어가며 조직국을 독려하여 지부결성을 희망하는 전국 지역을 직접 발로 뛰면서 실사하여 옥석을 구분해준 덕분에 가능했다. 당시 경실련의 위상이 높아져서 각 지역에서 경실련 지부를 결성하겠다는 신청이 넘쳐났지만 많은 경우 그 지역에서 지탄을 받는 전력을 지닌 정치꾼들이 많아 조직국 요원들이 현장실사를 통해 그들의 전력이나 평판을 조사하는 활동이 매우 중요했다. 그렇게 엄격하게 지부 간부들을 조사하고 현지 점검했지만 몇몇 지구는 문제아들이 배후에 숨고 형식적으로 다른 사람을 앞세워 본부를 교란시키기도 했지만 조직국 요원들이 결국 그들을 찾아내어 배제하면서 조직 확대와 내실화를 성공적으로 기할 수 있었다.


    셋째로는, 비상대책위원을 세 차례나 맡으면서 경실련이 위기를 벗어나 한 단계 발전하는 데 동참할 수 있었던 일이다. 경실련은 창립 초대 사무총장의 정치참여에 따른 사퇴 파동, 국정원 테이프 사건과 관련한 2대 사무총장의 퇴진사태, 그리고 후임 총장 선임을 둘러싼 내부 갈등 등의 커다란 사건들이 발생하여 경실련 전국 조직은 물론 국내적으로도 큰 파장을 불러왔다. 이로 인해 이들 사건과 직, 간접적으로 연결된 인사들을 제외하면서 내부 인사가운데 지도급 인사들로 위기 극복을 위한 비상대책위원회를 그 때마다 구성하여 위험한 고비를 넘겼다. 나는 거의 유일하게 세 차례의 비상대책위원회에 위원으로 참여하는 경험을 했다. 비경제학자였기 때문에 상근자와 비상근자간의 갈등이나 주요 임원들 간의 갈등에서도 연루되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비상대책위원으로 활동하게 된 셈이다. 경실련 내에서 흔히들 학자들 가운데에서도 경제학자는 ‘성골’, 법학자나 변호사는 ‘진골’, 나머지 학자들은 ‘육두품’이라는 말들이 있었는데 나는 ‘육두품이어서 성골과 진골의 다툼에 참여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어떤 사무국 간부의 논평이 지금도 귀에 생생하다. 그러고 보니 경제학자들의 경우에는 경실련 활동에 거의 기여하지 않은 채 경실련 참여와 거의 동시에 경실련의 가장 요직인 정책위원장을 지내고 그 가운데 많은 이들이 상임집행위원장을 지낸 것?보면 사무국 간부의 평가가 틀리지 않은 것 같다. 특히 정책위원장을 전 현직 정책위원장끼리 합의하여 지명하는 방식은 시민단체에서는 물론 일반 조직에서도 적절하지 못한 방식이다. 지금도 그대로 유지되는지는 모르겠으나 그 조항이 일부 경제학자들의 기득권 유지와 권력화에는 기여했으나 경실련의 조직 확산과 발전에는 큰 장애요인임은 분명하다.


    넷째로는, 내가 강경근, 이윤식, 홍준형 교수와 더불어 ‘정보공개연구팀’을 구성하여 연구책임자로 수 차례의 정책토론회나 정책건의 활동을 하고 경실련이 국회에서 정보공개법을 만들도록 하는데 기여한 일이다. 감사원의 내부 고발사건을 계기로 정보공개를 통한 부정부패 추방이 국가적인 과제가 되면서 경실련은 정보공개법을 제정하는 데 앞장서게 되었다. 금융실명제 도입 이후 정부와 기업의 부패척결을 위한 정보공개제 도입이 경실련의 주요 운동과제가 되면서 경실련 총서로 출간하고 입법활동을 전개하여 정보공개법이 국회를 통과하게 되었다. 이 일은 경실련의 업적이면서 나도 거기에 동참한 것을 자랑으로 삼고 있다.


    다섯째로는, 경실련이 주도한 정치개혁과제들이 국회에서 정치개혁법으로 반영되면서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일한 보람을 느꼈다. 뒷날 ‘오세훈 법’으로 상징된 정치자금법, 선거법 등의 개정 내용은 나를 중심으로 한 경실련이 주장한 내용들이 대부분이어서 정치개혁에 대한 경실련의 기여를 다시 한 번 확인해 본다. 소액다수 정치후원금제 도입, 선거공영제 확대, 선거관리위원회 기능과 권한 확대, 정치후원금 내역 공개, 10만원이하 정치후원금 전액 세액 공제, 엄격한 정치자금법과 선거법 등은 나와 경실련이 늘 주장하던 내용들이다. 다른 정치학자들도 일부 비슷한 주장을 부분적으로 했지만 경실련이 이들을 체계적이고 일관성 있게 주장하면서 여론의 지지를 받고 제도로 정착한 것이다.


    이처럼 나는 경실련에서 많은 아름다운 경험과 추억을 지니고 있다. 다만 아쉬운 점은 1998년 1월 신년인사회의 장면과 이후의 모습이다. 보통 경실련 간부들이 맨 앞에 서던 관례 대신에 여당 실세들과 정부 최고위직 인사들이 전면을 차지하여 줄줄이 건배하고 경실련 인사들은 밀려 주변에서 겨우 선채 진행된 신년인사회가 상징하듯 경실련 지도층이 정부요직에 대거 진출하고 정권과 가까워지면서 시민단체로서의 성격을 크게 훼손한 일이다. 그날 이후 경실련에게는 새로운 시련과 위기가 오게 된 것이다. 나는 1998년 8월에서 1999년 8월까지 1년간 하버드대와 옥스퍼드대에서 교환교수를 마치고 돌아와 경실련 전국총회에서 ‘뉴 거버넌스와 경실련 활동의 새로운 방향’이란 주제 발표를 하는 등의 노력을 기울였지만 역부족을 느꼈다. 경실련에 대한 아쉬움도 커지면서 새로운 대안을 찾아 나섰다.


    나는 당연한 얘기지만 시민단체는 NGO(Non-Governmental Organization)의 정의에 충실해야 한다고 본다. 정치적 성향이 가까운 정치세력이나 정권이 있을 수 있지만 본연의 자세는 비판과 대안제시라고 생각한다. 그렇지 못할 경우 더 이상 시민단체로서의 역할이 없다고 본다. 경실련도 이젠 20년의 역사를 거치면서 산전수전 다 거친 셈이다. 그동안의 영광과 오욕을 넘어 시민과 함께하는 경실련 100년의 새로운 도약을 기대한다. 그동안 묵묵히 헌신해온 수많은 경실련 가족의 노고에 감사하며 모두의 행복을 기원한다. 


 


<약력>
전 경실련 정책위원회 부위원장
              상임집행위원회 부위원장
현 과학기술정책연구원 원장



*이글은 2009년 월간경실련 특집호에 실린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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