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 성’이 다시 열리다.

관리자
발행일 2007.07.13. 조회수 1689
스토리

개성은 고구려 때에 동비홀이라 불리었다고 한다. 동비홀의 어원은 도비구루(두비구루)인데, 도비(두비)는 “열다”, 구루는 “성”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즉, “열린 성” “열려진 곳에 있는 성”이라는 뜻으로 풀이된다.



서울에서 개성까지 직선으로 약 45km. 도로로 약 70km. 지도를 펴고 자로 재어보니 이천과 여주의 중간쯤 되는 거리이다. ‘열린 성’은 서울에서 한 시간이면 닿을 거리에 있지만, 반세기가 넘게 ‘닫힌 성’이 되어있었다.

지난 6월 23일 개성 영통사 성지순례의 기회가 찾아왔다. 작년 11월 ‘개성공단 숲 가꾸기’ 행사에 참여했지만, 개성 시내를 들어가지 못했던 것이 내내 아쉬움으로 남았었기에 이번 개성방문 및 영통사 성지순례는 한반도 평화를 위해 뛰는 활동가로서 새로운 의미를 가질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영통사’는 송도3절인 황진이와 서경덕의 얘기로 잘 알려진 개성 오관산에 위치해 있다. 고려시대에 대각국사 의천 스님이 출가해 천태종을 개창한 천년고찰의 사찰로서 불교계의 성지이다. 16세기경 화재로 인해 없어진 것을 500년 만인 2005년 10월 대한불교 천태종의 지원으로 복원 낙성식을 개최하였다.


▲ 영통사 입구에서 통일협회 회원들과 함께

오전 8시 30분에 군사분계선(MDL)을 넘어야 하기에, 7시 30분경에 도라산 출입사무소(CIQ)에 도착하였다.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겠지만, 남과 북을 오가는 일은 출·입경이라고 한다. 다른 나라를 가는 것이 아니라, 경계를 넘는 것이기 때문이다.

개성으로 가는 길은 너무도 짧다. 금강산 관광 때에도 느끼는 것이지만 잠깐 사이 우리는 북측 땅에 들어서게 된다. 너무나 가까운 거리를 너무도 먼 시간 동안 닫아 두고 있었다. 갈등과 반목으로 얼룩진 남과 북의 깊은 상처가 하루빨리 치유되어 자유롭게 이 길을 오갈 수 있기를 기원해 본다.

개성으로 가는 길 오른편으로 지난 5월 17일, 56년 만에 남북의 열차가 휴전선을 넘어 오갔던 경의선이 함께 달리고 있다. 열차시험운행이 일회성 행사로 끝났지만 조만간 시베리아 횡단철도와 중국횡단철도를 통해 더 넓은 땅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확신을 가져본다.

개성출입사무소에서 다시 한번 입경심사를 받는다. 6개월여 만에 다시 찾은 곳이지만 너무도 많이 변했다. 이제는 지나친 경계와 고압적인 북측 사람들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남북경제협력의 상징인 개성공단이 남과 북을 이처럼 친근하고 가깝게 만들었으리라 생각한다. 결국 잦은 왕래와 교류가 서로의 이질성을 극복하게 하고, 평화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는 시금석이라는데 의문의 여지가 없다.

개성 출입사무소를 나가면 개성공단이 펼쳐진다. 개성시 일대 2000만평(공단 800만평, 배후도시 1200만평)에 남한의 자본·기술과 북한의 노동·토지를 결합해 3단계에 걸쳐 조성되는 개성공단은 올해 말 1단계 100만평에 대해 개발사업이 완료되면 300여 업체가 입주할 예정이다.
현재 39개사(시범 15개사, 본 단지 1차 24개사) 입주업체 중 22개사의 공장이 가동 중이다(17개 업체 준비 중). 1만 2000여명의 북측 근로자와 700여명의 남측근로자가 함께 근무하고 있는데, 개성시의 5만여 가구 중에서 다섯 집에 한 집은 개성공단 근로자를 두고 있다는 통계가 나온다. 1단계 개발을 마치면 북측 근로자는 10만 명으로 늘어난다고 한다.

이번 개성방문의 목적은 영통사 성지순례여서 개성공단은 그저 스쳐지나갈 수밖에 없었다. 서서히 개성시내로 접어든다. 언제나 그렇듯 설렘이 찾아온다. 처음으로 찾아가는 곳이어서 그 느낌은 더욱 강했다.

한때 인구가 족히 70만 명이 넘었고, 예성강 하구에는 멀리 아라비아까지 명성을 떨친 국제무역항 벽란도가 있었고, 벽란도에서 개성 시내까지 이어진 길은 가옥이 즐비하고 추녀가 잇닿아 있어 비가와도 젖지 않았을 정도로 번성했던 개성의 모습은 이제 찾아 볼 수 없다. 우리가 흔히 영상물을 통해 볼 수 있는 북쪽의 모습이 있을 뿐이다. 하지만 개성공단 2~3단계 개발이 완료되면, 개성공단에서 일하기 위해 수십만 명의 북측 근로자가 다른 지역에서 개성으로 옮겨 올 것이며, 배후도시인 개성은 많이 변할 것이다.

개성시내, 버스 창이라는 장벽이 다시 세워져 있지만 그 장벽을 넘어 남과 북은 하나가 되어가고 있다. 창밖으로 보이는 사람들과 손을 흔들며 서로 화답하고, 짧은 시간 미소를 지어주는 서로의 모습에서 우리는 친근한 이웃을 만날 수 있다. 남과 북의 체제와 사상은 중요하지 않다. 평화란 거추장스러운 조건들의 산물이 아니라, 서로 다름을 이해하고 다가가면 되는 것이다.

개성방문 및 영통사 성지순례 일정은 매우 빠르게 지나갔다. 영통사 법회를 하고, 개성시내의 통일관에서 점심을 먹고, 고려역사박물관(성균관)과 선죽교를 둘러본 후 다시 남쪽으로 내려온다. 좀 더 많은 곳을 보고, 버스에서 내려 북측사람과 얘기도 해보고, 나무그늘 한쪽에서 막걸리 한 사발 같이하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지만 머지않아 이루어질 거라는 기대에 아쉬움을 달래본다.


▲ 북측 참사와 함께

남쪽으로 돌아오는 길, 가장 아쉬움이 남는 것은 역시 사람이었다. 작년 11월 처음 개성공단을 가서 만났던 북측 참사를 영통사에서 다시 만났다. 서로를 알아본 것은 너무도 짧은 시간이었다. 두 손 꼭 잡고, 껴안고 반가움과 기쁨을 나누었지만 이내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투철한 사상교육으로 무장한 사람들이라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다음에 다시 만나면 우리는 다시 두 손 맞잡고, 껴안고, 미소 지을 것이다.

얼마 전, 개성 영통사 성지순례가 정례화 되었다는 반가운 뉴스를 접했다. 첨예한 사안이었던 관광요금 문제가 잘 해결된 것이 무척이나 기쁘다. 이제 보다 많은 남쪽 사람들이 북쪽 사람들을 만나고 함께 어우러질 수 있으면 된다.

‘한반도 평화’라는 잘 익은 과실을 거두기 위해서 온 겨레가 힘과 지혜를 모아 거름을 뿌리고, 물을 주어야 한다. 그 거름은 대북 인도적 지원이고, 그 물은 남북경제협력이며, 잦은 왕래와 문화교류는 갈라져 생긴 차이를 극복하는 좋은 볕이 될 것이다. 머지않아 한반도 평화를 위한 우리의 노력이 큰 결실을 맺게 될 것을 확신한다.


(김삼수 통일협회 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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