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은행 독립을 촉구하는 경제학자 41인 성명

관리자
발행일 1999.10.11. 조회수 3908
경제

   물가불안이  가중되고  있다. 년초   정부의 공공요금 인상 이후  가파르게 상승하기 시작한  소비자물가상승률은 이미  3.5%선을 넘었다. 소비자들이 느끼는  피부물가는 10%선을 초과하여 서민생활에 대한 불안감이 확산되고 있다. 이 가운데 수출이 호전되면서 경기가 급격한 회복세로 돌아서자 총수요의 확대와 함께 물가불안은 더욱 심화될 전망이다.


  물가불안의 우려가 고조되자  대통령은 취임 1주년  기자회견에서 국민에 대한 사과와 함께 강력한 물가억제 의지를   밝힌 바 있다. 이에 따라 정부는 물가를 억제하기 위해 농산물 긴급수입, 인상된 서비스요금의 환원, 국세청의 세무조사, 지방자치단체장 문책  등을 대책으로 제시하였다. 그러나  과거 일사분란한 명령.통제경제체제하에서도 인위적인  물가억제가 성공하지 못했음을 감안한다면 이러한  대책이 성과를 거두리라고는 기대하기 어렵다. 지속적인 물가상승의  요인은 그대로 둔채 인위적으로 억제하려고만 한다면 실효를 거두기도  어렵거니와 추후 물가폭등의 잠재요인을 누적시킨다.


  최근의 물가불안은  근본적으로 신정부의 과도한  통화량팽창에 기인하고 있다.  신정부의 출범과 함께  우리경제에 절실히 요구되었던  것은 안정 기조의 정착과  국제경쟁력의 회복이었다. 90년대 이후우리경제는 대형 투기거품이 꺼지면서 근로자들의 근로의욕과 기업의 투자의욕이 격감하는 현상이 나타났는데 이에 따라 성장의 잠재력을 잃고 아시아의 4마리 용에서  탈락하는 비운을 맞았다. 이런 상황에서 필요한  책은 우선 과잉유동성을 흡수하여 안정을 찾는 것이었다. 그리고  불법비리의 척결과 경제력 집중의 분산 등 경제개혁을 합리적으로 추진하여 일반기업들과 근로자들의 경제의욕을 돋구는 것이었다. 이는 단기적으로 고통과 혼란이 따를지 모르나, 장기적으로 비전 가질 수 있는 새로운 경제구조와 질서를  마련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신정부는 출범이후 축제 분위기  속에서 온 국민에게 성장의 몫을 증가시킨다는 정치논리하에 경기부양에  갖가지 수단을 동원하였다. 정부는 신경제계획이라는 미명하에 경기의 부양조치로 통화공급 확대, 공금리 인하 등 고단위 팽창정책을 내놓았다. 한편 이로 부터 야기되는 물가불안을 억제하기 위해 정부는 근로자의 임금인상을 억제하고 공산품가격을 동결하는 고통분담정책을 제시했다. 그러나 생산과 투자기반이 무력화된 상태에서 이와 같이 돈을 풀고 고통분담을 강요하는  것은 경제의 자생적인 활성화보다는 구조적 내부불안을 가중시키는 작용을 했다.  그 후 결국 물가는 계속 오르고 경제불안이 심화되는 현상이  나타났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최근 금융개방이 허용됨에  따라 단기성 투기자금이 해외로부터 유입되어 물가의  악순환을 구조화시키는 제2의 경제불안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와 같은 무모한 통화팽창은 맹목적으로  정부의 지시에 따라 돈을 푸는 중앙은행 기능의 낙후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사실 과거 30년 동안 우리나라  경제의 비효율적인 구조는  경제의 생명줄인  중앙은행이 부당하게 정치권력에 예속된  것에 기인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중앙은행의 예속은 산하금융기관을 정경유착의  도구로 만들면서   갖가지  비리와 부조리를  유발하는 제도적인  장치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지난해 8월  정부는 금융실명제를  전면 실시했다.  우리경제는 오랜동안 정경유착과 지하경제의 덫에 걸려 구조적 비리가 누적되어 왔다.  따라서 경제발전은 일부계층을  위해 희생이 컸으며 이로  인해 나타난 소득격차와 사회불균형은 건전한  경제성장과  사회발전을 가로막는 구조적  장애물이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금융실명제 실시는  모든 금융거래를 투명하게  함으로써 부도덕한  정경유착을 단절하고  지하경제를 제거하는 기반을 마련한 것이 된다. 그러나 아무리 금융거래를 투명하게 해도 본원통화의 공급이 정치권력에  의해 좌우되는 한 정치적 이해에 따른 편향적인 통화증발과  경제정책운영상의 비리는 얼마든지 가능하다.  이때  정치적 목적으로 풀린 돈은   물가불안을 통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국민의 부담으로 전가된다.  이런 견지에서 정치권력으로부터  통화증발압력을 거부할 수 있는 중앙은행의 독립은 관치경제의 비리를 막고 물가불안을 억제하기 위한 전제조건이 된다. 결국  중앙은행의 독립이 전제되지 않는 한 금융실명제는 근원적 차원의 비리의 여지를 남겨놓음으로써 미완성의 개혁으로 남는다.


  선진국의 경우 중앙은행이 독립적일수록  정치적 통화증발이 적고 물가상승률이 낮아지는 경향을 보인다는 것이  많은 실증연구결과에 의해  밝혀지고 있다.예컨대  하바드대학의 berto Alesina교수의  연구에 의하면, 1973-86년중 중앙은행의 독립성이  잘 보장된 독일과 스위스의  인플레이션율이 연 4%에 불과한 반면,  독립성이 약한 이탈리아, 스페인등은 인플레이션율이 년 14%에 육박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추세에 따라 중앙은행의 법적인 독립성을 보장하거나 또는 보장하기 위한 입법절차를 밟고 있는  나라들이  크게  증가하고  있다. 뉴질랜드,  칠레,  카나다  등은   1989-91년중 자국 중앙은행의  독립성을 제고하는 방향으로 중앙은행법을 개정하였으며 EU국가들도 유럽동맹을 결성하기  위한  마스트리히트 조약에 의거, 자국 중앙은행의 독립성을 제고하기 위한 입법절차를 밟고 있다. 특히 최근에는 브라질, 멕시코 등도 자국  중앙은행의 독립성을 제고하기 위한 입법절차를 추진할 예정이라고 발표하였다.


  그동안 우리나라 중앙은행제도의 근본적인 문제점은 중앙은행인 한국은행이 60년대 이후 정부권력부서인  재무부에 계속 예속되어 왔다는 것이다.  재무부는 재정정책을 관장하고  중앙은행은 통화신용정책을 관장함으로써 두 정책간의 조화와 균형을 이루게  하는 것이 국민경제의  균형적, 안정적 성장을 위한 필수적 요건이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중앙은행의 모든 기능이 재무부에 의해 통제됨으로써  발권력이 행정권력의 지배하에 들어가고 정치논리에 따른 통화신용정책의 운영이 제도화되었다.


현재 재무부장관이 통화신용정책의 최고의사결정기구인 금융통화운영위원회의 의장을 겸임하면서 금융통화운영위원회의 의결사항에 대한 재의요구권까지 보유하고 있다. 동위원회의 구성에 있어서도 재무부장관과 한은총재를 제외한 임명직 위원 7인  중 5인을 정부가 추천토록 되어 있는데다, 각 경제부처에 부여된 위원추천권도  추천사무를 담당하고 있는 재무부장
  관이 행사하고  있어 금융통화운영위원회를 사실상 장악하고  있다. 또한 통화신용정책의 실질적 운용에  있어서 재무부장관이 금융통화운영위원회 의장이라는 이유로 재무부가 법제  이상으로 한국은행의 일상적인 업무수행에 깊숙히 관여하는 것이 관행화되어 있다.


  재무부는 금융통화운영위원회의 기능을 엄격히 통제함과 동시에 금융기관의 설립, 해산, 합병, 취소,  인가권을 실질적으로 장악하고 있다.  또한 은행감독원에  대한 업무지시를 통해  일반은행에  대한 전면적인 감독권을 행사함으로써 관치금융의 창구로 활용하고 있다.


  재무부는 특수은행과 더불어 단자회사,종합금융회사, 증권회사 등  2금융권의 금융기관들을 직접 관할함으로써  중앙은행의 통 화신용정책 기능을 무력화시키고 있다. 현재 한국은행이 통화관리상 통제할 수 있는 수신고는 전체의 30% 수준으로  중앙은행의 통화신용정책이 실질적으로  무의미한 상태이다.


  외환관리업무에  대한 관할권도  재무부에 예속됨으로써  통화신용정책의 효과는 더욱 제한적이다. 실제로 금융시장 개방과 더불어 외국자본의  유출입에 따른 금융시장 교란이 효과적으로 통제되지 못하여 경제혼란이 더욱 크게 우려되고 있다.


  지난 30여년간 지속되어온 만성적인  인플레이션은 국민들로 하여금 특히 중상층 이상의 국민들로 하여금 인플레이션 방비책 또는 인플레이션을 이용한 축재책으로 부동산을 선호하게  만들어 부동산가격을 크게 높이도록 작용했다. 부동산 투기소득에서 오는 높은 수익률은 은행대부자금에 대한 엄청난 가수요를 낳았으며 기업 또한  생산적 활동에 의한 이윤을 추구하기보다 불로소득,  투기소득을 추구하는 데 몰두하여  국민경제의 자원과 자금이 생산적 부문으로 흐르지 않고 비생산부문으로 흐르는 왜곡된 경제구조를 낳았다. 또한 만성적인 인플레이션은 명목금리의 상승을 가져오고 금융기관 차입, 회사채 발행 등 기업의 외부자금 의존의 극대화를 조장하 여 기업의 금융비용부담을 크게  높이게 작용하였다. 그리고 만성적인 인플레이션은 근로자들로 하여금 끊임없이  요구임금 수준을 높이게 작용하였다. 특히 재산상의 불균등이 심화되고 집을  소유하지 못한 근로자계층이 증대되면서  계층간의 갈등이 심화될 뿐만  아니라 근로의욕을 저해해 왔다. 결국 인플레이션은 고지가(高地價).고금융비용(高金融費用).고임금 (高賃金)을 초래함과 아울러 근로의욕과  투자의욕의 상실을 가져와 우리나라의 국제경쟁력을 현저하게 저하시켰다.


  1987년 6.29선언 이후 경제민주화를 위해서 중앙은행을 독립시켜야  한다는 국민적 여론에 부응하여 동년 8월에 헌법개정특별위원회는 한국은행법을 개정하여 한국은행의 독립성을  보장하기로 공식합의한 바 있다. 이어 여야 각 정당은 동법의 개정을 대통령 및 국회의원 선거과정에서  선거공약으로 내세웠다. 노태우 대통령은 취임과 동시에 1년 이내로 한국은행법을 개정하기로 재차  확인하기도 했다. 그러나 점차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정부와 여당은 기득권 유지 차원에서 중앙은행의 독립성을 약속대로 보장할 수 없다는 입장을 취하였다.  이에따라 재무부는  1989년 11월 금융통화운영위원회의 건의를 받아들이는 형태로 중앙은행  독립논의 자체를 무산시키고 말았다. 그러나 그후 1992년 12월 대통령선거때에 여야 각 정당들은 또다시 중앙은행의 독립성 보장 내지 통화신용정책의 중립화를 선거공약으로 제시한 바 있다.


  우리나라의 인플레이션과 경제불안의 근본원인은  과도한 통화팽창에  있다고 믿고 있는 우리는 적정통화공급을 위하여 더이상 중앙은행의 독립성 보장을 늦출 수 없다는 판단하에 다음과 같이 요구한다.


 1. 국민경제  발전의 왜곡과 사회분열이 심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경제와 사회의 안정과 균형적 성장을 위한 장치로서 중앙은행의 중립성을 실질적으로 보장할 수 있도록 한국은행법을 개정해야  한다. 여기서 한국은행의 정책의 결정, 집행 및 감독기능의 삼위일체로서 완전한 중립성을 가진 조직으로 명시되어야 한다.


  2. 한국은행 총재는 중앙은행의 최고책임자로서 국민에 대하여 직접 책임을 진다는 차원에서 국회의 동의를  얻어 대통령이 임명하되 임기를 장기화하고 임기중 신분을 철저히 보장하여야 한다.


 3. 중앙은행의 최고의사결정기구인  금융통화운영위원회의 의장은 한국은행 총재가 당연직으로 맡아야  하며, 금융통화운영위원회의 위원은  한국은행 총재의 제청으로 대통령이 임명함으로써 재정정책의 담당부처인 재무부의 인사관여를 배제하여야 한다.


  4. 한국은행 내부경영의 자율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재무부장관의 업무검사권, 정관변경승인권 등은 폐지하고  한국은행 예산권은 현행대로  금융통화운영위원회가 보유하여야 한다.


  5. 은행감독원의 기능이 통화신용정책 수행의 실질적 수단이  되고  있음을 감안할 때, 은행감독원은  당연히 중앙은행의 내부구조로  존속하여야 한다. 은행감독원장은 한국은행 총재의  제청에 의해 대통령이 임명하도록 함으로써 외부의 관여가  없도록 해야 한다. 또한 은행감독원에 대한 재무부의 지시통제권을 폐지하여  관치금융의 통로를 차단하여야 한다.


  6. 재무부가  관장하고 있는 외환업무는 경제의  국제화가 진전됨에 따라 통화신용정책에 미치는 영향이 막대함으로 고려할 때, 그 관할 권한을 통화관리의 주무처인 한국은행에 복귀시켜야 한다.


7. 특수은행 및 제 2금융권에  대한 통제권을 한국은행이 갖도록 하여 총괄적인 통화신용정책을 펼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와 같이 한국은행의 중립성이 보장될 때 첫째,  한국은행이 정치권력이나 이익집단들로부터 독립된  위치에서 통화신용정책을 수립, 집행함으로써 통화가치의 안정, 국민경제의  건전한 발전이라는 중앙은행의 본래 사명을 다할 수 있다. 둘째, 통화신용정책이 민주적 절차에 의해 입안,  집행 및 감독됨으로써 통화의 과잉증발에  의한 물가폭등 및 투기의 악순환이 차단되어  국민의 부당한 재산피해가 방지될  것이다. 셋째, 관치금융 등 편법금융이 불식되고 금융산업의  전문적, 민주적 발전이 가능하여 자금배분의 효율성이 제고될 것이다. 이에 따라 산업구조의 편중 현상이 시정되고 국제경쟁력의  배양도 가능해질  것이다. 넷째,  경제개방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통화신용정책의 수립과 집행을 가능하게 함으로써 경제개방에 따르는 피해를 줄이면서  긍정적 효과를 확대시킬 것이다. 다섯째, 정경유착으로 인한 특혜성 자금공급을 차단할 수 있어 권력형 비리와 지하경제의 원인이 제거될 수 있다.


  중앙은행의 독립은 재정정책과 통화신용정책을 분리시켜정부정책의  조화로운 운영에 문제를 발생시킨다는 재무부측의 견해가 있다. 그러나  위에서 제기한 중앙은행의 독립은 정부로부터의  독립이  아니라 정부내의 독립으로서 그동안  재무부의 통제하에서  통화신용정책 수행기능을 거의 상실한 중앙은행으로 하여금 본연의  위상을 되찾게 하자는 것이다. 따라서 재정정책에  대한 통화신용정책의  견제기능을 살려서  진정한 의미의 정부정책의 조화를 꾀하자는 것이다.   이런 견지에서 중앙은행의 독립은  오히려 정부정책의 조화를 위해서 필요한 것이다.


 결론적으로 중앙은행의 독립성 확보는 실질적인 경제민주화의 버팀목으로서 우리경제의 안정적 균형 발전을 위한 필수조건이다.


1994년    5월   20일


  강철규(서울시립대 경제학)   강헌구(장안전문대  경영학) 김관영(한양대 무역학) 김성민(한양대 경영학)  김세열(한남대 경제학) 김장호(숙명여대 경제학) 김재원(한양대 경제학) 김종석(홍익대 경제학) 김지형(한양대 경제학) 김태동(성균관대  경제학)  김효명(한양대  경제학) 박광호(한양대 경영학) 백용호(이화여대 경제학)  사공진(한양대 경제학) 신봉호(서울시립대 경제학) 안국신(중앙대 경제학) 안철원(서울시립대 경제학) 양재선(순천대  경제학) 양창삼(한양대 경영학)  유관희(한양대 회계 학) 윤원배(숙명여대 경제학)  이근식(서울시립대 경제학) 이만우(고려대 경제학) 이민원(광주대 경제학) 이재기(세종대 경제학) 이진순(숭실대 경제학) 이필상(고려대 경영학) 임덕호(한양대 경제학) 장덕주(국민대 경제학) 장오현(동국대  경제학) 장지상(경북대 경제학)  전광일(인천대 경제학) 전영서(한양대  경제학) 정기인(한양대 무역학)  조우현(숭실대 경제학) 주만수(한양대  경제학) 주한광(세종대 경제학)  최단옥(인천대 경제학) 최명근(서울시립대 세무학) 최정표(건국대 경제학) 한광호(순천대 경제학)


  (이상 41명. 가나다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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