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산책] 어느 새 멀어져 가는 봄, 영화 동사서독을 기억한다

관리자
발행일 2013.05.31. 조회수 542
칼럼
[문화산책] 어느 새 멀어져 가는 봄,  영화 동사서독을 기억한다

오세형 (사)경실련도시개혁센터 간사 dipsec@ccej.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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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저녁으로 쌀쌀함 때문에 봄이 왔는지 모르겠다가, 어느 새 뜨거운 열기마저 느껴져 이대로 봄이 가는 것인가 아쉬워하는 이 즈음이다. 성큼 멀어져가는 봄을 생각하며 떠오른 영화가 있으니 왕가위 감독의 동사서독이다. 

왕가위 감독과 동사서독을 친구를 통해 알게 되었다. 영화를 좋아하기는 하지만, 영화읽기에 능하지 못한 나에게 한 차원 높은 영화읽기를 가르쳐준 친구다. 학업에 지치고 사랑에도 지친 시절, 친구의 자취방에서 함께 본 영화는 언제든 기억하고 찾게 되는 감동이 있는 영화로 내게 남았다.

왕가위 감독은 우리에게 잘 알려진 명작들을 만들어냈다. 아비정전, 해피투게더, 타락천사, 중경삼림, 화양연화…. 우리나라 광고에서도 패러디했던 장면들이 줄줄이 나오는 작품들의 감독. 한 번 쯤 왕가위식 표현과 영상미에 매료되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동사서독’ 역시 그의 필모그래피에 꼭 들어갈 영화 중 하나이다. 


“해마다 봄이면 고향에는 복사꽃이 찬란하게 피지”

김용의 무협소설을 기초로 했지만, 이 영화는 칼부림과 각종 신기한 도술이 넘쳐나는 스펙타클한 무협영화가 아니다. 다양한 인물들의 상처 깊은 사랑이야기가 펼쳐진다. 사랑의 이야기는 복잡하게 얽혀있다. 자신의 욕망을 위해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면서도, 기다려주지 않음에 상처받고, 그리워한다. 떠난 이를 그리워하면서도 자신을 위해 현실적인 선택을 한다. 배신한 사랑에 절망하여 방황하면서도 끊임없이 그에 대한 근원적인 향수에 함몰되어 조금도 앞으로 나가지 못한다. 서로의 육체를 탐하면서도 마음속에는 다른 누군가를 담고 있다. 뒤틀린 사랑을 하는 등장인물들이 넘쳐난다. 온전히 자신의 욕망에 이끌려 행동하고 사랑하면서 조금도 상처받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지만 결국은 커다란 공허함과 아픔을 안고 살아가는 등장인물들인 것이다. 그러나 현실에 안주하지 않는 인물도 있다. 새로운 깨달음 속에서 사랑을 지켜나가기 위한 여정을 시작하는 것이다.

사랑은 삶의 에너지이다. 인간은 사랑하면서 살아간다. 어떠한 사랑이 되었든지 이기적인 마음에 갇힌 사랑은 봄꽃처럼 피어나지 못하고 쓸쓸함과 외로움에 시들어갈 수밖에 없다. 복사꽃이 만개한 계절을 지나고 있다. 우리의 다양한 사랑이 커져 인류애적인 사랑이 되도록 만들어 보자.


“인간이 번뇌가 많은 것은 기억 때문이라 했다”

시간의 재(Ashes of Time), 동사서독의 영어제목도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 시간의 흐름은 참 잔인하다. 되돌릴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공기의 소중함을 잘 깨닫지 못하듯 시간의 흐름을 잘 느끼지 못 한 채 흘려보내는 경우가 많다. 그리곤 훌쩍 흘러버린 시간들에 대한 아쉬움과 후회를 갖게 된다. 영화는 시간의 재에 비유될 과거의 기억에 매몰되는 인간의 모습을 잘 그리고 있다. 인간은 기억하지 못하면 살 수 없고, 모두를 기억해도 살 수 없다. 적당히 기억하고 적당히 잊어야 한다. 기억은 각자의 삶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 좋은 기억은 삶의 안식을 주지만, 나쁜 기억은 삶을 뿌리 째 흔드는 불안요소가 되기도 한다. 좋은 기억이라고 해서 언제나 긍정적 효과를 내는 것은 아니다. 그 기억에 얽매이게 되면 올바르게 오늘을 살 수도 없고, 오늘이 모여 만드는 내일을 준비할 수도 없는 것이다. 영화에선 기억을 잊게 해준다는 ‘취생몽사’란 술이 나온다. 기억을 지울 수 있는 술이라니, 누군가에겐 매력 있게 들릴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각자의 기억의 주인이다. ‘취생몽사’가 필요 없는 주체적 삶을 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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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갖지는 못하더라도 잊지는 말자”

뚜렷한 스포일러 내용은 없으니 본적이 없는 분들은 한 번 꼭 보시길 권한다. 무협영화라면 응당 이래야 한다고 생각하는 파워풀한 장면들은 많지 않다. 언뜻 지루하고 밋밋한 느낌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당대의 내로라하는 홍콩배우들이 총망라된 영화 동사서독. 영화는 철학적인 물음을 바탕으로 덧없음과 쓸쓸함이 묻어나는 슬픈 사랑이야기를 잔잔하게 풀어낸다. 아름다운 영상미를 느끼며 사랑과 기억에 대해 곱씹어 볼 시간도 갖게 될 것이다. 영화는 이 봄에 오래된 와인처럼 달고 깊은 시큼함을 선사한다. 내게 왕가위 감독과 동사서독을 알려준 벗이 보내온 문장으로 끝을 맺어야겠다. 

“문득 갖지는 못하더라도 잊지는 말라던 그녀가 떠오르는 봄이네. 나와 취생몽사 한 잔 하지 않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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