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화산책] 삼선교의 여름

관리자
발행일 2023.05.31. 조회수 35519
스토리

[월간경실련 2023년 5,6월호-우리들이야기(4)]

삼선교의 여름


최윤석 사회정책국 간사


그곳에서는 언제나 젖은 풀 내음이 난다.
아니, 그렇지는 않다. 언제나 라고 할 수는 없다. 정확하게는 그곳을 떠올릴 때면 젖은 풀 내음이 난다.

한성대입구역을 빠져나와 삼선시장 초입의 안동전집 맞은편, 가로수 그늘 아래에 서면 잊을 수 없는 기억에...가 아니고. 아직은 여리게 흐르는 성북천 웃물 머금고 사춘기 소년의 머릿발처럼 제멋대로 자라난 수생식물들이 야성을 드러내고, 복개광장 아래 인공폭포에서 떨어지는 물줄기가 도심 매연에 찌든 고막을 씻겨낸다. 여름이었다, 랄까? 그럴 리는 없겠지만 그곳에는 언제고 여름인 것만 같은 분위기가 있다. 능수버들이 길게 드리우고 땅강아지가 재게 돌아다니던 구불구불한 옛 시골 하천의 향수가 있다. 삼선교에 갔다, 삼선교 없는.


분수마루(분수광장)

조선시대에는 이 근방을 삼선평(三仙坪)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삼선(三仙)이라는 단어의 유래에 대해서는 설이 나뉜다. 근방의 옥녀봉에 세 명의 신선이 내려와 옥녀와 놀았다는 전설에서 유래했다는 설, 신라시대 화랑들이 심신을 수련한 곳이었기에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 등이다. 어느 쪽으로 보나 예로부터 이곳의 산수가 수려했음을 보여준다. 그곳에서 성북천 양쪽을 이어주던 삼선교는 이제 한성대입구역의 괄호 안에만 남았지만 삼선평은 삼선동으로 이어졌다.



삼선교의 옛 모습은 사라졌지만, 그 위는 이제 더 많은 사람이 쉬어가는 광장이 되었다. 새롭게 단장한 너른 나무데크 위에서 어린아이들이 바퀴 달린 것들을 타며 늦은 봄의 충만한 햇살을 온몸으로 만끽하고, 그 모습을 바라보며 노인들은 게으른 부채질로 권태를 흘려보내고 있었다. 이렇게 남녀노소가 한 공간을 공유하며 자기만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광경을 도시에서 본 게 얼마 만인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성북천

일대가 지금과 같은 모습을 갖춘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라고 한다. 성북천은 근현대사를 거치며 여러 차례 모습을 감췄다가 드러냈다. 1960년대 말 삼선교에서 성북경찰서에 이르는 구간이 복개된 것을 시작으로 1990년대에는 성암교회까지 덮여 한때 주차장으로 쓰인 적이 있었다. 그러다 2002년 복원공사를 시작하여 점차 개복 구간을 확대, 마침내 2010년에 지금의 모습을 하게 되었다. 2005년 복원된 청계천과 인접한 유사한 도시개발 사례로서 ‘꼬마 청계천’이라는 애칭이 붙기도 했다.



그러나 그 이외에는 청계천과 별로 비슷한 구석이 없다. 무엇보다 가장 큰 차이는 성북천만의 예의 그 아늑한 분위기이다. 어쩐지 청계천을 떠올리면 팔도의 재화가 모여드는 거대한 시장건물과 반듯반듯하고 삐까뻔쩍한 빌딩들, 혹은 멋쟁이 양복신사들이나 확성기 소리가 떠올라 편안한 산책과는 친해지기 어려운 느낌이 든다. 반대로 성북천에는 오밀조밀 들어선 오래된 상점들이 익숙한 기억을 불러일으키고 사람의 손길을 덜 탄 날것 그대로의 생태가 늘 싱싱한 에너지를 뿜어낸다.


삼선골목시장

사실 가까운 데에 이런 곳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건 동숭동에서 일을 시작하고 나서도 한참 뒤의 일이다. 사람이고 물이고 낮은 곳으로 향한다고, 예정에 없이 식당이나 카페를 찾을 일이 생기면 으레 낙산을 등지고 동숭동이나 혜화동으로 내려가곤 했다. 저녁 약속을 잡기 위해 조금 멀리 나가도 희한하게 종로 밖을 나가본 일이 거의 없다. 혜화문고개 밖은 어쩐지 멀게 느껴졌다.



좀 새로운 데를 가보자 해서 왔던 곳이 이곳 삼선교, 삼선시장이다. 정말이지 만만한 가게 투성이었다. 맛으로나 가격으로나 데일 염려가 없어 문턱을 넘기가 만만하다는 뜻이다. 발길 닿는 곳마다, 눈길 머무는 곳마다 그런 가게들이 즐비했다. 대폿집, 횟집, 전집, 펍(Pub), 순댓국집, 해장국집까지, 종류도 다양했다. 그래서 선택이 어려워 눈앞이 까마득해졌더랬다. 그날 우리 일행은 심사숙고 끝에 닭갈비와 막창을 같이 하는 집에 들어갔다. 선택은 탁월했다. 아니, 장담컨대 다른 집이었어도 웃으며 주인장께 카드를 드렸을 것이다.


여름이었다.

정말이지 여름이었다. 요샛말로 ‘추억보정’ 효과 때문인지 모르겠으나 ‘여름’ 하면 무더위보다는 넉넉한 나무 그늘 아래로 불어오는 선선한 바람이 떠오르는데, 이 글을 위해 삼선교에 가서 느낀 감각이 딱 그랬다.


아주 더우면 나가기 별로 안 좋을테니, 딱 요맘때, 그러니까 때 이른 더위가 기승을 부리지만 일교차가 커서 오후 늦게부터는 날씨가 제법 선선해지는 요사이가 딱 좋다. 오후 네다섯 시쯤부터 성북천 따라 느릿느릿 1시간 정도를 산책한 후, 그 시점에서 가장 구미가 당기는 음식을 하는 집에 들러 저녁식사에 반주를 걸친다. 하늘은 어느새 어둑해져 있다. 맞은편 편의점에서 맥주를 한 캔 사서 광장에 앉는다. 그리고선 지나는 사람들을 구경하며 밤바람에 취하고 술에 취하는.


그런 호사를 누리기 좋은 5월이다. 신선이 다 무어냐,
그게 신선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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