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숫물이 댓돌을 뚫듯이...

관리자
발행일 2006.07.29. 조회수 1856
스토리

우리 경실련에서는 7월 마지막 주와 8월 첫째 주가 권장 휴가기간이다.그래서 그 기간 중 사무실은 다소 한산하다. 하지만, 비만 오면 물이 새는 경실련 건물은 한산한 가운데서도 긴장감을 늦출 수 없게 한다. 며칠 째 우리 사무처 모처장님은 옥상 방수 공사를 직접 하느라 분주하고, 조금 지쳐 보이기도 한다.

어렵사리 우리 건물을 장만하여 이사한지 2년 6개월여 쯤 되었다. 새 건물인데도 여기저기 비가 새는 것은 싸게 빨리 지으려다 그런 것인지, 건축업자의 양심불량 탓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벌써 한 달여 동안 계속된 장마에 건물 바닥이 들뜨고 벽 곳곳은 축축하게 젖어 있다.

급기야 오늘은 물이 떨어지는 계단에 놓아둔 신문더미 한 부분에 구멍이 나 있는 것을 발견했다. 어처구니없는 마음에 정말 낙숫물이 댓돌을 뚫을 수도 있겠구나 하는 오버스런 생각마저 떠오르는 날이다.


하여간 오늘부터는 우리 연구소 간사 둘이 휴가를 가서, 홀로 부서를 지키게 될 앞으로 일주일 동안은 더욱 한산하고 어떤 면으로는 좀 편할 것 같기도 하다. 권장 휴가 기간이 2주 간이고, 각 개인 당 허락되는 휴가는 1주일이므로, 예를 들어 7월 마지막 주에 쉬는 사람과 8월 첫 주에 쉬는 사람은 2주 동안 못 보게 되는 셈이다.

평간사 시절엔 이러한 이유로 어떻게든 부서장과 다른 주에 휴가를 잡으려고 했었는데, 어느 정도 책임과 권한이 주어진 지금 아이러니하게도 부서 간사들하고 다른 주에 휴가를 가려고 애쓰고 있다. 그런데 그 이유는 그 때나 지금이나 똑같이 눈치 보고 간섭할 사람이 없어 편하기 때문이라는 것도 마찬가지로 아이러니하다.


다 아는 얘기지만, 선배가 되고 책임과 권한이 조금 더 주어질수록 후배들 대하기가 무척 신경 쓰이고 어려워진다. 평간사였을 때는 선배한테 대들고, 말 안 듣고, 이런 저런 것은 닮지 말아야지 하고 참 편하게 생각할 수 있었다.

그런데 선배라는 입장이 되니 대들고 말 안 듣는 걸 보면 속이 부글부글 끓고, 닮지 말아야 겠다 생각했던 것들을 되풀이 하고 있는 건 아닌지, 또 그런 것들을 후배들이 따라 배우는 건 아닌지 노심초사 하게 된다.

그래서 새삼 깨닫는다. 나랑 같이 일했던 선배들 참 힘들었겠다고. 동시에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도 가지게 된다.


“내가 어제 말한 거잖아. 기억 못할 거면 메모라도 좀 해!”
“그럴 거면 네가 총장해라.”
“그 따위 질문에 대답도 하고 싶지 않다. 먼저 해결하려고 최대한 노력하다 안 되면 물어봐야 할 것 아냐.”
“왜 그리 개념이 없냐” 등등.

처음 경실련 활동 시작하면서 수도 없이 들었던 말들을 이젠 내가 하고 있다.

그런 지적을 받으면서도  적반하장으로 ‘누군 처음부터 잘 하냐, 배우면 다 잘 할 수 있다’고 대들어서 선배 속을 뒤집어 높은 벌을 지금 받는 것인지, 종종 내가 그런 일을 겪기도 한다.

입장이 바뀌면서 후배들에게서 들은 말 중 가장 기억에 남는 말은 ‘전 저녁에는 일찍 가고 싶은 데요’ 였다. 순간 예전에 새벽 2, 3시까지 일하고 술 한 잔 기울이며 서로 수고 했다 격려한 뒤 헤어졌던 일, 주말 일요일 할 것 없이 출근해서 함께 보고서며 피켓 등을 만들면서 즐거웠던 시절이 떠올랐다.

식대나 시간외 수당이란 건 애초에 머릿속에 없었고, 그저 뭔가 사회를 바꾸는 일을 하고 있다는 게 보람 있었고, 함께 일하는 선배와 동료들이 좋았었다. 술 마시고 긴장이 풀어진 모습들도 서로가 편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더욱 친밀해진 듯한 느낌이 들기도 했었다.

그런 기억이 못내 아쉬운 것을 후배들에게 강요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일은 업무 시간 내에 마칠 수 있도록 집중하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닐 테고, 그 이외 시간은 개인적인 생활에 할애하고 싶어 하는 경향은 시민단체에서만 그런 것은 아닌 듯하다.

경실련 창립 초기 상근 구성원은 소위 운동권에 속하던 사람들로서 경실련이란 조직은 생계를 위한 수단이 아닌 자신이 생각하는 바대로 사회를 바꾸기 위한 장이었다고 본다. 그렇지만, 몇 해 전부터 지금까지 이곳에 발을 디디는 사람들 중 다수는 다양한 목적과 함께 생계 수단, 직장을 염두에 두고 있었을 것이다.

달라진 구성원에 맞게 조직문화도 변화되어 가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애초의 의미에 다른 것이 가미되었다고 해서 초심조차 변하는 것은 아닐 테고, 오히려 더 잘 되어 갈지 모른다.


나의 계속되는 지적과 잔소리 때문만은 아닐 거라 생각하고 싶지만, 한동안 힘들어하고 어두웠던 한 후배의 얼굴이 비온 뒤 갠 하늘처럼 요즘 무척 밝아지고 일도 열심히 배우고 적극적인 태도로 나서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걸 보면서 역시 사람의 의지와 시간은 많은 걸 바꿀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예전처럼은 아니겠지만, 같은 공간에서 같은 뜻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이란 동지의식을 가질 수도 있지 않을까, 많은 말이 아니어도 상대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이런 기대감을 가져본다.

마치 낙숫물이 댓돌을 뚫듯이 서로의 마음과 마음이 천천히 스며들어서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다.


서희경(경제정의연구소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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