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산책] 4천원의 반란을 꿈꾼다

관리자
발행일 2012.06.08. 조회수 432
칼럼

4천원의 반란을 꿈꾼다


 


정회성 미디어워치 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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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심히 일해도 가난한 우리시대의 노동일기



뉴스엔 늘 통계가 등장한다. 금리, 환율, 출생률, 스마트폰 가입인구추세, 건강상태와 아름다움을 지켜내는 영양섭취의 황금비율까지 통계는 숫자로 그려낸 삶의 총체다. 구체적이고 선명한 지표다. 다만, 숫자엔 영혼이 없다. ‘60대 여성 사망원인 1위 골다공증’이란 통계 속에 일생을 가족에게 바쳐온 어머니의 고단함은 묻어나지 않는다. 통계의 맹점이다. 보기 쉽고 활용하기에도 편리하지만, 상상력을 헤치고 무관심은 증식시킨다.



「4천원 인생」은 건조한 숫자와 무심한 통계에 사람의 얼굴을 입혀보자는 동기에서 출발한다. 4천원은 최저임금을 상징하는 숫자다. 사람다움을 지켜낼 최후의 보루이자 대물림하는 가난의 연결고리이기도 하다. 몇 해 전 시사주간지 <한겨레 21>의 네 기자는 식당, 가구공장, 대형마트 납품업체, 중소제조공장에 각각 위장취업해 최저임금 뒤에 숨은 삶의 모습을 발굴하고 전했다. 「4천원 인생」은 그 이야기를 하나로 엮은 책이다. 「4천원 인생」 이전까지 미디어는 ‘노동자’에게 붉은 머리띠와 억센 팔뚝질로 몽니부리는 이미지를 덧칠해왔다. 하지만 ‘노동자’는 오늘을 살아가는 평범한 우리의 다른 이름이기에 ‘열심히 일해도 가난한 우리시대의 노동일기’란 부제는 「4천원 인생」이 전하는 진성성의 실체다.


 



가난의 잔혹사



「4천원 인생」은 친절한 책이 아니다. 기성 미디어 속 ‘체험, 삶의 현장’처럼 노동의 신성과 땀의 가치를 전도하지 않을뿐더러 ‘극한직업’이나 ‘생활의 달인’처럼 현장이 지닌 스펙터클 혹은 숙련된 노동의 경이로움을 비춰주지도 않는다. 고되게 일해도 가난하고, 가난해서 고된 일밖에 할 수 없는 이들의 일상을 그저 담담하게 서술할 뿐이다.


 


그럼에도 <한겨레 21>의 네 기자가 구조적 분석이나 대안 제시라는 목적 없이 한 달씩 현장에 머물며 기사를 써내려간 까닭은 ‘97년’ 이후 달라진 우리 사회 가난의 풍경 때문이다.



‘가난은 나라님도 구제 못한다’는 옛말이 있다. 인류가 농사를 짓고 수확물을 갈무리하기 시작한 뒤로 가난은 언제나, 어디에서나 존재해왔다. 그래서인지 ‘나라님도 구제 못할 가난’이라면, 언뜻 체제의 그늘을 향한 자조 섞인 한탄처럼 들린다. 하지만 왕조시대 민초들이 겪어온 굶주림의 고통은 상당 부문 탐관오리의 학정과 지주의 탐욕이 빚어낸 이중 착취 구조의 결과물이었다. 고로, 가난을 시스템의 불가피한 역기능쯤으로 치부한 지배계급의 신화는 포악한 무능과 집단이기주의의 방증일 뿐이다.



허나 부족함에서 비롯한 갈증과 허기는 없는 이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본래 빈 땅 1마지기를 향한 집념은 여느 가난뱅이보다 천석꾼이나 만석꾼이 되는데 딱 1마지기 모자란 부자의 것이 더 크게 마련이다. 주린 속을 달래려는 행위는 가난한 이들만의 투쟁이 아니며, 욕심이란 바닥이 없는 그릇이기에 저마다 됨됨이를 나무랄 수 도 없는 인지상정의 노릇이다.



구중궁궐의 오색단청이 ‘투어 버스’의 간이정류장으로 퇴색하는 동안 왕조는 공화국으로 거듭났다. 만인이 누리는 경제적 풍요와 정치적 자유가 상식으로 통하는 요즘이니, 과연 진보는 역사의 필연인 듯하다. 그렇다면 진보의 세월동안 가난은 그저 손 놓고 있었을까. ‘자유와 평등’이 보편화되기 전과 후, 어느 쪽이 헐벗음과 굶주림으로부터 상대적으로 보다 깊은 절망과 모멸을 인간에게 안기겠는가. 빈부의 스펙트럼이 펼쳐내는 인간사 비극 또한 지난 세기동안 사회 변혁과 더불어 복잡한 진화를 거듭해왔다. 바로 「4천원 인생」이 주목한 가난의 새로운 양상이다.


 



웬만해선 가난을 벗어날 수 없다



열심히 일해도 가난한 현실이라니, 「4천원 인생」은 그 뫼비우스의 패러독스를 이렇게 풀어낸다. ‘97년’ 이후 우리 사회에서는 평생직장이란 개념이 사라지고 똑같은 일을 해도 다른 대가를 나눠 갖는 부조리가 제도로서 뿌리를 내렸다. 보람도, 성취도, 미래도 없는 노동이다. 하지만 ‘97년’으로 무너져 내린 가정은 가난의 새로운 대열에 합류해 불안과 차별의 노동까지 감내하고 받아들였다. 가난은 헤어 나올 수 없는 늪이 되었고, 다른 출발점에서 경쟁을 펼쳐 보지도 못한채 낙오한 아이들까지 차별의 현장으로 뛰어든다. 그렇게 가난은 우리 사회에서 거역할 수 없는 카르마의 순환처럼 돌고 돈다.



이제 누구나 언제든지 ‘4천원 인생’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 통계로 드러나는 우리 사회 양극화 실태가 체감수준을 따라잡지 못하는 오늘이다. 4천원이나마 감지덕지 손에 쥐는 아무개도, 달랑 4천원만 쥐어주는 아무개도, 겨우 4천원으로 결정해버린 아무개도 동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이다. 다만, 명심해야할 한 가지는 모래알처럼 흩어져 침묵을 유지할 때나 4천원도 그저 푼돈일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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