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적 요구를 선도하고 나선 경실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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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2009.11.06. 조회수 639
칼럼

 


시대적 요구를 선도하고하고 나선 경실련



 
정미화 ( 경실련 상임집행위원장)



 

1999년 가을의 어느 날이었다. 당시 무분별한 농지전용과 골프장 개발에 화가 났던 참에 토지정의를 외치며 정부의 인허가권을 감시한다는 시민단체가 있다는 소문을 전해 듣고 경실련을 찾게 되었다. 전화를 하여 위치를 묻고 시민입법을 한다는 분과의 저녁모임에 참석하게 되었다. 사무실은 동대문 옆에 있는 허름한 건물에 자리 잡고 있었는데 사방에 책과 문건이 들어차 있고 좁게 쪼갠 서너 개의 방에 간사와 전문가 등이 빼곡하게 모여 각종 현안을 논의하던 것을 보던 일이 눈에 선하다. 오래 되어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시민입법 분과는 김성남 변호사님이 담당하셨는데, 30을 간신히 넘긴 젊은 변호사의 참여를 기쁘게 맞아 주셨던 것으로 기억된다. 시간이 지난 뒤 예전 일을 돌이키려면 희미한 기억 속에 사실보다는 당시의 감정이나 느낌이 우선 떠오르게 된다. 60년대 이전은 오래된 흑백사진의 누런 색감으로, 그리고 70년대는 약간씩 선 빛이 나는 칼라사진의 어색한 색감으로 기억이 채색된다. 80년대나 90년대는 애매하다. 사회에 뛰어들며 거침없이 삶을 계획하고 실행하였던 시기인지라 기억의 내용이나 색감이 분명하지 아니하다. 모든 것이 좌절로 점철되는 것으로 느껴져 세상이 잿빛으로 보일 때도 있었고 한 없는 자신감으로 붉은 빛으로 보일 때도 있었다. 경실련은 이렇듯 색감조차 분명하지 아니하던 30대 초반의 나이에 나와 조우하게 되었다. 


 
초창기의 경실련에는 사람과 일이 있었다. 사회적인 문제는 경제정의의 관점에서 모두 한 번 점검해 볼 수 있는 시절이었는데, 그 전에는 정부가 행하는 일에 민간이 의견을 내어 놓거나 반대를 하는 일이 관념적으로 조차 허용되기 힘든 것으로 여겨지고 있었다. 정당 정도가 정부의 정책에 이의를 걸 수 있었고, 언론사에서 시책과 반대되는 논조를 발표하는 것은 지사적 기질을 가진 기자에 한정되었다. 독재에 항거하며 민주주의 투쟁을 하던 투사와 일반 시민들은 정부의 의도적인 핍박으로 철저히 분리되었고, 시민들은 선거에 참여하여 소극적인 의견을 개진하는 정도로 정치적 의견을 밝힐 수 있었을 뿐 이었다. 시민사회가 성숙되지 않은 상황이라 정치개혁이나 사회발전 등의 주축을 담당하는 것은 주로 학생의 몫이었다. 70년대의 반독재투쟁이 80년대의 체제개혁 투쟁으로 전환되면서 국민이 전면에 나서 정치상황을 주도할 수 있는 기반이 80년대의 후반에 마련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시대적 요구를 선도하고 나선 본격적인 시민단체가 바로 경실련이었다.



 
경실련의 동대문 사무소는 비록 좁고 낡았지만 시민의 자격으로 참여한 젊은이들을 홀대하지 아니하였다. 우리에게 많은 주제와 일을 제공하였고 우리의 사소한 발언도 높게 샀다. 창의적인 제안이 쏟아졌고, 부동산 개발이나 행정구조개편에 관한 구체적인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토지 공개념의 구상이 구체화되었고, 금융실명제나 공직자윤리법에 관한 제안을 입법에 반영하기 위한 구체적인 활동이 시작되었다. 고계현 실장도 당시 만났던 몇 안 되는 활동가 중의 하나였다. 밤새 법률안을 작성하고 새벽같이 국회를 찾아가 의원실을 기웃거렸던 일이 몇 번이던가. 젊음을 바탕으로 의욕과 용기 하나로 세상을 바꿀 것을 꿈꾸었던 시절이었다. 문민정부가 들어서고 군사정부의 냄새가 가시게 될 무렵 나는 친구들과 심각한 고민을 하게 되었다. 반독재의 문제가 해결되었다면 시민으로서 사회를 위하여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하는 점이었다.



 
당시 나는 현안으로 대두되어 있는 노동문제, 통일문제, 이념문제 등의 갈등을 정리하지 못하고 있던 터라 다른 방법의 선택을 하였다. 우리 사회는 이제 성숙한 시민사회로 성장할 것이므로 그 방향에 맞는 실력있는 전문가가 되어야 하겠다는 선택이 그것이었다.



 
이러한 선택의 과정은 유쾌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러한 선택에 불을 붙여 준 중요한 사람은 권영준 선생님이었다. 주말마다 모여 다락방 모임을 갖고 있었는데 귀국한지 얼마 되지 않았던 권영준 선생님은 우리에게 더 넓은 세상과 더 많은 주제에 관심을 갖게 해 주었다. 많이 알지 못하면 넓은 가능성을 찾을 수 없고, 넓은 가능성을 염두에 두지 않으면 유연하게 대응할 수 없는 것이 우리의 한계라는 생각에 심각한 고민을 많이 하게 되었다. 경실련에서 만난 선생님들의 스펙트럼은 다양하였지만 공통적인 점은 유연하고 실용적으로 사안을 분석하고 대안을 제안하고자 한다는 점이었다. 부동산 개발과정에서 발생하는 막대한 개발이익을 왜 토지의 소유자나 개발업자가 독점해야 하는지, 노동자들의 근로조건을 억압함으로써 사용자가 어떠한 이익을 얻게 되는지, 민족의 통일을 막는 기재가 무엇인지를 이념과 정치를 배제한 실용적인 개념에서 접근한다면 상당한 해답이 나올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게 되었? 법률가로서 세상을 의미있게 살기 위해서는 좋은 생각과 실력을 갖추어야 하는 것이 당위로 다가왔다. 지금은 모르겠지만 당시 서경석 목사님은 상당한 리더쉽과 신선함을 가지고 있었고 간사들이나 스탭들의 학구열도 매우 높은 편이었다.
 



잠시 다녀 온 유학은 나의 생각구조를 많이 바꾸어 놓았다. 아무리 좋은 생각이나 목적도 합리적인 방안으로 뒷받침 되지 않으면 실패할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 나를 지배하였다. 합법적인 제도적 대안의 가능성을 다방면으로 모색하기 시작하였고 시민사회의 성숙을 통한 사회적 모순의 극복이 가능하다는 환상을 오랜 기간 견지하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한동안 경실련을 뒤흔들었던 여러 가지 파동은 상당한 실망이었다. 시민사회가 기득권을 가진 것으로 생각하면 심각한 혼란을 겪을 수 있다는 사실을 실감하였다. 겸손하게 밑바닥에서 시민들의 의견을 귀 기울이고 그들의 마음을 읽어야 하는데 어느 새인가 초창기의 겸손함과 유연함이 경직성과 오만으로 변모되어 가는 현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 후 한동안 경실련과 무관하게 할 수 있는 일을 찾았다. 시민행동과 함께 예산감시운동에 참여하였고, 가정법률상담소의 가족법 개정운동에도 관심을 놓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민변의 사법감시 및 개혁운동은 법조인으로서는 더 할 나위 없는 즐거운 활동의 터전이었다. 그 와중에 권영준 선생님의 간곡한 요청으로 공적자금 감시운동으로 경실련에 복귀하였다. 기업변호사로서 구조조정과정에 실무적으로 관여하면서 얻은 지식을 활용해 보고자 하였으나 점차 중견변호사로 성장해 가는 과정에서 예전같이 시간을 내기가 어려웠다. 지금도 여러 선생님들에게 송구함을 느낀다.
경실련은 젊은 날 생각의 틀을 정리하게 해 준 중요한 터전이었던다. 비록 손에 잡히는 성과를 내지는 못했지만 이름 없는 시민들이 나름대로의 생각을 모아 사회에 던진 화두들이 좋은 반향을 얻을 때에는 한없이 기뻤다. 시민으로서의 대안있는 활동은 그 나름의 제한과 한계가 존재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사회적 변혁의 과정에서 존재감을 찾을 수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경실련은 그러한 시민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대변해 주는 것으로도 큰 의의가 있다. 그래서 경실련은 20년 동안 살아 있는 것이고, 계속하여 살아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글은 2009년 월간경실련 특집호에 실린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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