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생의 갈등과 적대적 갈등

관리자
발행일 2012.02.08. 조회수 577
칼럼

갈등과 분열의 시대


 


6.25 이후 요즘처럼 우리나라에서 이념 대립이 심한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초등학교 무상급식 문제를 비롯한 복지 문제, 대북문제, 감세 문제, 원자력발전을 비롯한 환경문제 등 여러 문제에서 진보 쪽 사람들과 보수 쪽 사람들은 서로 상대방의 얘기를 듣지 않고 욕만한다. 분단 때문에 원래 관용의 풍토가 부족한 우리나라이긴 하지만 요즘은 더욱 심한 것 같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념 대립은 소득 계층 간 대립과 거의 일치하는 것 같다. 예외가 더러 있긴 하지만 대개 경제적으로 잘 사는 사람들은 보수 쪽이며 못사는 사람들은 진보 쪽에 가깝다. 과거 가난한 학생이었던 학창시절에는 진보적 생각을 갖고 있던 친구들이 대학 졸업 후 좋은 직장에 다니면서 잘 살게 되자 매우 보수적으로 된 사람들이 되었다. 우리나라 극우 보수 정치인 중에도 과거 학창시절에는 좌익 사상에 경도되어 노동운동이나 학생운동에 맹렬히 헌신하던 사람들이 여럿 있다. 개구리가 올챙이 적 시절을 잊고 있다. "인식이 존재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가 인식을 결정한다"는 마르크스의 말은 동서고금의 진리인 것 같다. 여기서 존재란 경제적 여건을 말한다.


 


우리사회에 이념대립과 계층간 갈등이 첨예화되기 시작한 것은 1997년말 IMF환란이후 신자유주의에 세뇌되어 우리나라 사회지도층들이 시장만능주의라는 미신에 빠진 다음부터 인 것 같다. 원래 자본주의에서는 돈이 돈을 벌므로 빈부격차가 확대되기 마련이고, 시장만능주의에 빠지면 빈부격차를 당연한 자연의 섭리로 받아들이게 된다. 더욱이 현 정부가 들어서서 기업 친화적이라는 명분으로 친재벌 정책을 노골적으로 추진하면서 빈부격차의 확대와 이념간·계층간 갈등의 골은 더욱 깊어졌다.


 


빈부격차가 크게 확대되고 이로 인해 사회갈등이 격화되어 사회 안정을 해치고 민심이 여당에 등을 돌리자 현 정부도 재작년부터 공생발전과 동반성장을 구호로 내걸고 있다. 그러나 동반성장위원회의 이익공유제 주장을 지식경제부장관이 공개적으로 비난하는 등, 이 위원회가 거의 힘을 못 쓰고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현 정부의 정책은 실제로 별로 변하지 않은 것 같다.


 


상생의 갈등


 


오늘은 전번 칼럼에서 말한 상생의 원리와 연관시켜서 갈등의 문제를 생각해 보자. 어느 사회에서든 개인이나 집단 간에 다양한 이해관계, 가치관, 취향들이 존재하고 이로 인해 차이가 존재하기 마련이다. 차이는 갈등의 원인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풍요와 다양함의 원천이기도 하다. 모든 사람과 집단 간에 차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바람직하지도 않다. 차이와 다양함이 없는 획일적 사회는 삭막할 것이다. 만일 이 세상에 한 종류의 식물, 한 종류의 동물과 한 종류의 인간, 똑같은 모습의 산천만 있다면 끔찍할 것이다. 수많은 종류의 식물, 동물, 인간과 자연이 존재하는 덕분에 세상과 우리의 삶이 풍요롭고 아름다울 수 있다. 만일 모든 사람의 취향과 적성이 똑 같다면 인간의 생존이 어려울 것이다. 모두 하나의 직업만 원하려 할 것이기 때문이다.


 


차이는 갈등을 낳고, 갈등은 흔히 파괴와 고통을 연상시키지만, 갈등은 생명의 유지와 발전에 필수적이다. 많은 경우, 갈등과 상생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일찍이 밀(J.S. Mill)은, "모든 인간사에 있어서, 서로 생명력을 갖기 위해, 그리고 그들의 고유한 목표를 실현하기 위하여, 서로 갈등하는 영향력이 필요하다.."고 말하였다. "만일 배타적으로 하나의 목표만 추구한다면 하나는 과다하게 되고 다른 것은 부족하게 될 뿐만 아니라, 원래 배타적으로 추구하던 목적도 부패하거나 상실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 말은 일반적인 경우로 확대될 수 있다. 사물들은 대개 자신과 갈등하는 대립물을 갖고 있으며, 이런 갈등 덕분에 존재의 의의를 가질 수 있으며, 갈등에서 발생하는 긴장관계를 통하여 양쪽 모두 타락과 안일에 빠지지 않고, 자신의 생명력을 유지하고 발전시킬 수 있다. 이기심과 이타심, 진보와 보수, 자유와 경제적 평등,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자유방임주의와 개입주의, 자본가와 노동자 등이 모두 그러하다. 이기심과 이타심 어느 하나만 존재하는 사회는 유지될 수 없을 것이며, 이상을 추구하는 진보주의자는 전연 없고 현실에 안주하는 보수주의자들만이 존재하는 사회는 정체와 퇴행을 면치 못할 것이며, 보수주의자들의 신중함과 현실적 고려 없이 진보주의자들의 이상만으로 추진되는 개혁은 시행착오와 혼란만을 초래할 것이며, 경제적 평등에 대한 고려 없는 자유만의 추구는 자유를 타락시킬 것이며, 자유 없는 경제적 평등은 생의 의미를 박탈할 것이다. 정부라는 사회주의부문이 전연 없는 백퍼센트의 자본주의경제는 시장의 실패로 인하여 침몰하게 될 것이며, 시장경제가 전연 없는 백퍼센트의 사회주의경제는 효율성의 하락과 개인 자유의 부재로 한심한 사회가 될 것이다. 개입주의와 자유방임주의의 어느 한 가지 정책만으로 운영될 수 있는 시장경제도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없을 것이며, 노동자와 자본가 어느 한 쪽 만으로는 기업경영이 불가능할 것이다.


 


자유와 상생도 상생의 갈등 관계에 있다. 상생 없는 자유는 소외와 갈등에 함몰될 것이고, 자유 없는 상생은 개인의 매몰을 초래할 것이다. 자유와 상생 어느 하나만 추구하면 개인도, 사회도 파탄에 이를 것이다. 이 둘을 적절히 조화시킬 때에 비로소 개인과 사회의 원활한 유지와 발전이 가능할 것이다.


 


이처럼 많은 갈등은 서로를 돕고 있다. 이와 같이 서로 도움이 되는 갈등을 상생의 갈등이라고 부르자. 상생의 갈등은 상생의 원리가 작동하는 갈등이다. 상생의 원리로 우리는 갈등관계를 윈-윈 게임으로 승화시킬 수 있다. 상생의 원리란 우리가 당면하는 갈등들을 상생의 갈등으로 파악하고 실천하는 것이다. 갈등을 상생의 갈등으로 승화시킬 때, 갈등은 발전의 원동력이 된다. 갈등이나 모순이 없다면, 아무런 발전도 없을 것이다. 당신은 좌익(왼쪽 날개)이냐 우익(오른 쪽 날개)이냐라는 질문을 받고, 잭슨(Jesse Jackson)목사는 "새는 양쪽 날개로 날아갑니다."라고 답하였다고 한다.


 


상생의 갈등이 필요한 근본적 이유는, 인간 세상은 복잡하여 어떤 문제든 하나의 방안만으로 해결할 수 없으며, 세상 사물들은 이념이든 제도이든 대개 불완전하여 서로 불완전한 것을 보완해 주는 대립물이 필요하기 때문일 것이다.


 


적대적 갈등


 


상생의 갈등이 아니라 적대적 갈등의 경우도 많다. 상대방을 상생이 아니라 타도의 대상으로 보고 서로 공격하는 갈등이 적대적 갈등이다. 이념 간, 계층 간, 지역 간, 세대 간 갈등이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주로 상생의 갈등이 아니라 적대적 갈등으로 나타나고 있다.


 


적대적 갈등의 원인은 제로섬게임과 집단적 이기주의의 둘일 것이다. 제로섬 게임이란, 전체의 몫이 한정되어 있어서, 한 쪽의 몫이 커지면 다른 쪽의 몫이 작아지는 경우를 말한다. 우리나라 지역갈등의 문제가 전형적 예이다. 우리나라에서 지역갈등이 발생한 주된 원인은 과거 30여년 계속된 군사독재시절에 정부의 고위직에서 호남 인사들을 소외시킨 것이다. 고위직의 자리수가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고위직에로의 출세는 제로섬게임이며, 제로섬게임에서는 서로 상대방의 몫을 위협하므로 제로섬게임은 기본적으로 적대적 갈등을 초래할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이런 제로섬게임에서 분배가 불공정하게 이루어지면 필연적으로 불만과 분쟁이 발생하게 된다. 과거 군사정권시절, 출신지역이라는 불공정한 기준이 공직출세의 기준으로 작용함으로써 영호남 간의 지역갈등이라는 적대적 갈등이 발생하게 되었다.


 


사회갈등을 초래하는 또 하나의 요인은 집단이기주의이다. 전후 서독의 질서자유주의를 확립하였던 오위켄(Walter Eucken)은 '집단은 양심이 없다'고 갈파하였다. 동물과 달리 이성과 양심을 가지고 있다고 사람은 자부한다. 인간은 이성과 양심에 따라 행동하기도 한다. 아무리 나쁜 사람이라도 불쌍한 어린이를 보면 동정을 금치 못하고 불의를 보면 분노한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기와 이해관계가 없을 때이지 자신의 이해관계가 걸리면 이성과 양심은, 이해관계라는 거친 바람 앞에서 힘없이 스러지는 허약한 촛불과 같다.


 


그러나 이성과 양심이라는 우리의 허약한 촛불을 돕는 원군이 있으니 그것은 창피함을 아는 수치심이라는 우리의 감정이다. 이 원군 덕분에 우리의 허약한 양심은 이해관계라는 거센 바람 앞에서도 꺼지지 않고 우리로 하여금 죄를 저지르지 않을 수 있게 한다. 보통사람들이 좀처럼 범죄를 저지르지 않는 것은, 처벌에 대한 두려움과 양심 때문만이 아니라 나중에 발각되면 당하게 될 창피가 두려워서이다.


 


수치심을 결정하는 것은 이성이나 양심이라기보다 주로 주위사람들이 같이 하느냐 안하느냐의 여부이다. 창피해서 길거리에서는 옷을 벗지 못하지만, 목욕탕에서는 옷을 다 벗어도 부끄러운 줄 모르며, 평소에는 다른 사람을 때리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전쟁터에서는 다른 사람을 살해할 수 있는 것은 남들이 모두 그러기 때문이다. 집단행동은 창피함을 잊도록 하는 가장 강력한 수단이다. 집단이 되면 사람은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다.


 


이처럼 이해관계와 집단행동은 인간의 이성과 양심을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물이다. 이런 이해관계와 집단행동이 결합된 것이 집단이기주의이다. 집단이기주의는 인간의 미약한 양심을 마비시키는 가장 강력한 마약이다. 집단행동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사적인 이익을 주장하면서도 정의를 위해 투쟁한다는 착각에 빠져 들게 한다. 사회정의를 위해 투쟁한다는 비장한 사명감으로 삭발하고, 혈서 쓰고, 단식하지만 이들의 주장 중에는 사회정의로 둔갑한 집단이익인 경우가 많다. 집단이기주의의 최면에 빠져서 공익으로 둔갑한 사익을 외치는 고함소리가 천지에 가득하다.


 


집단이기주의를 예방하려면 비판의 자유와 관용의 풍토를 조성하여 양심적 소수가 자유롭게 집단이기주의를 비판할 수 있도록 하고 궁극적으로는 사람들의 의식수준을 높여 상생의 원리를 실천하도록 하는 것 말고는 별로 대책이 없어 보인다.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이념이라는 미신에 빠져서 진보와 보수, 자유와 경제적 평등,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자유방임주의와 개입주의, 자본가와 노동자 등을 적대적 갈등으로 파악하고 서로 상대방을 타도의 대상으로 보는 경향이 매우 심하다. 그러나 이들 둘 중에서 어느 하나만을 배타적으로 추구한다면 하나는 과다하게 되고 다른 것은 부족하게 될 뿐 아니라, 원래 배타적으로 추구하던 목적도 부패하거나 상실하게 된다. 양쪽 모두 그 자체로는 불완전하고 부족하기 때문이다. 이런 대립과 모순을 상생의 원리에 입각하여 서로 보완하도록 하여 상생의 갈등으로 승화시킬 때 양쪽 모두가 생명력을 얻고 개인과 사회도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위해 먼저 필요한 것이 자기와 다른 생각을 존중하고 인정하는 관용의 풍토이다. 새 해에는 관용의 풍토가 조성되어 사회적 갈등이 상생의 갈등으로 승화되면 좋겠다.
 
이근식
서울시립대 경제학부 교수, 경실련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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